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이게 뭔…….”
마을 전체가 고블린에게 점령당한 것 같았다.
플레이어로서 많은 일을 겪은 그들이었지만 이런 광경은 그들도 난생처음 봤다. C급 플레이어 몇은 헛구역질도 하고 있었다.
피비린내까지 콧속을 찌르듯 진동하고 있었으니 오래 있으면 정신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고블린이 한 짓인가? 그런데 고블린은…….”
그런데 정작 그들이 목표로 달려온 고블린들은 보이지 않았다. 고블린의 시신은 마리당 백에 가까운 돈을 하기에 꽤나 짭짤했다.
고블린들은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 중 하나였다. C급 몬스터 중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능이 높고 몸놀림이 뛰어나 경험이 없는 플레이어들은 잡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황혼 길드의 길드원들인 그들은 고작 고블린에게 당할 만큼 경험이 없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고블린들이 단 한 번도 이렇게 인간들을 잔인하게 죽인 사례가 없었다는 거다.
1년 동안 지구의 인간들은 몬스터들에게 적응해왔고 상대해오며 그들의 습성과 서식지 등등을 전부 파악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뭔가 기분이 싸한데.”
“돌아가자. 고블린이 아닐 수도 있어.”
키릭?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극도로 긴장한 이지현과 플레이어들은 서로의 등을 맞대고 주변을 살폈다.
시골이라 그런지 주변은 나무가 많았는데 갑자기 높이 솟아오른 나무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고블린이지만 매우 비대한 고블린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저건?”
“미친?! 고블린 족장이다!”
비대한 고블린의 뒤로 마찬가지로 컸지만 비계로 가득 찬 족장과 달리 근육으로 무장한 거대한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거대 고블린까지…….”
C급 몬스터 중에서 가장 강한 고블린 족장. 하지만 B급 플레이어가 둘이나 있으니 문제가 없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감지되는 게 없었는데?!”
그들 중에는 몬스터를 감지하는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그는 고블린 족장과 뒤에 나오는 거대 고블린들을 감지하지 못했다.
어느새 포위한 놈들의 숫자는 자그마치 40마리. B급 플레이어가 둘이나 있다고 해도 힘들었다. 게다가 이지현과 다른 한 명의 B급 플레이어는 이제 갓 B급이 된 자들.
고블린들은 베테랑 B급 플레이어들이 5명은 있어야 상대할 전력이었다.
놈들을 본 이지현이 아닌 다른 B급 플레이어는 이지현에게 말했다.
“이지현. 어떻게든 뚫고 혼자 나가라.”
“…네?”
그 B급 플레이어의 나이는 50대. 플레이어치고 나이가 많은 자였다. 그는 이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젊은 이지현을 살리고자 했다.
“어차피 우린 살아남지 못해. 근접 딜러이면서 몸이 가벼운 너는 혼자서 저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겠지. 바깥에 알려라. 이곳에 이상 현상이 있다고.”
이상 현상. 괴물들을 감지하는 플레이어가 있는 만큼 괴물들을 감지하는 기계도 만들어낸 인간들이었고 보급 화 되었다.
당연히 황혼도 그 기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끔 이렇게 이상 현상이 발생한다. 분명히 C급 몬스터를 감지했지만 정작 와보니 B급 몬스터가 있다거나 하는 현상이 있었다.
그걸 이상 현상이라고 하는데 아주 가끔 발생하는 기계의 오류 같은 거였다. 최근에는 더 발달해서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까지 알려주었는데 분명 고블린이라고 정보를 받고 왔더니 일반 고블린은 없고 거대 고블린과 족장까지 있었다.
“우리 길드의 기계가 이상 현상을 벌인 건 처음이다. 꼭 알려야 해. 아니면 우리 같은 희생자가 또 늘어날 거다.”
“…만덕 아저씨는 가족도 있잖아요?! 아저씨가 가시면…!”
“난 탱커다. 저길 뚫을 만한 화력이 없어. 하지만 넌 딜러. 그것도 도끼를 든 희귀한 딜러다. 너라면. 너밖에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이지현은 김만덕 B급 플레이어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그녀의 의견을 묵살했다. 그녀는 다른 팀원인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이미 각오하고 김만덕의 의견에 동의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40마리였던 거대 고블린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빨리 가!”
* * *
김진석은 어이가 없었다.
처음엔 이상했다. 현대에 갑옷을 입고 방패와 도끼 지팡이 등등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코스프레하는 사람이 이 시골까지 올 리가 없었으니 김진석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이미 지구는 자신이 없어진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들은 마치 고블린을 잡으러 온 것처럼 주변을 살피고 흔적을 확인하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진석은 가장 선두에서 걷고 있는 갈색 가죽 갑옷을 입고 나무를 벨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오는 여성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지현 LV:32]
고블린을 잡기에는 충분한 레벨이었고 주변 다른 사람들이 레벨이 낮은 것 보면 저 여성과 비슷한 레벨 남성 한 명이 이끄는 파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포위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자기들이 포위당하는 걸 내버려 뒀으면서 정작 포위당하니깐 무슨 신파극을 찍고 있었다.
이지현이 다른 레벨이 높은 남자는 팀원을 희생해 이지현을 살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가장 어이가 없었다.
물론 고블린의 숫자를 생각하면 살아나가기 어려워 보이긴 했지만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다니. 정작 김진석은 저와 비슷한 상황인데도 혼자서 살아남았는데 말이다.
그때 이지현은 눈물을 머금고 거대 고블린을 향해 달려갔다.
“하…….”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김진석은 고민했다. 저들을 살릴지 말지. 솔직히 저들이 죽든 말든 김진석은 별 상관이 없었다.
저들을 죽이면 그냥 그대로 사장님 찾으러 가면 됐고 살리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물론 선택은 금방이었다.
“귀찮다고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긴 조금 그렇긴 하니.”
한숨이 나올 것 같은 입을 꾹 닫고 김진석은 아까 주운 고블린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 * *
“…어?”
이지현은 기이한 형상을 목격했다. 고블린에게 도끼를 휘두르는 족족 죽어 나갔다. 물론 그녀가 거대 고블린보다 강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죽는 건 이해가 안 됐다.
“내가… 강해진 건가?”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그녀는 위기에 닥치면 닥칠수록 더욱 침착해지고 강해지는 알 수 없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물론 신체 능력이 강해진다거나 하는 능력은 듣도 보도 못했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밝혀진 건 없었으니.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지현은 자신이 강해졌기에 팀원들을 구할 수 있을 줄 알고 뒤를 돌아봤는데 그 기이한 현상은 팀원들에게도 벌어지고 있었다.
팀원들이 휘두르는 일격에 너무나도 쉽게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족장을 포함한 모든 고블린을 처리할 수 있었다.
“지현아…….”
“아저씨!”
이지현과 김만덕은 다행히 재회할 수 있었다. 감격의 포옹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아남음에 감사하며 다른 팀원들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
황혼 길드의 방침은 간단하다. 무조건 플레이어의 등급이 높은 자를 우선시하라는 것. 하지만 힐러로서 온갖 귀족 행세를 전부 받아온 여성은 못마땅했다.
“황혼 길드에게 실망했어요. 저 같은 힐러는 고작 소모품인가요?”
검은색 장발의 머리를 가진 그 여성은 고블린이 나타난다는 마을까지 오면서도 마치 소풍 오는 듯한 차림새였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지면 자신을 가장 먼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지팡이 하나 빼고는 그 어떤 아이템조차 들지 않았다.
“한국 1위 길드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전 탈퇴할게요. 소모품 취급받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아니… 잠깐만요! 수민 씨!”
김만덕은 붙잡으려 했지만 수민이라 이름 불린 그녀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대로 뒤로 돌아 떠나갔다.
“…어쩌냐 지현아. 어렵게 모셔온 분 아니야?”
“맞긴 한데… 사실 처음부터 성격이 안 맞았어요.”
이지현의 말에 주변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지현의 팀에 들어왔을 때부터 마치 자기가 대장인 것처럼 행세했다.
C급 플레이어인데도 같은 C급 플레이어를 부려 먹는 다거나 하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렸다. 하지만 어렵사리 모셔온 힐러인 만큼 대접을 해 주었지만… 저렇게 떠났다.
“…그보다! 우리 생각보다 강한 것 같은데? 이렇게 많은 고블린을 추풍낙엽처럼 휩쓸었다. 우리들의 플레이어 등급의 재조정이 필요한 것 같아.”
플레이어의 등급을 심사하는 곳이 있었다. 정부가 관리하는 곳으로 심사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정부가 사로잡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 정부에서 추진한 방식으로 몬스터를 사로잡아 특제 철창에 가둔 다음 관리하다가 등급 심사에 내보낸다.
그 몬스터를 죽이면 그 몬스터와 같은 등급을 받게 된다.
몬스터의 등급을 측정하는 방법도 간단했다. C급 플레이어가 그 몬스터 하나를 가볍게 상대할 수 있으면 같은 등급을 받는다.
“아냐. 아저씨 자세히 봐봐.”
하지만 이지현은 고블린들이 자신들의 공격에 쉽게 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고블린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는 목. 이놈은 심장. 보여? 아주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있어.”
그녀의 말에 김만덕과 팀원들이 고블린의 시체를 살폈다. 사실이었다. 하나같이 급소에 날카로운 뭔가에 찔린 듯이 구멍이 뚫려있었다.
“여기에 우리 말고 누군가 있어.”
“흠.”
그때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모를 거구의 남자가 갑자기 그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시체를 살펴보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 * *
김진석은 귀찮기도 싫었고 저들이 죽는 것도 싫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 들키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
그런데 이지현이란 여성이 뒤이어 하는 행동은 예상하지 못했다.
로스트 월드에서는 몬스터의 시체가 남지 않았기에 벌인 실수였다. 그림자 밟기에 숨어 몰래 그들을 도왔건만 수포로 돌아갔다.
어차피 평생 숨어지낼 것도 아니었으니 김진석은 그냥 그 자리에서 정체를 밝혔다.
“혹시 당신들도 플레이어입니까?”
그들의 대화에서 플레이어란 말이 나왔을 땐 깜짝 놀랐다. 검은색 글씨가 자신을 칭할 때 최초의 플레이어라고 했으니깐.
그렇다면 저들은 자신의 이후에 게이트 속으로 들어간 플레이어란 것이다.
그런데 김진석의 물음에 저들은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고블린… 당신이 한 짓인가요?”
“…예.”
역으로 질문하는 것에 김진석은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그 말에 더더욱 이상한 표정을 짓는 그들이었다.
“당신도 게임 세계에서 돌아온 것 아닙니까?”
이지현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김만덕이 앞으로 나와 대신해서 물었다. 기분이 더 나빠지려는 찰나에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와 정중히 묻자 마찬가지로 정중히 대답해주었다.
“맞습니다. 방금 막 돌아와서 그런지 정신이 없군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김만덕의 표정이 더더욱 찌그러졌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플레이어들은 전부 2027년 2월 22일. 그날 게임 속 세계로 들어가 당일. 아니면 그다음 날에 지구로 되돌아왔습니다.”
그의 설명에 김진석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