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가웨인과 모르간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겠다는 말입니까?”
가웨인의 입장에서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기사와 함께 달려들어도 김진석을 죽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맨손으로 자신의 검을 잡고 모르간의 마법을 쳐내는 괴물인데.
그를 만나고 가웨인은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우물 밖 훨훨 날아다니는 새와 같은 자가 더 강해져야 한다니.
“괴물 같은 놈이 아직 살아있거든. 언제 우리 세계에 들이닥칠지 몰라.”
하지만 그런 새를 잡아먹는 매가 있었다.
“너희는 여차할 때 필요한 나만의 군대야.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아야 하는. 하지만 강제성은 없다. 어쩔래? 최소 너희 둘은 해방됐으니 다른 이들의 고통을 무시한 채 평범히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다른 이들을 구하면…….”
“한다.”
김진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웨인은 대답했다.
“우리 기사는 동료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 한 명의 기사가 잡혀있다면 열 명의 기사가 구하러 간다. 그중에 설령 다섯 명의 기사가 죽는다고 한들. 그게 우리 기사다.”
기사도. 혹은 동료애.
가웨인의 말에 김진석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군대란 건 거짓말이다. 만약 악마의 방주. 그 아크가 나오게 된다면 저들의 힘 수준으로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한들 아크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김진석이 그들을 구해주는 건 간단했다.
“세피드는 얌전히 있나?”
“네. 딱히 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세피드. 대 악마 중에서 가장 귀족, 기사와 같은 자가 바로 그다. 그리고 지구에선 눈앞의 가웨인과 모르간과 같은 위치다.
자신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 로스트 월드에서 플레이어가 이방인이라면 이제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
가웨인과 모르간이랑 다른 건 압도적인 힘을 가졌다가 전부. 만약 그 세피드가 중국에서 저들의 처지를 알게 된다면.
김진석의 말을 어기고 어쩌면 대학살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아니 무조건 일어날 거다.
세피드 또한 대 악마. 인간을 벌레 같이 여기는 대 악마다.
저들은 이미 이 세계의 인간을 뼛속까지 증오한다. 어쩌면 이렇게 풀어주면 저들이 대학살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들의 목적은 동료들을 구하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같은 이 세계의 인간인 김진석이 아무 대가도 없이 자신을 구하려는 것을 믿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저들에게 대가를 준 것이다.
“되도록 빨리 구해. 시간제한이 있으니깐.”
“……?”
김진석의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빨리 구하고 싶단 마음은 굴뚝같았으니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제일 잘 알겠지만 플레이어 자체를 죽이지 말고 내게 데려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실험을 당할 테니깐 걱정은 하지 말고.”
플레이어가 죽으면 그들의 동료도 사라지니깐. 그리고 아직 바포메트와 비네의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을 몬스터화 시키는 그 실험이 만약 아무 부작용 없이 성공하기 위해선 수많은 실험체가 필요하겠지.
김진석의 말이 끝나자 모르간과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려는데 김진석이 다시 붙잡았다.
“뭐해. 청소는 하고 가야지.”
“…….”
“…….”
* * *
제이다는 정말 별장을 말끔히 청소를 끝내고 떠나는 가웨인과 모르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김진석은 그들을 쳐다도 보지 않고 거실에 큰 소파에 앉아 넬과 함께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금화를 보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의 금화인가요?”
“맞습니다. 혹시 인벤토리 같은 게 있나요?”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인벤토리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지만 모든 플레이어가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뇨…….”
“그러면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를 데려오거나 아니면… 뭐 트럭이라도 가져와 주시겠어요?”
이제 제이다는 군말 없이 김진석의 말에 어디론가 전화하더니 금방 큰 트럭이 별장 앞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왜…….”
짤랑!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1분도 넘게 마술도 아니고 김진석의 손에서 금화가 후두둑 쏟아지고 있었다.
금화가 쏟아지는 건 트럭의 뒤를 가득 실은 뒤에야 멈췄다.
“대충 50만 개. 로스트 금화 50만 개면 얼마쯤 할지 부 길드장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아직도 연락이 없던데.”
사실 별장을 구하고 루크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중개인이 공짜로 내줘서 연락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젠 별장은커녕 서울 땅을 있는대로 전부 살 생각이었기에 얼마가 필요할지 몰랐다.
트럭 운전기사와 제이다는 수없이 쏟아지는 로스트 월드의 금화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금화라는 가치로만 따져도 꽤 나 비싸겠지만 로스트 월드라는 희소성이 더해져 더더욱 비싸졌다.
게임 속 세계에서 빠져나온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게임 속 물건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물건들은 전부 비싸게 팔렸다.
당연했다. 아무리 현실에서 몬스터들이 나오고 그 몬스터들의 소재로 아이템을 만든다고 한들 그건 전부 게임 속 아이템을 모방해서 만드는 게 전부였다.
진짜 아이템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아직도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이 들고 나온 아이템들을 사들여 전문적으로 성분을 분석하고 만드는 기업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외국에는 그 기업 중에서 로스트 월드의 물건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만드는 곳도 있었다.
김진석의 불만도 이해는 하지만 루크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열심히 그 기업과 협상 중이었다.
로스트 월드의 금화라는 건 세상에 몇 없는 것이었기에 루크도 정확한 가격을 잴 수 없었고 기업이랑 계속해서 연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트럭의 바퀴가 폭삭 내려앉을 정도로 김진석이 금화를 꺼낸 것이다.
“트럭이 퍼졌습니다. 이건 못 옮기겠는데요…….”
김진석은 트럭에 담을 수 있을 것만 생각했지, 금화의 무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이다는 어쩌냐는 눈빛으로 김진석을 바라봤고 김진석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부 길드장 불러.”
* * *
“…이게 다 금화입니까? 중국 S급 플레이어는 또 어딨고…….”
웨이저밍은 이미 비네와 바포메트에게 떠나 없었지만 루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웨이저밍도 S급 플레이어였으니 위치가 전부 떴으니깐.
그런데 분명 중국인 S급 플레이어가 이곳에 있다고 뜨는데 여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웬 수많은 금화가 땅바닥에 널려있었다.
“걔는 곧 실종 예정이야.”
“…….”
김진석의 말에 안 좋은 예감이 든 루크였다. 그의 피가 담긴 유리병과 명함이 별장 구석에 있다는 건 루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그리고 별장은 왠지 모르지만 중개인이 공짜로 줘서 돈은 필요 없는데 다른 돈 쓸 일이 생겨서. 제이다에게도 말해뒀지만 한 번 더 말하지. 서울의 땅을 살 거야. 어차피 아직 토벌 작전이 실행 안 했잖아? 이때 사야 싸겠지.”
서울 봉쇄지역 토벌 작전. 이신과 이설을 필두로 외국의 플레이어까지 끌어들여 한국 정부는 대대로 서울을 소탕할 셈이었다.
안개가 사라졌다고 한들 몬스터가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오히려 안개가 사라지자 서울을 봉쇄한 장벽으로 몬스터들이 더 많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황혼 길드도 참가하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제가 한국인도 아니지만 어쨌든 한국 길드입니다. 한국의 영토. 그것도 수도를 탈환하는데 저희가 참가하지 않으면 위상이 많이 떨어지겠죠.”
루크는 앞에 김진석의 말을 애써 무시한 채 그의 말에 대답했다.
“왜 서울의 땅을 사려고 합니까?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시는데.”
토지 재테크라고 말이 있긴 했다. 말 그대로 땅 가지고 재테크를 하는 것인데 플레이어들은 땅보다 집을 더 선호하기에 거의 안 했다.
언제나 몬스터와 싸우는 직업인 플레이어들은 땅보다 안락한 집이 더 중요했으니깐.
그리고 원하면 김진석은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루크가 보기엔 그는 전혀 그런 성격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물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제이다는 김진석을 흘깃 쳐다봤다. 과연 그는 진실을 말할 것인가.
“황혼 길드에 들어가자마자 미안한 말이지만 나도 새로운 길드를 만들어야겠어. 대신 너희 산하 길드로 들어가지. 이설 플레이어도 넣어줬으니 불만은 없겠지.”
김진석의 말에 루크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루크는 불만이 없었다. 애초에 그 자신의 길드에 김진석을 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지만 길드에 들어오자마자 일 줄은 몰랐다.
“길드 같은 걸 운영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김진석이 길드를 운영한다?
“그래서 산하 길드라고 했잖아. 대충 용병이라고 생각해.”
“길드도 기업 중 하나이기에 아무리 산하 길드라고 한들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실 텐데요.”
물론 김진석은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제이다 씨. 부 길드장 하세요.”
“…네?”
아마 황혼 길드처럼 이미리가 김진석이고 루크가 제이다의 역할을 하겠지. 어쩐지 루크는 그녀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길드원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생각해 둔 이들이 있어. 따로 길드원 신청은 안 받을 거야.”
제이다는 갑자기 부 길드장이 된 것에 어리둥절하다가 김진석의 말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김진석은 지금 지구로 와 고통받고 있는 NPC들로 된 길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길드 이름은 무엇으로 할 생각이죠?”
“…이방인으로 하지.”
게임 속 세계. 로스트 월드로 들어갔을 때는 김진석이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지구에선 NPC들이 이방인이다.
“어감은 별로 안 좋네요.”
“미안하군.”
제이다의 말에 김진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석도 전부 즉석에서 생각해낸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가웨인과 모르간. 그들을 구해주긴 했지만 이미 그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구해준 이상. 그리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상 그들은 지구에서 살아야 했다.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들이지만 전부 먹고 자야 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김진석이 그들을 먹여 살릴 이유는 없었으니 그들에게 일거리를 준 것이다.
고작 인간의 노리개가 아닌 하나의 일원이 되어 살아갈 수 있게. 그리고 그들이 살던 세계에 몬스터들이 지구에 나오는 걸 보면 어쩌면 그들이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길드를 만들 때 최소 인원이 있어야 합니다. 넬 씨도 같이 가실 테지만 고작 셋으로 길드를 만들 순 없습니다.”
“아마 일주일 내로 길드원이 충족될 거야. 아, 그리고 그들 전부가 미등록 플레이어일 테니 바로바로 부탁하지.”
“…….”
* * *
루크와 제이다는 김진석의 별장에서 나갔다.
루크는 수많은 금화를 보고 차라리 나중에 같이 날 잡고 그 기업을 찾아가자고 말했고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들을 도와주시는 거죠?”
그제야 지금껏 가만히 있던 넬은 김진석에게 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들은 저희랑 같은 다른 세계의 자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힘써서 도와줄 이유는 없지 않나요?”
김진석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넬이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귀찮은 짓을 하면서까지 도와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김진석이 성인군자도 아니고 자신의 생돈을 써가면서까지 도와주려고 하다니. 넬은 눈앞의 김진석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의심이 될 정도였다.
“지구에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건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게임 속 몬스터들만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이미 게임 속 NPC들이 지구에 몰래 정착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새로운 너희들이 있을 수도 있고… 노라와 다이아가 있을 수도 있겠지.”
로스트 월드에 들어가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맞은 자들이다. 그들이 지구에 왔을 때 적어도 중국에서의 일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레벨만 보면 S급 플레이어 수준이긴 했는데 과연 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