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넬.”
“네?”
넬은 마기를 순식간에 갈무리하고 순진한 여고생의 표정으로 바뀌며 김진석을 바라봤다. 그제야 루크와 김상훈의 안색이 돌아왔다.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심사하시죠.”
김진석의 말에 김상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상훈.”
김상훈이 뭔가를 따지려고 할 때 루크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루크도 김상훈의 능력을 김진석이 바로 알아차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깐.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마기에 잠식당해 울긋불긋 피부의 핏줄이 튀어 오른 모습을.
루크와 김상훈. 40대의 오랜 사회생활과 1년간 살아남은 플레이어로서 뛰어난 눈치를 가졌다.
루크는 육감과 한 번 겪은 것. 김상훈은 루크의 행동과 그들의 몸에서 생긴 이상 현상으로 김진석뿐만 아니라 옆의 아름다운 여성까지 절대 평범치 않은 인물이란 걸 눈치챘다.
둘의 생각이 겹쳤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둘이나…’’
“심사는 어떻게 진행하는 거지?”
김진석의 말에 김상훈은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고 그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피를 채취해 제가 감정합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최소 우리나라에선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사이코메트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김상훈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당신의 주관으로 확인하는 것 아닌가?”
“…”
김상훈은 말이 없었지만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정확히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분명 같잖은 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방법을 택했다는 건 아마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
“거짓은 아니에요.”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넬의 확신까지. 김진석은 한숨을 내쉬며 김상훈이 꺼낸 물건. 피를 검사하기 위해 손가락에 피를 내는 채혈기를 건네받았다.
감정으로 확인해봤지만 플레이어에게도 통하게 따로 만들어진 채혈기였고 별다른 이상은 없었기에 김진석은 손가락에 채혈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 채혈기는 당연히도 김진석에게 통하지 않았고 대충 예상한 김진석은 넬에게 부탁했다.
“손톱 길게 할 수 있지?”
게임 속에서 손톱을 사용해 공격하는 아주 기본적인 공격 패턴이 있었으니 가능하겠지. 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의 손톱만 길게 만들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을 보며 김진석은 손바닥을 내밀었고 넬은 김진석의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김진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손바닥에 피를 냈는데 정작 그 피를 담을 공간이 없었다.
“그냥 이 피를 가져가면 됩니까?”
김상훈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고 김진석은 손바닥에 모은 피를 그에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피를 흘려보낸 뒤 김진석의 손바닥에는 상처가 없었다.
김상훈은 김진석의 피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지만 루크는 손바닥에 상처가 사라진 것을 보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와 같은 신체 능력이 뛰어나 몸으로 싸우는 플레이어에겐 매우 희귀한 능력이었다. 사실 현실에도 스킬북이란 것이 있었다.
아주 가끔 몬스터에게서 떨어지는 아이템으로 말 그대로 그걸 읽으면 스킬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스킬북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큰돈을 주고 스킬북을 사서 좋은 스킬이 나오기를 빌어야 했다.
스킬북의 가격은 1억. 아무리 돈이 많아도 원하는 스킬을 배울 때까지 얼마를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게다가 플레이어들은 몬스터의 소재로 만들어진 무기와 방어구를 사용해야 했기에 그것만으로도 돈이 많이 들었는데 도박까지 할 여유는 없었다.
A급 플레이어인 루크도 없는 스킬. 초재생. 엄청난 재생능력을 가진 대표 몬스터 트롤과도 같은 모습을 보인 김진석을 보고 루크는 이젠 경악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능력이 많은 것인가.
루크와 달리 김상훈은 피를 받고 능력을 사용하려 했는데 당황했다. 그의 능력은 접촉한 대상의 기억을 읽는 것.
인간의 몸에서 가장 많은 걸 차지하는 게 바로 피였고 피를 통해 기억을 읽는 게 가장 확실했다.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플레이어. 루크를 포함한 더 강한 플레이어의 기억은 읽어낼 수 없었기에 알아낸 방법이었다.
대상의 피는 설령 S급 플레이어인 황혼 길드의 길드장 이미리의 기억도 읽을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칠흑같이 새까맸다. 원래라면 흑백으로 그가 원하는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트라우마와 같은 대상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에는 지금과 같이 새까맣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하나였다. 그보다 압도적으로 강할 경우.
“…또다른 괴물이 나타났군.”
한국에는 총 2명의 S급 플레이어가 있었다. 한 명은 이미리. 한국의 1위 길드의 길드장인 S급 플레이어.
그리고 정부 쪽 S급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S급 플레이어로 전 세계의 모든 플레이어를 합해도 최상위권이었다.
그에게서도 피를 받아 기억을 읽으려고 했었지만 실패했다.
“최소 S급 플레이어입니다.”
“…”
루크는 그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능력이 워낙 다양했기에 S급 플레이어는 당연했다.
이미리도 무력이 아닌 능력의 특수성을 인정받아 S급 플레이어가 된 것이니깐.
그런데 김상훈의 말이 이상했다. 최소 S급 플레이어라니. 플레이어 중 S급이 가장 높은 등급인데 최소 S급 플레이어라는 말은…….
“플레이어 등급이 확정되면 신분이 증명되는 겁니까?”
그때 김진석이 처음으로 김상훈에게 질문했다. 김상훈은 한국에서 새로 태어난 S급 플레이어를 보고 바로 깍듯이 대했다.
“당연합니다. 특히 S등급 플레이어는 저희 정부로 들어올 경우 모든 특혜를 다 받으실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모든 걸 들어주겠습니다.”
“아니. 그는 우리 황혼 길드의 길드원이 먼저 발견했네. 그리고 이미 우리 빌딩에 머무르고 있지.”
갑자기 김진석 쟁탈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로의 세력으로 새로운 S급 플레이어를 영입하기 위해 영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김진석은 딴생각하고 있었다.
“넬. 너도 검사해.”
S급 플레이어를 만난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최상위 A급 플레이어인 루크의 레벨이 저 정도면 넬이 S급을 받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김진석이 모르는 사실.
넬을 비롯한 시험의 탑 대악마들은 김진석의 감정과 생각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의 스킬로 구분돼서 그런지 몰라도 그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김진석의 스킬인 이상 완전한 해방이란 건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들은 김진석이 진심으로 자기들을 생각하고 믿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넬은 눈앞의 남자 인간이 기억을 읽는 능력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녀는 손톱을 사용해 김진석과 마찬가지로 손바닥에 상처를 내 피를 김상훈에게 흘려주었다.
김상훈이 검사하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피를 흘려주었고 얼떨결에 피를 손에 묻히며 기억을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언제나 기억을 읽을 땐 흑백으로 보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보이는 광경은 오색찬란한 화원이었다.
게다가 언제나 빙의 형태로 진행된 기억 읽기였지만 지금은 그 자신이 이 화원을 걷고 있었다.
멍하니 아름다운 화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아름다운 여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분명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니 뭔가 소름 끼쳤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가 기억을 읽는 대상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한낱 인간에게 기억을 읽는 능력은 너무 과분하지.”
김상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괴물의 기억도 읽을 수 있니?”
그때. 갑자기 땅바닥에서 손이 솟아오르더니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손은 김상훈이 처음으로 기억을 읽은 남자였다. 그리고 옆에서 또 다른 기억을 읽은 인간의 손이 그를 땅바닥으로 잡아당겼다.
그제야 김상훈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그가 기억을 읽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화원이라고.
* * *
“우웨엑!”
갑자기 김상훈이 넬의 기억을 읽자마자 바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넬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상훈이 정보부 실장으로 있던 이유는 바로 상대의 허락 없이 기억을 읽었다는 것을.
그걸 김진석에게도 행하려고 했으니 당연했다.
김상훈도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죄책감을 가진 채 잘못된 일을 계속해서 행한 것이다.
루크는 급히 김상훈을 돌보고 있었고 김진석은 누가 봐도 넬이 무슨 짓을 한 것이기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했어.”
“그냥… 충고?”
넬은 한낱 인간이 자신의 기억을 읽는 걸 그저 싫어했기에 한 일이었고 귀엽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김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A급 플레이어라고 김상훈은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넬을 보자마자 두려움으로 인해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괴… 괴물.”
“S급 플레이어란 뜻이겠죠?”
김진석은 이미 벌어진 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김상훈은 부들거리는 몸을 멈추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한국에서 2명의 S급 플레이어가 태어났다!
한국은 떠들썩해졌다. 전 세계적으로 S급 플레이어가 몇 없는 상황에 갑자기 조그마한 나라인 한국에서 S급 플레이어가 그것도 2명이나 생겨나다니.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S급 플레이어의 탄생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한국에선 S급 플레이어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이상했다. 모든 S급 플레이어는 자신의 능력을 밝히고 온 세상이 그들을 감시하게 한다.
최상위 S급 플레이어는 조그마한 나라 정도는 혼자서 없앨 수준의 전술 병기 급 괴물이다. 그런데 밝히지 않다니.
한국은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S급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걸 원치 않는다고.
조그마한 나라. 그것도 플레이어의 숫자가 적은 한국에선 S급 플레이어가 왕이나 다름없었으니 다른 나라의 S급 플레이어들은 한국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한 거지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한 달 이내에 둘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미등록 플레이어로 판단해 죽이겠다.
S급 플레이어에게 예외는 없었다. 사생활 침해 따위는 없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S급 플레이어가 어디서 뭔 일을 하는지 전부 알아야 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게 S급 플레이어의 행적이었다.
예외는 절대 없었다.
그리고 그건 황혼 길드의 이미리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또 다른 S급 플레이어. 이신의 귀에 들어갔다.
* * *
김진석은 김상훈과의 일과 자신의 볼일을 끝내고 황혼 길드 길드장의 집. 이제는 자신의 집에 들어갔을 때. 집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옆에 있던 넬도 눈치채고 손쓰려고 했지만 그 침입자는 그저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김진석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론 김진석은 그녀를 말리려고 손을 잡은 거지만 넬은 그것도 괜히 좋았는지 베시시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어이가 없었던 김진석은 고개를 저으며 넬과 함께 침입자가 앉은 소파 반대에 앉았다.
“S급 플레이어는 주거침입도 마음대로 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