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 *
시험의 탑 바포메트는 로스트 월드의 바포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 세계의 나는 조금 더 크군?”
“…음?”
로스트 월드의 바포메트는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뒤를 쳐다봤고, 이내 굳었다. 아주 조금 더 작지만 그와 똑같이 생긴 자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의 마기를 받아 비슷하게 생긴 마족은 존재했지만 악마의 날개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반갑군, 이 세계의 나여.”
“…다른 세계의 나란 말인가?”
고작 그 한마디로 로스트 월드의 바포메트는 눈앞의 그가 다른 세계의 자신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시험의 탑 바포메트는 자신을 만났을 때 가장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그대는 호랑이를 다룰 수 있나?”
김진석은 말했다. 너희는 같은 존재면서 다르다고. 어쩌면 너희들보다 강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자기보다 강한 그는 과연 그 강대한 호랑이를 굴복시켰을까.
하지만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호랑이? 그게 뭐지?”
로스트 월드의 바포메트는 호랑이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세계라고 하셨지만… 호랑이 자체가 없다니.”
시험의 탑 바포메트가 낙담하는 모습을 보고 로스트 월드의 바포메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기 자신이 하나 더 있는 상황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로스트 월드의 바포메트가 나온 게이트 속에서 그가 다루는 수많은 몬스터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시험의 탑 바포메트의 관심사는 오로지 호랑이에게 있었다.
바포메트 둘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둘이 만난 이상 싸울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시험의 탑 바포메트는 여유로웠다.
저 수많은 군대와 같은 몬스터들을 보고도.
“고작해야 저 뒤의 인간들을 믿는 건가? 대악마의 위상도 많이 떨어졌군.”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온 바포메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지만 그가 날아간 방향을 착실하게 따라온 인간들의 기운이 그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험의 탑 바포메트는 그와 달랐다.
“우리에게 위상이 언제부터 있었지? 우린 그냥 강한 악마 중 하나였을 뿐이야.”
시험의 탑 바포메트는 다른 대악마끼리 오랫동안 지내 오며 가치관이 이미 많이 바뀐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여유로울 수 있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음?”
하늘이 열려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졌다면, 지상에는 지상을 전부 뒤덮는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열렸다.
시험의 탑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전부 바포메트가 관리하는 몬스터들이다. 김진석에게 스킬이 생기며 시험의 탑에서 나온 모든 몬스터도 마찬가지로 해방된 상태.
그리고 그걸 관리하는 게 바로 바포메트다.
“본신의 힘은 내가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질 것 같지는 않네.”
지상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시험의 탑에서 나오는 몬스터. 즉, 대악마끼리 모여 김진석을 죽이기 위해 실험하고 만들어 낸, 온갖 기괴한 몬스터들이었다.
* * *
“안녕?”
“…나야?”
로스트 월드의 넬은 약한 인간들에게 환각을 보여 주며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들의 환각이 풀린 것이다.
그녀의 뒤에는 그녀와 똑같이 생긴 서큐버스가 날고 있었다.
“세피드에게 들은 게 없는데…….”
“뭘? 나를?”
넬은 혼란스러웠지만 그녀 또한 대악마. 혼란스러운 걸 금방 잠재운 채 눈앞의 시험의 탑 넬을 바라봤다.
“너, 혹시 환각이 통하지 않은 상대를 본 적이 있어?”
시험의 탑 넬도 자신을 만나면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세피드도 내 환각을 벗어날 순 없어.”
“그건 나도 아는데… 흠…….”
시험의 탑 넬은 김진석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예 환각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그밖에 없었다.
그녀의 환각은 실체가 있는 환각. 그런데 그 환각조차도 그의 몸에 닿으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그런 자가 있다면 그녀는 아예 무력화되는 거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이기란 말인가.
“내 환각이 통하지 않는 자는… 신이나 다름없겠지.”
“물어봤는데 아니라던데?”
“……?”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왜 나를 찾았죠?”
로스트 월드의 넬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이 만난 이상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데 눈앞의 자신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에게 너를 해결하라고 부탁받아서 찾아오긴 했는데… 이거, 승부가 나긴 하려나?”
시험의 탑 넬은 하늘을 뒤덮는 엄청난 수의 창과 검 등등 무기를 소환해 로스트 월드의 넬에게 날렸지만 그녀는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 모든 걸 없애 버렸다.
마찬가지로 로스트 월드의 넬도 가녀린 그녀의 몸으로는 절대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몸의 세 배는 넘어 보이는 거검을 휘둘렀지만 시험의 탑 넬도 그저 손을 휘둘러서 없애 버렸다.
지상에는 로스트 월드의 넬이 나온 게이트에서 나오는 악마와 시험의 탑 넬을 따라온 인간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인간의 평균 레벨이 많이 올라 꽤나 비슷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하늘의 넬 둘은 그저 날고만 있었다.
지상에 간섭하고 싶어도 바로 앞에 자신이 있으니 환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시험의 탑 넬은 김진석에게 했던 것처럼 환각으로 바둑을 만들었다.
“바둑이나 둘래?”
“…….”
* * *
“단탈리온.”
노라와 다이아, 세라스가 떠나고 김진석은 단탈리온을 불렀다. 순식간에 김진석의 시야가 바뀌며 단탈리온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지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단탈리온은 아무런 말도 없이 붉은색 게이트를 열었고, 김진석도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시야가 바뀌고 마치 현대로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지옥으로 도착했다.
그곳이 지옥임을 알 수밖에 없는 이유. 바로 태양이 피처럼 붉었다.
“후…….”
게이트를 통해 악마들이 나가고, 지금 이곳엔 평범한 악마들밖에 없었다. 현대로 치자면 민간인들이다.
김진석은 감정을 통해 그들의 상태창을 확인했지만 기껏해야 레벨이 40밖에 안 되는 악마들이었다.
물론 김진석이 이들을 학살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괜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확인해야 하는 것.
“우선 둘러보자.”
김진석은 그림자 밟기를 사용하며 주변 악마들에게 들키지 않고 악마의 세계를 둘러보았다.
현대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투명 인간처럼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하니 해방감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억누르고 한 악마를 찾았다.
그 악마는 게임 속에서도 나온 적이 없었다.
로스트 월드 게임 속에서 최종 보스는 세피드가 맞았다. 최종 컨텐츠는 시험의 탑이었지만 난이도만 보면 레이드 보스인 세피드가 가장 어려웠다.
하지만 로스트 월드란 게임은 MMORPG. 비디오 게임처럼 완결이 난 게임이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김진석이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 게임 로스트 월드는 업데이트를 앞두고 있었다. 다음 레이드 보스인 한 악마를.
심지어 그 악마는 일반 악마도 아니었다.
로스트 월드를 만든 게임사는 유독 거대 보스를 만드는 것을 싫어하는 듯 보였다.
돈 문제도 있겠지만 못 만드는 거 아니냐고 플레이어가 뭐라 하니깐 이를 악물고 만든 최종 보스, 흑룡 아크.
거대한 검은 드래곤의 형상을 한 그 악마는 지금껏 나온 모든 보스보다도 강하다고 게임사에서 자부했었다.
만약 그 아크가 지금 이 세계에 있다면…….
“제발 좀 없길 빈다.”
지식도, 정보도 아무것도 없는 그 레이드 보스가 존재한다면 로스트 월드를 구하라는 난도가 대폭 상승하겠지.
어디에 있을지 모르고, 생김새도 정확히 모른다.
악마지만 흑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는 검은색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악마의 모습으로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할까.
트레일러로 보여 준 아크는 그저 검은색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이후에 설명으로 저렇게 알려 주었을 뿐.
김진석은 하나하나 전부 감정으로 상태창을 확인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을까.
[아크 LV:99]
정말 평범한 회사원처럼 일하고 있는 악마 중에 아크라는 자를 발견했다. 이름만 같으면 모를까, 레벨마저도 99였다.
그들이 침공하고 있는 와중에도. 레벨이 높은 악마 전부가 인간계로 갔는데도 아크가 악마의 세계에 남은 이유.
아크는 이름 그대로 악마들의 방주였다.
악마들은 침공하면서도 역으로 침공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아크를 그들의 세계에 남겨 둔 것이다.
김진석이 그림자 밟기에 숨어 있음에도 아크는 뚜렷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우연이 아니다. 김진석이 움직인 만큼 그의 눈동자 또한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아크의 눈은 마치 파충류의 눈 같았다.
일자로 찢어진 그의 눈은 정확히 김진석을 바라보다가 옆의, 상관으로 보이는 자가 그를 부르니 고개를 돌리며 이내 그곳에 집중했다.
“평범한 악마는 그의 존재를 모르는 건가?”
정작 그 상관으로 보이는 자의 레벨은 고작해야 40이었다. 김진석은 옆 건물에서 창문을 통해 아크를 지켜봤다.
꽤나 큰 건물이었고, 김진석은 옆의 조금 조그마한 건물 옥상에서 그를 기다렸다. 아직 그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았기에.
* * *
“…….”
“…….”
시간이 지나고 옆 건물 옥상에서 만난 둘은 뻘쭘하게 서 있었다. 다짜고짜 공격하기도 뭐 했으니 그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희 악마가… 벌써 진 겁니까?”
의도치 않은 오해를 한 아크였다. 악마의 세계에는 이미 인간의 세계를 침공한다고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는데, 한 인간이 이미 악마인 그들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아니, 나만 왔어.”
김진석은 그의 오해를 정정해 주었다.
“…무슨 뜻이죠?”
“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가 나밖에 없다는 뜻이지.”
이상한 상황이었다. 레벨이 더 낮고 인간인 김진석이 반말하고, 악마이며 레벨이 훨씬 더 높은 아크가 존대하고 있었다.
“저를 죽이겠다는 말입니까?”
“…상황에 따라서 말이지.”
그의 이름 그대로 아크(ARK). 악마의 세계의 방주인 그가 굳이 인간의 세계를 침공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를 죽일 이유, 상대할 이유가 없어진다.
반말하며 여유로워 보이는 김진석이지만 속으로는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김진석이라도 미지의 상대인 아크를 상대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인간계의 악마들이 전멸한다면 그쪽은 어떻게 할 거지?”
제일 중요한 것. 어차피 지금 남아 있는 악마들이 인간계를 침공한다고 한들 그들이 막지 못할 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크, 그가 인간계의 침공에 참가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전멸한다는 걸 가정에 두고 얘기하는군요.”
김진석은 인간들의 전력을 믿었고, 시험의 탑 악마들을 믿었다. 그는 세라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레이드 보스 몬스터라고 한들 현실인 이상 한계를 가진 몬스터들이라고. 정말 세라스가 레이드 보스 몬스터였다면 그녀는 레벨이 낮다고 한들 혼자서도 마계를 전부 점령할 수 있었겠지.
그렇다는 건 시험의 탑 악마들도 같은 자신들에게 얼마든지 대항할 수가 있다는 것을.
“인간들을 너무 무시하진 마. 그들에게 한계는 없거든.”
인간들은 한계가 없다는 것을 노라와 다이아를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노라는 모르겠지만 다이아는 70레벨까지 성장하는 NPC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끝도 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김진석의 말에 아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