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제이다는 말을 삼켰다.
아무리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최소 방금 김진석이 죽인 몬스터가 그가 은혜를 입은 남자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다가 등에 뭔가 닿는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흑색 큐브가 있었다.
이 안에서 몬스터가 나온 걸 기억한 제이다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려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이신 플레이어?”
최상위 S급 플레이어 이신. 그의 목소리가 흑색 큐브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였지만 김진석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
김진석은 제이다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뒤에 있는 흑색 큐브를 바라봤다.
“그자가 저기 있나?”
“…이 안개를 들이마시고도 멀쩡한 인간이 있기에 그저 호기심에…….”
“풀어 줘.”
“…예.”
할아버지인 모습으로 시무룩하게 말하는 바포메트가 어이가 없었지만 김진석은 S급 플레이어 이신이 왜 여기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넬.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했지?”
물론 밝히면 귀찮아지기에 넬의 환각은 기억을 지울 수도 있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 김진석은 그녀에게 부탁했다.
“아예 없애 버리거나 아주 조금만 지울 수 있는데…….”
“조금만 지워.”
당연히 전부 지우면 안 되니 조금만 지우라고 말했다. 어차피 바포메트의 말을 들어봤을 땐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조금만 지워도 상관없겠지.
김진석은 깊은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며 한영석에 대한 걸 어떻게든 뿌리쳤고 여전히 시무룩해 있는 바포메트에게 말했다.
“그래서… 저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바포메트가 서울에 있던 이유가 아니었다. 김진석은 바포메트가 무슨 짓을 하던 상관 안 하기로 했지만 방금 이신을 잡은 건 상황이 달랐다.
비록 넬과 바포메트에겐 조무래기 급이었지만 그는 최상위 S급 플레이어. 그것도 한국의 김진석을 제외하고 유일한 최상위 S급 플레이어였다.
“죄송합니다. 그리 중요한 자인지 몰랐습니다.”
바포메트가 착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 안개가 넬이 만들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안개에 저항하는 인간을 보고 호기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김진석의 말을 따라 이신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김진석은 바포메트의 솔직한 말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가지고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니.
“저자는…….”
바포메트의 조심스러운 말에 김진석은 뒤를 돌아봤고 그가 가리키고 있는 건 한영석의 시신이었다.
“…묻어줘야지.”
김진석에겐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주변 인물이 죽은 건.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어느 순간 안 보인다는 건 죽었다는 뜻이었고 그 어렸을 때도 김진석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나서. 그곳에서 벗어나고 나서 로스트 월드에 들어갔을 때조차도 주변 인물이 죽지 않았다.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김진석은 자신이 죽음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겪었고 로스트 월드에선 자신이 강해지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았어야 하니깐.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더럽네.”
과거의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 *
“어딜 갔다…….”
루크는 일부로 잠복해있다가 김진석과 넬이 돌아오는 거에 맞춰서 그들을 추궁하려 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표정이 딱히 없었던 김진석이었지만 이번엔 표정에서 그의 감정이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폭탄이 터질 것만 같았기에 루크는 그대로 집으로 배웅했고 뒤에 따라오던 제이다를 추궁하려 했다.
그리고 제이다에게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절름발이인 그녀가 너무나도 멀쩡하게 걷고 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루크는 제이다에게서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진 못했다.
* * *
넬은 말없이 그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김진석도 마찬가지로 방에 들어가 큰 침대에 몸을 누였다.
눈을 감고 김진석은 오늘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이신은 넬이 기억을 지우고 서울 밖 한구석에 방치했다. 금방 발견되겠지.
한영석의 시신은 아직 묻지 않았다. 아직 몬스터들 천지인 서울에 그를 묻을 순 없었다. 바포메트에게 그의 시신을 최대한 온전히 보존해달라고 부탁했다.
과거 편의점에서 일할 때. 한영석은 그리 나온 배와 다르게 취미 생활이 산 타는 거였다. 김진석에게도 여러 번 권유했지만 물론 게임 하느라 안 갔지만.
산을 좋아하는 그였으니 살아생전 못 간 전망 좋은 산에 묻어드리면 되겠지.
“가장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라고 했나?”
그래도 해줄 거 가장 높은 산에 묻어두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김진석이었다.
김진석은 처음으로 피곤하다는 것을 느꼈다. 로스트 월드에서는 항상 피곤하긴 했다. 육체적으로.
하지만 지금은 처음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하다는 것을 느꼈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김진석은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겨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황혼 길드의 길드장 이미리는 오랜만에 한국에 입국했다.
“읭? 루크가 없네? 바쁜가?”
항상 한국에 들어왔을 때 루크는 이미 자신이 어딜 오가는지 전부 꿰차고 있어 마중 나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리가 섭섭해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미안해했다.
애초에 그녀 대신 길드 업무를 전부 떠맡고 있었으니깐.
“그래도 이번에 새 식구도 데려왔는데…….”
그렇게 말한 그녀의 곁엔 몬스터가 그녀를 지키듯 늠름하게 서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공항에서 난리가 났다.
몬스터가 공항에 나타났다고 플레이어까지 출동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정체를 눈치 챈 공항 경비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일단락됐다.
그녀의 옆에 늠름히 서 있는 몬스터. 인간처럼 두 발로 서 있었고 얼굴은 상어와 같았다. 손은 사마귀처럼 날카로운 낫을 가졌다.
긴 꼬리와 꼬리 끝에는 손에 달린 낫처럼 날카로운 날 두 개가 달려있었다.
온몸은 상어와 같은 푸르른 색이었지만 파충류의 비늘로 감 싸여 있는 몬스터. 리카이스. 현존하는 몬스터 중 가장 단단한 몬스터였으며 이미리가 길들이지 못한 몬스터였다.
“어때 카이야. 내 고향인데?”
끄어엉!
생전 처음 듣는 기괴한 울음소리는 길들여진 몬스터임에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리카이스. 이미리가 붙여준 이름 카이는 그저 동의하듯 울부짖은 거였지만.
“집에 가자… 그런데 네가 들어갈 자리는 부족할 것 같은데.”
3M 남짓한 크기의 리카이스는 평범한 집에 들어가기엔 너무나 비대했으니. 원래 그녀가 길들인 아이들은 그녀의 게임과 같이 몬스터를 잡은 조그마한 볼에 갇혀 지냈다.
하지만 그 볼 속 안은 안락한 공간이었으니 대부분 몬스터들은 그 안에 있는 걸 만족했다. 리카이스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는 수없이 이미리는 리카이스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 집에는 불청객이 있단 걸 모른 채.
물론 집에 간다고 해도 바로 간 건 아니었으니 오랜만에 한국에 와 바뀐 길거리를 한참 동안 돌아다니다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들어섰다.
늦은 밤인데도 황혼 길드의 길드원들은 그녀를 알아차렸고 배웅해주었다.
“어? 그런데 길드장님 집에 그분들 계시지 않나?”
길드원들이 그걸 알아차린 뒤에는 이미 늦었다. 이미리는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으니깐.
“…알고 계시지 않을까?”
“…….”
황혼 길드의 길드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세상 정세에 둔하다는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거에 몰두한 그녀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큰일 나기 전에 부 길드장님 불러!”
* * *
“왜 그래 카이?”
엘리베이터를 탈 땐 어쩔 수 없이 카이를 볼에 집어넣고 다시 빼내려고 했는데 카이가 볼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볼에 들어가기 싫어한 카이였지만 처음으로 볼에 들어가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집에 녀석이 나올 공간이 없었기에 이미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길드장답게 모든 곳을 들어갈 수 있는 마스터 키를 가지고 자신의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랜…?!”
오랜만에 집에 온 해방감에 소리치려는 순간 뭔가에 입이 막혔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알 수 없는 힘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 * *
김진석은 잠에서 깨어났다.
한두 시간만 자도 초인적인 힘을 가진 김진석은 피로감이 전부 가셨지만 이번엔 꽤 나 오래 잤는데도 피로감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
“후…….”
한숨을 내쉬며 김진석은 침대에서 일어나 왠지 모르겠지만 식은땀으로 젖어버린 몸을 씻으러 거실에 나왔는데 웬 처음 보는 여자가 현관에 누워있었다.
“넬.”
뭔지 모르겠지만 이런 짓을 할 자가 넬 밖에 없었으니 그녀를 불렀다.
“밤중에 침입한 자였어요.”
보기 드문 넬의 진지한 모습이었지만 김진석은 의문을 가졌다. 이신의 경우 멋대로 집에 침입해서 손까지 잘리며 도망치듯 쫓겨났다.
그나마 그것도 김진석이 있었으니 그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자고 있음에도 그저 기절만 시키고 그대로 내버려 둔 것 같았다.
아마 전날에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최대한 자신을 배려해주는 넬의 모습에 김진석은 대 악마답지 않은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씻고 나올 테니 대충 깨워 놔. 무슨 일인지 듣게.”
“알겠습니다.”
* * *
씻고 나온 김진석은 거실의 수많은 인기척을 느끼고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았더니 황혼 길드의 길드원들이 마치 군대에 갓 온 훈련병처럼 자세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현관에 누워있던 여성과 넬의 눈치를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었고, 그 사이엔 부 길드장인 루크도 있었다.
“뭐야?”
“깨워놓으라고 하셔서…….”
김진석이 잠들었을 때 현관에 여성만이 집에 찾아온 게 아니었다. 연락받고 찾아온 부 길드장과 길드원들도 찾아왔지만 넬이 전부 조용히 재웠다.
집 밖 문에서 말이다.
김진석은 도대체 뭔 일인지 몰랐지만 우선 머리를 마저 말리며 옷을 대충 입고 그들 앞 소파에 앉았고 넬은 그의 뒤에 섰다.
그들은 굳이 땅바닥에 벌서듯 앉아있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무슨 일이었죠? 이렇게까지 많이 찾아올 일이 있습니까?”
그 말에 황혼 길드의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전부 현관에 있는 여성을 바라봤다. 부 길드장인 루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길드장님에게 따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루크의 말에 김진석은 현관에 누워있던 여성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상황을 쫓아가지 못했지만 그냥 눈치껏 같이 있었다.
“여긴 황혼 길드의 길드장 이미리입니다. 길드장님. 여긴 S급 플레이어 넬. 이분은 최상위 S급 플레이어 김진석이라고 합니다.”
김진석은 대충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방랑벽이 있는 길드장이 하필 지금 한국에 들어왔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을 뿐이다.
거기엔 불청객인 자신과 넬이 있었을 뿐이고.
“미안합니다. 제가 그쪽 집을 멋대로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김진석이 저자세로 나가자 넬은 물론이고 루크를 비롯한 황혼 길드의 길드원들은 깜짝 놀랐다.
길드원들은 최상위 S급 플레이어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과 루크는 오히려 자기 잘못인데도 김진석 본인 잘못인 것처럼 말한 김진석에게.
황혼 길드의 길드장. 이미리는 떨떠름하게 그 사과를 받았다.
“아니에요. 제가 워낙 돌아다녀서 집에 없었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