123화
“그 괴물 같은 자가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뭐지?”
가웨인은 모르간과 함께 중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르간의 마법으로 모습을 변장한 둘은 자연스럽게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가고 있었다.
“적어도 거짓은 말하지 않았어. 우릴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구해준 건 사실이잖니?”
“그리고 그 괴물 같은 자도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지 모르죠.”
“하지만 그자의 말대로 우릴 강제할 순 없어.”
가웨인과 모르간의 의견이 갈렸다. 가웨인이 먼저 김진석의 말을 받아들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오로지 동료 기사를 위해서. 자신과 같은 다른 세계에서 온 동포이기 때문이다.
그들 전부가 다른 세계에서 영웅이었던 자들. 김진석과 생김새는 다를지언정 같은 괴물을 죽여온 자들이다.
그들이 모이면 김진석 하나쯤은…….
“옆에 여성도 괴물이던데?”
“…두 명쯤은…….”
가웨인은 말하다가 모르간의 반응을 보고 그녀를 쳐다봤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군요?”
“적어도 지금은 그 지옥에서 벗어났잖아? 이렇게 둘이서 비행기도 타고.”
“…어머니.”
모르간은 가웨인의 어머니였다. 오히려 겉모습만 보자면 가웨인이 모르간보다 늙어 보였다. 그런 가웨인을 아무리 늙게 봐줘도 30대 초반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모르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의 요정이었다.
인간과 달리 수명이 훨씬 긴 요정은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종족이었다.
“우리 요정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어. 나를 제압한 여성. 그녀에게선 끔찍할 정도로 악의가 느껴졌어. 여태껏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말이야.”
“…그렇다면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녀는 우리와 같은 존재야.”
“…동포란 말씀이신가요?”
“맞아.”
가웨인은 모르간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끔찍할 정도의 악의를 가진 그녀를 소환한 자라면 더더욱 위험한 거 아닙니까?”
“우릴 소환했다고 우리와 같은 자는 아니라는 건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니?”
“…….”
모르간의 말을 가웨인은 단박에 이해했다.
“확실히 그 여성은 끔찍한 악의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그 남자에게선 느껴지지 않았어. 선도. 악도 아무것도 말이야. 가끔 그런 자들이 있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자들. 요정들은 하나같이 그들을 전부 다 다르게 불러. 새하얀 도화지 같다거나 스펀지 같다거나 등. 난 그런 이들을 혼돈의 아이라고 부르지.”
새하얀 도화지. 스펀지. 혼돈. 결국, 뜻은 같다.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는 자야. 아직 악은 아니라는 거지. 게다가 끔찍한 악의를 가지고 있다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이들과 잘 지내고 있잖아?”
“…같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하지만 가웨인은 더는 모르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됐든 그는 자신과 같은 동포라고 불릴 이와 잘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해주고 동포를 구하라고 떠밀기까지.
“흠…….”
생각이 많아진 가웨인이었다.
* * *
김진석은 이제는 자신의 별장 안에 있는 테라스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옆에는 어디서 난지 모를 안경을 쓴 채 넬도 같이 앉아있었고 그녀는 무슨 패션 잡지 같은 걸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엔 이렇게 평범한 생활을 보내고 싶었는데.”
“예쁜 와이프 옆에 두고?”
넬의 말을 무시한 채 김진석은 하늘을 바라봤다.
흑호는 마찬가지로 별장 안에 있는 수영장 안에서 수영하고 있었고 김진석이 염원하던 평범한 생황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김진석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건 이유가 있었다.
“같잖은 짓 그만두고 앞으로 나오지 그래.”
“대단하시군요.”
색이 바랜 듯한 흑색 로브에 마찬가지로 머리 색이 전부 바랜듯한 웬 서양 할아버지가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얼굴엔 기이한 보라색 문양이 있었으며 손에는 커다란 보석이 둥둥 떠 있고 그걸 감싼듯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죠?”
“난 그냥 보여.”
그는 모습을 숨긴 채 있었지만 김진석이 그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물론 넬도 알았지만 김진석에게 맡겨두었다.
지금도 모습을 드러낸 이상한 할아버지였지만 넬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잡지를 보고 있었으니.
딱 봐도 마법사 같은 할아버지. 김진석조차도 알만한 유명인물이었다.
[멀린 LV:80]
지구에서 보았던 그 누구보다 레벨이 높은 자였다.
멀린은 하늘에서 별장 안 김진석의 앞까지 내려왔고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르간과 가웨인 기사를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염치불구하고…….”
“아니.”
김진석은 뒤에 올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쪽이 있단 건 아서왕도 있겠지. 그녀를 구해달라는 거 아닌가?”
아서왕 전설의 멀린. 대마법사인 그는 아서왕의 조력자로 그를 위해 헌신하는 자로 유명했다.
물론 그가 나온 게임이 워낙 많았기에 정확히는 몰랐지만 저 겉모습을 보면 그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게임에서 나온 것 같았다.
아서왕을 여성으로 단정 지은 것도 그렇다. 모르간과 가웨인. 그들이 있던 수집형 게임에서 나온 이다.
“아뇨.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김진석이 예상한 게 빗나갔다.
“…그럼?”
“아서 펜드래건. 그녀는 아직 이 세계에 소환되지 못했습니다. 이 세계. 지구의 인간들이 그녀를 소환하기엔 부족했던 것 같으니 그들이 성장해 그녀를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아직 그녀가 지구에 소환되지 않아서 오히려 소환을 바라고 있었다.
“모르간과 가웨인을 보았으면 알 텐데.”
“…어차피 아서왕. 그녀는 그 세계에 있으면 얼마 있지 않아 죽게 됩니다.”
멀린. 그는 미래조차도 예지할 수 있는 대마법사이다. 그는 이미 미래를 내다보았다. 아서왕이 죽는 그 미래를.
게임 속에서도 그녀는 죽어 플레이어에게 소환되는 내용이니 그 미래는 사실이었다.
“그럼. 모르간과 가웨인처럼 그녀가 소환될 때까지 그들은 고통받게 내버려 두란 건가?”
“…희생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한 희생. 그게 희생일까 아니면 그냥 개죽음일까.
그때 언제 사라졌는지 모를 넬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더니 동양인 남자를 잡아 왔다.
“이게 네 주인 같은데.”
“어디서……?!”
멀린은 자신을 소환한 중국인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그리고 이미 기절해 여성에게 제압된 상태인 걸 보고 경악했다.
“분명 숨겨두었는데…….”
가웨인과 모르간을 소환한 자는 S급 플레이어로 중국에서 평가받았지만 정작 그보다 더 강한 멀린을 소환한 플레이어는 A급 플레이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멀린이 자신의 힘을 숨긴 데다가 그를 소환한 플레이어는 언제나 그의 근처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멀리 가면 멀린은 자신을 소환한 플레이어에게 저절로 돌아가기 때문에 아무리 멀린이 강하다고 한들 그를 근처에 두어야 하기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마법사 멀린은 자신의 주인에게 모습을 숨기고 모습을 변화하고 투명하게 만들고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게 하는 등 온갖 마법을 걸어 아예 찾지 못하게 했지만 너무나도 허무하게 잡혀 온 것이다.
김진석은 허망하게 말하는 멀린을 쳐다봤다. 그 또한 주인이 죽으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저렇게 당황할 리가 없었으니깐.
그런데 그의 얼굴에 기이한 보라색 문양이 살짝 빛나는 것을 보고 김진석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크헝!
그와 동시에 별장 안 수영장에서 흑호가 날아오르듯 점프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멀린을 후려쳤다.
멀린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발현하려는 마법조차 취소된 채 땅바닥에 처박혔다.
“…쿨럭.”
꼴사납게 땅바닥에 처박혀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기이한 보라색 문양. 그게 빛난다는 건 멀린이 마법을 사용하는 징조였기에 김진석은 곧바로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흑호가 먼저 나서서 막아줬을 뿐.
“그래… 잘했어.”
흑호는 칭찬해달라는 듯 김진석의 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김진석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석은 멀린을 무시한 채 넬이 데려온 중국인을 바라봤다.
적어도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노인이라 불릴 자. 도저히 모바일 수집형 RPG 게임을 할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여경래 LV:15]
“한국식 이름인데.”
동양인만 구분할 수 있다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김진석은 아무리 봐도 중국인처럼 보였는데 이름은 한국식 이름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조선족으로 불리는 자입니다. 당신과 같은 한국인입니다!”
멀린은 입가의 피를 로브로 닦으며 말했다.
같은 나라 사람으로 동정심을 유발할 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잘못 생각했다.
“조선족이 왜 한국인이지? 그리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넬?”
“도청장치, 위치 추적 장치 등등 온갖 기기가 그의 몸에 붙어있었어요.”
넬이 살던 악마의 세계도 현대와 다름없었으니 그녀 또한 그런 기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서 이미 부스러기가 된 기기들을 멀린의 앞에 떨어뜨렸다.
“어차피 너희는 날 암살하러 왔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중국에서 웨이저밍. 가웨인과 모르간의 주인이었던 S급 플레이어가 이미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피와 명함은 사실 실험의 일종으로 김진석의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떻게 작동될까. 김진석의 근처에 있다고 표시될까 아니면 어떨까. 정답은 바로 지구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예 명함과 웨이저밍의 피가 지구에서 없었던 거로. 인터넷에 검색해도 그들의 위치가 어디로 측정 되지가 않았다.
말 그대로 실종된 거지만 이렇게 곧바로 중국에서 김진석에게 암살자를 보내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들도 S급 플레이어가 사라졌으니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얼마의 힘을 가졌는지 멀린을 보내서 확인할 속셈이었다.
“그나마 너희가 지금 살아있는 건 바로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아서. 그뿐이다.”
처음부터 적의를 보였다면 김진석은 곧바로 죽였겠지. 모습을 숨기긴 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모르간과 가웨인을 구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기에. 그렇기에 김진석이 그의 말을 들어준 것이다.
“흠…….”
원래라면 자신을 암살하러 온 자에게 자비 따윈 없었겠지만 멀린보다도 그의 주인인 플레이어에 더 관심이 갔다.
고작 레벨 15 수준으로 레벨 80의 멀린을 소환했다 라.
“도대체 무슨 기준이지?”
“…예?”
멀린은 긴장한 채 김진석의 말을 되물었지만 혼잣말이었다. 모르간과 가웨인을 소환한 웨이저밍도 고작해야 레벨 30. 하지만 그보다 더 낮은 이 여경래라는 노인은 자그마치 레벨 80의 멀린을 소환했다.
넬은 어느새 테라스 의자에 앉아 다시 잡지를 읽고 있었고 흑호도 흥미가 다 떨어졌는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넬. 이자를 깨우려면 어떻게 하지?”
“그냥 재워둔 거예요. 평범히 깨우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넬의 옷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무슨 패션 잡지를 읽더니 그거에 맞는 옷을 환각으로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김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멀린에게 말했다.
“왜 이자를 감싸지? 그쪽이 죽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가웨인과 모르간의 반응과는 달랐다. 웨이저밍을 붙잡았을 때 그들은 인형같이 정해진 걸 따라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멀린은 아니었다.
그저 레벨이 더 높아서 벗어날 수 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자는 홀로 손녀를 돌보고 있습니다. 자식이 전부 죽고 홀로 남은 손녀인데 그자까지 죽으면…….”
하지만 김진석은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대충 말을 들어보면 적어도 그쪽에게 나쁜 짓은 안 한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희생을 안 하면서 남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해?”
가웨인과 모르간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당한 일은 희생이라 말해놓고 정작 본인은 희생이란 걸 겪어 본 적도 없었다.
“진작에 그쪽이 나섰다면 희생도 없었겠지.”
유구무언이었다. 멀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왕을 위해. 언젠가 플레이어들이 소환할 아서왕 아서 펜드래건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무시해오고 있던 것이다.
“역겹기 그지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