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109화 (109/201)

109화

김진석은 넬의 능력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환각. 하지만 실체가 있는 환각은 환각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녀가 환각을 발현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말 환각. 다른 하나는 실체가 있는 환각.

실체가 있는 환각은 발현하는데 조건이 있었다. 바로 그 물체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 즉 이해한 모든 걸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제이다 씨.”

“…예?”

“혹시 도청장치라던가 있습니까?”

“아뇨. 그런 게 있다는 게 들키는 순간 S급 플레이어에게 신뢰를 잃습니다.”

다른 말로는 안 들키면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지만 적어도 김진석은 자신의 앞에서 제이다가 거짓을 말하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아직 그는 면죄부를 쓰지 않았으니.

“제가 만약 당신의 발을 고쳐준다면. 어쩌실 겁니까?”

“…네?”

제이다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려다가 김진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황혼 길드에는 공공연히 퍼져있다.

김진석이 절대 일반적인 신체 능력자가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제이다도 알고 있었고 그에게 비밀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밀이 많다는 건…

“김진석 님의 비밀을 무덤까지 끌고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그제야 김진석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제이다 또한 플레이어다. 비록 강제로 은퇴 당했지만 플레이어의 삶을 잊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여야 할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S급 플레이어가 돼도 그게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다.

그 상대도 S급 플레이어였으니.

사실 루크가 은퇴한 그녀가 안타까워 이 일을 제안한 거였지만 제이다는 흔쾌히 허락했다. 혹시나 최상위 S급 플레이어인 김진석이 그녀 대신 그 S급 플레이어를 죽여줄까 봐.

하지만 김진석은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 * *

이틀 뒤.

무슨 일을 하든 일거수일투족을 제이다에게 보고해야 하는 김진석은 넬과 함께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김진석의 손에는 붉은색 유리병이 들려있었다.

“비네가 혹시 모르니 자르고 하라던데요?”

“네? 그게 무슨…….”

제이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진석이 강제로 입에 유리병을 물리고 그와 동시에 넬이 아기 발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제이다는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벌렸고 자연스럽게 엘릭서가 그녀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전부 들어간 걸 확인한 후 김진석은 손을 뗐고 제이다는 A급 플레이어라지만 뒤늦게 찾아오는 상실의 고통에 벌벌 떨며 잘린 발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어?”

제이다는 고통도 잊고 멍하니 자신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 발이 재생되고 있었다. 거기까진 다른 포션과 똑같았는데 그 아기 발이 점점 커지며 맞춰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한영석이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김진석이 신세를 진 편의점 점장의 이름이 바로 한영석이었다.

제이다는 멍하니 자신의 발을 보다가 시선을 김진석에게 옮겼다. 그녀는 눈앞의 김진석이 마치 신처럼 보였고 마찬가지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루크는 며칠 동안 얌전히 지내는 김진석과 넬이 이상했다.

미등록 플레이어일 때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몬스터가 나온다. 하는 곳은 죄다 찾아가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등급을 가리지 않고 전부 죽이다 보니 한국에는 둘의 얘기가 공공연히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오히려 플레이어가 됐는데 가만히 있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GPS 상으로 그들은 정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명함을 두고 돌아다닐 수도 있지만 대상의 몸에서 멀리 벗어나면 알림이 가게 설정되어있다.

물론 어떻게 그리고 왜 발동하는지는 그 명함을 만든 마법사만이 알고 있었다.

그때. 루크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분명 잘 움직이고 멀리 가진 않았지만 주변을 돌아다니고 길드원들도 그들을 보았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단 일말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제이다도 별 이상 없다고 연락을 했지만 루크는 뭔가 불안했다.

마침 GPS 상에서 둘이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루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찾아갔다.

벨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둘의 GPS 상 위치가 완벽히 겹쳤다. 연인으로 알려진 둘이 완벽히 겹쳤다는 건 예상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만약 루크가 그대로 눈치 없이 벨을 다시 한번 누르면 욕먹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루크의 육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죄송합니다.”

혹시 몰라 말하고 문고리를 부숴버리며 들어갔지만 집안은 고요했다. 루크는 김진석이 머무르고 있는, 원래는 이미리가 쓰던 방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불이 볼록 튀어나와 있단 걸 빼면.

누가 봐도 둘이 그 안에 있는 상황. 하지만 루크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그 이불이 이상해 곧바로 들춰버렸다.

분명 둘이 붙어있긴 했다. 그런데 옷을 전부 입고 있었고 둘의 표정이 없었다.

마치 마네킹처럼.

“하…….”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 * *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다 장치를 해놨으니깐요.”

“…?”

넬의 말에 김진석은 의문을 가졌다.

그녀의 능력인 환각. 실체가 있는 환각으로 김진석과 넬을 만들었지만 당연히도 분신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인형처럼 넬이 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게 전부일 뿐이었다.

일반인이 보면 겉모습이 완벽히 똑같았고 설사 만져도 피부와 같은 촉감이 느껴지니 꽤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그리고 김진석은 인형에게 명함을 두고 갔다. 자신과 멀리 떨어지면 알림이 간다고 루크가 알려줬지만 김진석은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속된 대상의 피와 멀리 떨어지면 알림이 간다.]

피. 그래서 김진석은 피를 조금 흘려 유리병에 담아 자신의 인형에 품에 넣어둔 것이다.

지금 둘. 아니 제이다도 강제로 데려와서 총 셋은 지금 서울의 봉쇄지역 앞에 와 있었다.

“어째서 저도…?”

“괜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어차피 함께하기로 한 이상 루크에게 걸리더라도 제이다는 책임질 것이고 그건 김진석도 알고 있었다.

저 서울 안에서 만날 몬스터들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김진석은 언제나 몬스터를 상대할 때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던가.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 죽을 위험 따위는 없는 데도 최선을 다하는데 자칫하면 죽을 위험이 있는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수많은 몬스터를 사냥한 김진석이 방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김진석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

김진석은 봉쇄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보았던 성처럼 높게 벽을 쌓아 올렸지만 재질은 콘크리트였다. 물론 일반적인 콘크리트에 몬스터의 소재를 섞어 만든 더 단단한 콘크리트였지만 어쨌든.

5M 정도 되는 벽이 서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만화에서나 볼 법한 벽이었다.

지반 때문에 더 높게 쌓아 올릴 순 없었지만 성벽처럼 그 위에 군인들이 배치돼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은 쉽게 들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물론 그들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가능하지?”

“기억을 없앨 수도 있어요.”

그것까지 바란 건 아니었지만 가능하다면 상관없었다.

“저 벽. 오를 수 있나?”

“네? 아… 활을 사용해 하체에 자신 있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발이 재생된 지 몇 시간도 안 지났다. 게다가 왼발로만 걸어 다녀서 그런지 그녀는 왼쪽 허벅지는 매우 탄탄했지만 비교적 오른쪽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김진석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활?”

“네. 제가 했던 게임이 중세 시대가 배경이어서 활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로스트 월드에서도 활을 사용하면서 레벨이 높은 자는 다이아를 제외하고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제이다는 다이아를 처음 만났을 때와 레벨이 비슷했다.

“활은 어딨죠?”

“은퇴하고 난 이후 팔아버렸습니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있었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서울 봉쇄지역에 처음 와보았지만 이곳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군인과 플레이어가 상주하는 곳이다.

서울을 봉쇄한 만큼 크기도 거대했지만 가끔 몬스터가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근처에는 일반인이 없고 플레이어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한국에는 활을 사용하는 플레이어가 많았다.

“하나 가져오지 뭐.”

물론 빌리는 거다. 김진석 멋대로.

* * *

“빌린 겁니다. 조심히 사용하세요.”

“…….”

김진석이 가져온 활을 제이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화랑의 활. 내구도 98/100

과거 신라에 있는 무사 조직이 사용하는 활이다.]

제이다는 이 활을 사용하는 주인을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활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의 활이다.

김진석은 그저 가장 좋아 보이는 활을 가져왔을 뿐이다.

아니 빌렸을 뿐이다.

“빌린 거… 아니, 아니에요.”

“그럼 가죠.”

제이다는 그냥 이해하길 포기했고 셋은 드디어 서울 안으로 입성했다. 당연히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과 플레이어들은 셋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서울은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위성으로 확인해봐도 서울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어서 안에 무슨 몬스터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안개는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고 한국은 서울을 포기하고 장벽을 세워 안개가 퍼지는 것을 막고 서울을 봉쇄한 것이다.

그 당시 한국 대통령에게 수많은 질타가 쏟아졌다. 대통령이나 되어서 자신의 나라에 수도를 포기하다니.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괴물들이 셀 수도 없이 등장했으며 군대와 플레이어가 함께해도 그 괴물들은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물론 대통령은 서울을 완벽히 포기한 것이 아니었으니.

“후…….”

건물 안에 숨어 몬스터를 피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한국의 유일한. 이제는 유일했던 최상위 S급 플레이어 이신이었다.

잘린 손은 그 당일에 바로 붙인 이신은 주기적으로 서울로 들어가 몬스터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다. 은신에 능하며 온갖 이상한 아이템들을 만들어내는 이신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도대체 로스트 월드는 뭐 하는 세계인지…….”

안개 속이라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게다가 일반인이 안개를 들이마시면 몬스터로 변하기까지 했다.

서울에 있는 몬스터들은 안개를 들이마셔 이성을 잃은 인간과 몬스터. 그리고 안개를 들이마셔도 멀쩡한 괴물 같은 몬스터들만이 있었다.

지금 건물 밖을 돌아다니는 몬스터도 인간이 몬스터로 변한 유형이었다. 이신의 총이라면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총소리에 셀 수도 없는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너무 오래 있었다. 나가야…?”

이신도 안개를 오랫동안 들이마시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거의 일주일 동안 서울에 있던 그는 슬슬 머리가 아파 왔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때.

“일주일이라…….”

분명 제정신을 유지한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터인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신은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웬 정장을 입은 할아버지가 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알 필요 없네.”

그와 동시에 이신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생겨났다. 불안감이 엄습한 이신은 곧바로 벗어나려 했지만 순식간에 땅에서 벽이 솟아오르더니 그를 가뒀다.

“이게 뭔…?!”

마치 박스에 갇힌 듯한 모양새인 이신은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고 이내 그곳엔 할아버지만이 뭔가를 생각하듯 서 있었다.

“음… 왜 찾아오셨지?”

그렇게 말하는 정장을 입은 할아버지는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