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김진석은 눈앞의 사람이 중국어를 하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곁에는 중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세 갑옷을 입은 젊은 멋진 서양기사와 마법사가 쓸법한 고깔모자와 지팡이를 든 적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마치 중국인을 지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김진석은 뭔가 계속 말하는 것 같아서 전화로 제이다를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나도 몰라. 웬 중국인이 날 찾아왔는데.”
“…바로 가겠습니다.”
지금 김진석의 옆의 넬은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다. 원래 이미리의 집이었으니 김진석과 넬은 둘이서 살법한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김진석은 처음으로 가지는 자기의 집이었고 넬은 김진석과 같이 지낼 곳이었기에 깐깐하게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인간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괜히 신혼집 찾아보는 느낌에 들뜬 넬이었는데 확 기분이 상했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끄는 중국인을 보고 넬의 눈이 돌아가기 직전, 다행히 제이다가 금방 찾아왔다.
“중국말 할 줄 알아?”
“네. 잠시만요.”
제이다와 그 중국인이 뭔가를 말하고 있을 때 김진석은 중국인과 옆에 있는 이상한 기사와 마법사에게 감정을 사용했다.
[웨이저밍 LV:30]
[가웨인 LV:67]
[모르간 LV:68]
생각보다 레벨이 높았다.
“S급 플레이어 웨이저밍입니다. 중국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하네요.”
그때 제이다가 중국인의 말을 해석해주었다.
“살 집을 찾고 계시는 것 같은데 중국에 오면 최고급 호텔을 준다고 합니다. 필요하면 여자, 남자도…요.”
김진석도 그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취향이 다르시면 남자도 있습니다.”
“하…….”
한숨이 나왔다. 김진석은 이미 감정으로 확인했다. 중국인 옆에 있는 이들의 이름. 유명한 소설. 혹은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이름들이었다.
웨이저밍이 했던 게임은 모바일 수집형 RPG 게임이었다.
이름 그대로 수집하는 게임이며 그 게임들은 대부분 유명 인물을 일러스트로 만들어 수집하는 게임이다.
즉, 저들은 게임 속 NPC격 존재이다.
하지만 중국인을 지키는 듯이 서 있는 저들의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그리고 중국인의 말까지.
“재워봐.”
그와 동시에 웨이저밍은 눈을 까뒤집고 그대로 기절했다. 제이다는 S급 플레이어조차 가볍게 재우는 넬의 힘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김진석은 그런 제이다의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이놈은 S급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제이다 씨 화살 한 발에 죽을 쓰레기예요.”
“네?”
아마 웨이저밍의 능력은 가웨인과 모르간과 같이 게임 속 존재를 소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 본인의 힘은 고작해야 레벨 30. B나 C급 플레이어 수준이었다.
자신의 주인이 기절하자 곧바로 가웨인은 검을 뽑아 김진석에게 달려들었고 모르간은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김진석은 모르간의 마법을 손등으로 쳐내고 가웨인의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그들의 감정이 완벽히 죽은 건 아니었는지 눈을 치켜뜨며 깜짝 놀랐다. 가웨인은 손을 떨면서까지 힘을 주고 있지만 김진석의 손에선 피 몇 방울 떨어질 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르간은 이미 넬에게 제압당해있었다.
“너희를 이놈에게서 해방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
김진석의 말에 자신들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혔을 때보다 더 놀랐지만 그들은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자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저자가 명령하면 죽으라고 해도 우린 죽어야 한다.”
가웨인의 말은 즉 웨이저밍의 말엔 강제성이 있다는 뜻이다.
“너흰 자유의지도 없나?”
“퉤… 네. 저자를 공격한다는 생각조차 안 들어요. 무언가 저희 머릿속에 감정을 잠가둔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저 저자의 명령을 따르기만 해야 할 뿐. 그게 어떤 명령이라도…….”
넬에게 붙잡혀 땅에 처박힌 모르간이 말했다. 넬의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모르간의 입에서 피까지 뱉어내며 말하고 있었다.
김진석은 넬에게 놔주라는 듯 손짓하고 가웨인의 검을 놔주며 손에 핏방울을 털어냈다.
“간단하네. 저놈이 너희에게 명령하지 않고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 아니야?”
“…네?”
“…뭐?”
힘을 주다 튕겨 나간 가웨인과 넬에게 풀려난 모르간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반문하려 했지만 김진석의 시선은 넬에게 향해있었다.
“집은 큰 게 좋지?”
“…침대는 하나가 좋아요.”
“됐고. 내가 큰 게 좋아. 크면 청소하기도 귀찮은데…….”
그렇게 말하며 김진석의 시선은 다시 가웨인과 모르간에게 향했다.
* * *
김진석과 넬, 가웨인과 모르간, 제이다는 기절한 웨이저밍을 끌고 별장에 들어왔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이 별장은 매우 큰 골칫거리였다. 하필 서울 근처라 일반인은 살지도 못할뿐더러 몬스터까지 나오니 아무리 싼 가격에 올려도 팔리지를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요즘 화제의 인물인 김진석이 그 별장을 사겠다고 온 것이다.
최상위 S급 플레이어 이신과 함께 서울에 들어가 전장을 끝낸 자. 비록 그 공을 전부 이신과 이설 남매에게 돌렸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걸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진석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 김진석은 일반인들에게 선의를 베푼 적이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보다 가장 먼저 나서서 몬스터를 죽여버린 것이다. 물론 그때는 김진석이 호기심에 온갖 몬스터를 잡으러 간 것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나온 순간 인명피해는 없을지언정 어떻게든 피해가 생기는데 김진석이 그걸 막아준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 중개인은 목숨과도 같은 최고 매물을 김진석이 지켜준 전적이 있었다.
“아무리 허위 매물이라고 하지만 공짜로 주는 건… 신기하네요.”
제이다도 서울 근처 집이 팔리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김진석에게 공짜로 줄 이유가 없었다.
최상위 S급 플레이어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도 있겠지만 이렇게 큰 별장을 공짜로 줄 이유는 없었다.
“뭔가 있겠지.”
김진석도 그렇게 생각했다. 정작 본인이 부동산 중개인이 가지고 있던 가장 비싼 매물을 몬스터에게서 살려준 것은 기억도 못 하고 있었다.
가웨인과 모르간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말 그대로 10초 만에 지옥과도 같은 삶에서 해방되었다. 심심하다고 맞고 재미없다고 맞고, 아름다운 여성인 모르간은 더 역겨운 일도 당해봤다.
일반인이라면 온몸에 흉터가 가득했겠지만 그들은 일반인을 넘어선 초인. 그들의 주인이 했던 일은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물론 드러났다고 한들 변할 게 없었겠지만.
그런데 그들의 눈앞의 주인과 같은 남자. 김진석은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주인까지 제압했다.
“넬. 비네와 바포메트한테 인간 실험체 하나 더 생겼다고 해. 절대 죽이지만 말라고. 그것 외에는 다 해도 된다고 말하고.”
“네~”
넬은 기분이 좋은 듯 김진석의 말에 하이톤으로 대답하며 웨이저밍을 잡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저흴 어쩔 속셈이죠?”
“그러게요.”
제이다는 속으로 생각한 것이 모르간의 말에 얼떨결에 입 밖으로 나오자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모르간은 자신을 제압한 넬이 사라지자 곧바로 지팡이를 들어 김진석을 겨눴고 그 앞을 가웨인이 지켜섰지만 둘은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에서 최강의 자리에 앉아있던 자들이다. 물론 둘을 대적할 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김진석과 넬은 격이 달랐다.
모르간은 자신이 어떻게 제압당했는지 눈치 채지도 못한데다가 김진석은 자신의 마법을 고작 손등으로 쳐냈다.
김진석은 가웨인 자신의 검, 비록 진짜 자신의 무기가 아니라고 한들 그 검을 고작 맨손으로, 한 손으로 막았다.
그런 그가 자신들을 해방해주고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가.
“내가 전에 집에, 아니, 뭐 내 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거기 청소하는데도 혼자 살기에 쓸데없이 커서 불편하더라고. 난 큰 집을 가지고 싶은데 그런 불편한 게 있어서 짜증 났는데 마침 공짜로 부려먹을 애들이 생겼네?”
가웨인과 모르간은 고개를 삐걱거렸다.
“그러면 그냥 청소부 아줌마를 부르시지…….”
“고작 저희를… 메이드로 고용하겠다는 말인가요?”
제이다의 말과 모르간의 말이 겹쳤다. 자꾸 옆에서 쓸데없이 껴드는 제이다를 김진석은 한번 노려봐주고 말을 이었다.
“메이드. 집사. 너희 쪽 세계의 말로는 그런 거겠지. 아. 그리고 너희는 이 세계에 하나뿐이지?”
“저희가 이 세계의 게임 속 인물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입니다.”
모르간의 말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절망, 불안, 슬픔, 그리고 분노와 증오. 우리는 하나. 이 세상에 하나란 뜻일까, 아니면 그와 같은 NPC들은 다 같은 하나라는 뜻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너희와 비슷한 처지의 이들이 많나?”
“…너무나도.”
그동안 처음을 제외하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가웨인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한국에 이런 이들이 있단 건 듣지 못했으니 아마 대부분이 중국에 있겠지.
“그럼 간단하네. 3일에 한 번. 못하면 일주일에 한 번 여기를 청소해. 그리고 나머진 너희 알아서 하면 돼. 제이다 씨. 부 길드장에게 내가 준 금화 어떻게 됐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김진석은 원래 그 금화를 판 돈으로 이 집을 계약하려 했는데 돈이 굳었다. 하지만 이들을 만난 이후로 돈 쓸 일이 더더욱 생겨났다.
“그리고 서울 안 땅을 최대한 크게 매입할 수 있는 만큼 사들이세요. 돈이 더 필요하면 제게 말씀하세요. 부 길드장에게 더 줄 테니.”
제이다는 갑자기 서울의 땅을 매입하라는 말에 의문을 가졌다. 김진석은 지금이 적기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서울이 전장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들 아직 그 안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즐비했다. 즉 그만큼 땅값이 싸다는 얘기.
서울 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죽었을 테니 서울은 정부가 가지게 되겠지. 아직 팔릴지도 모를 서울 땅을 사겠다는데 말릴 자는 없겠지.
“가웨인. 모르간.”
“…어떻게 이름을?”
“그쪽 친구들은 아마 중국에 많겠지. 하지만 내가 구해줄 의리는 없어. 내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하지 마. 하지만 땅은 마련해주지. 너희들이 숨어 살 땅을 말이야.”
그제야 제이다는 김진석이 땅을 사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런데 왜?
“난 최상위 S급 플레이어고 넬도 마찬가지야. 즉 세간의 수많은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너흰 달라. S급 플레이어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감시 따위는 없지. 너희만이 유일하게 너희들을 구할 수 있어.”
“…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제이다의 의문을 가웨인이 대신 물었다. 한낱 동정심이 아니라는 건 가웨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들의 처지에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왜.
“당신이 가진 힘은 규격외다. 감시들을 떨쳐내려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겠지. 왜. 우릴 구해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그때 넬이 돌아왔다.
“비네가 좋아하네요. 마침 살아있는 인간의 샘플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잘 쓴다고 했어요.”
상큼하게 끔찍한 말을 하는 넬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로스트 월드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여전히 적용되는. 처음엔 해야만 했지만 이제는 김진석의 삶의 원동력인 말을 했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