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노라의 물음과 가이크의 공격을 보고 김진석은 바로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악마인 바포메트가 자신을 지켜 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가 악마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중요한 건 제가 이 세계를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 말에 그를 포위한 인간들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김진석의 뜻은 말 그대로였다. 시험의 탑을 클리어하고 레벨 90을 달성했을 때.
검은색 글씨는 그에게 두 가지 새로운 목표를 주었다.
- 레벨 99를 달성하라.
- 로스트 월드를 구하라.
레벨 99는 기본적으로 주는 퀘스트였지만 로스트 월드를 구하라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일 것이다.
만약 김진석이 이 세계에 없었다면 분명 악마들에게 멸망했을 거다.
김진석이 레벨 90이 넘어서야, 그제야 검은색 글씨가 김진석을 이곳으로 이끈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로스트 월드를 구하는 것.
어이가 없었다. 이미 김진석은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었고, 그걸 대비하기 위해 레벨 업을 하며 죽을 위기를 전부 견뎌 왔는데 이제야 알려 준다니.
어차피 죽지 않으려면 해야 하는 건데 말이다. 90레벨 전에는 가망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제가 악마랑 결탁한 것인지, 아니면 악마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간 이 세계는 악마에게 넘어갈 겁니다.”
지금 로스트 월드의 곳곳에서 게이트가 열렸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들이 쏟아지고 있겠지. 하지만 인간의 최고 전력은 전부 이곳에 모여 있었다.
물론 김진석이 그들에게 모이라고 말했고, 세라스와 리차드를 중심으로 그들이 모인 것이긴 했다. 그런데 세라스가 잘해 줬는지 인간들의 성장이 대단했다.
평균 레벨이 처음 마계에 들어섰을 때보다 거의 20레벨은 올라간 것이다. 기분 좋은 예측 실패였고,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할 만할 거다.
“악마와 몬스터들이 지금 이 세계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지금 하늘에는 이클립스를 탄 세피드 둘이서 싸우고 있었다.
대악마 둘의 싸움은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부서지며 주변이 남아나지 않았다. 저런 대악마가 최소 둘 이상이 이 세계를 침공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알겠지만 지금은 그냥 따르세요.”
김진석은 더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의 옆에는 심상치 않은 수준의 짙은 농도의 마기를 가진 바포메트와 넬이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 또한 대악마. 세라스를 비롯한 악마의 침공을 겪은 이들은 둘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대악마가 따르는 존재라니.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는 없을 터인데.
게다가 하늘에선 똑같이 생긴 대악마 둘이서 싸우고 있었다.
아무도 함부로 대답할 수 없는 지금, 넬이 그들에게 환각을 보여 주었다. 바로 그들이 사는 마을과 도시, 성, 그리고 가족이 죽는 모습을.
“이건 환각일 뿐이지만… 사실일 수도 있단다?”
웃으며 말하는 넬의 모습은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녀가 보여 준 환각은 가족이 무참하게 악마들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생생했고, 정말 현실만 같았다.
짝!
넬의 박수 소리와 함께 환각은 끝났지만 인간들은 방금 보았던 환각을 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위 속에 있는 걸 게워 내기도 했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환각. 자신의 가족이 죽는 모습.
“…가죠. 어차피 저희는 저들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가장 먼저 판단을 내린 건 리차드였다. 화산에서 한번 데였던 그는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했고,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
게다가 가이크마저도 환각을 본 지금 리차드의 판단은 정확했다.
“저희를 죽이려고 했다면 진즉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희도 없었을 겁니다.”
마계를 점령하고 나아갈수록, 리차드는 김진석에 관한 생각을 계속해서 고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마족과의 전쟁이 무서워 세라스에게 거짓을 고한 남자.
화산에서 데였을 땐 혼자서 플뤼톤을 상대한 괴물 같은 자.
지금에 와서는 플뤼톤과 비슷한 수준인 창공의 이프를 단번에 죽인 의문의 인물.
창공의 이프가 김진석에게 날아들고 곧바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는 건 정황상 그가 죽였다, 라는 것이 성립된다.
2년 동안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2년 전에도 화산에 홀로 들어가 플뤼톤을 상대한 자다.
지금 김진석이 얼마의 무력을 가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기들이 그를 적으로 돌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리차드는 첫 성주 격 마족을 죽였을 때, 그리고 세라스가 그들을 맡아 주고 있다는 알았을 때. 김진석이란 자가 인간을 얼마나 생각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무력을 가지고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성주 격 마족을 죽인 것이다.
인간들을, 자신들을 위해서.
“그가 악마건 아니건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저 남자는 우리 인간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는 건 확실합니다.”
김진석은 갑자기 리차드가 자신을 올려 주는 것에 이상했지만 넬이 환각을 보게 했으니 거기서 뭔가 수작을 부렸거니 했다.
“지금 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바포메트는 이 세계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기운에 거대한 날개를 펼쳐 그곳으로 날아갔다.
김진석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옆에서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넬에게 시선을 바꾸며 말했다.
“넌 안 가나?”
“저희가 다 저희를 상대하면, 당신은 뭐 할 건데요?”
탓하는 말은 아니었다. 넬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김진석은 그녀의 말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넬은 그에 의문을 가졌다.
“뭐, 저희가 질 수도 있다는 건 말을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것 때문이에요?”
김진석은 그들과 같다고 한들 같은 힘을 가졌다고 장담하진 못한다고 미리 말해 두었다. 넬은 그게 걱정인가 싶어 물었지만 김진석의 걱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도 모르는, 어쩌면 이 세계에서 김진석만이 아는 문제가 있었다.
“이곳은 너희들에게 맡길게. 난… 지옥에 가 봐야겠다.”
그 말에 넬은 물론이고 듣고 있던 인간들도 의문을 표했다. 대악마가 지금 이 세계로 침공했는데 왜 그들이 살던 지옥에 간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넬은 그 말을 믿어 주었고, 그녀의 검은 박쥐 날개를 펼쳐 어디론가 날아갔다.
리차드를 비롯한 인간들도 어차피 그를 믿어 주기로 한 거, 끝까지 믿겠다는 마음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가이크는 히포그리프 기사단, 하늘을 날 수 있는 기사단으로 시험의 탑 세피드를 지원해 주었다.
물론 그들이 구분할 방법은 없었기에 둘의 싸움이 아닌 로스트 월드 세피드의 기사단을 맡았다.
저들의 싸움에 다른 이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다른 인간들은 리차드의 통솔하에 바포메트와 넬이 날아간 방향으로 병력을 나눠 따라갔다.
하나둘 인간들은 떠났고, 그의 곁에는 단 세 명의 여성만이 남아 있었다. 김진석은 그녀들을 바라봤다.
[노라 LV:74]
[다이아 LV:75]
“…못 본 사이에 많이 크셨네요.”
김진석은 제 딴에는 농담으로 말한 거였다. 노라와 다이아는 김진석이 그런 농담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너만큼은 아니야.”
그는 그 나름대로 용서를 구한 것이고, 노라는 농담을 받아 주며 그를 용서했다.
“그런데 지옥에 간다는 건 무슨 소리죠?”
다이아는 김진석에게 눈인사를 하며 지옥을 간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김진석은 그녀의 눈인사를 받아 주며 답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걱정되는 게 있어서요.”
물론 그게 단순한 걱정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노라와 다이아와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김진석은 세라스를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지낸 세라스였고, 그녀에게 많은 짐을 두고 갔으니 미안함과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했다.
[세라스 LV:88]
“세라스 씨는 아직 더 크셔야겠네요.”
“…이보다 더?”
하지만 김진석은 그런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고 하는 법도 모르니 똑같이 농담을 전했고, 세라스도 받아 주었다.
“내가 쟤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진 않을 텐데.”
“…세라스 씨는 상대할 자가 워낙 강해서 말이죠.”
확정은 아니지만, 이 세계의 세라스가 시험의 탑 비네와 같은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 그저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지금껏 고생하셨습니다만… 이젠 정말 마지막입니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모든 게 해결될 겁니다.”
“…해결되면?”
그런데 후에 들어온 노라의 말은 김진석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해결되면 넌, 어쩔 거야?”
“…….”
이 세계, 로스트 월드의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자신은 아마도 이 세계에 없을 것이다. 원래 살던 곳이 이곳이 아니었기에.
물론 그렇다고 돌아가면 자신은.
과연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몬스터만을 잡고 돈을 벌어 사용하던 이곳. 온갖 범죄를 저질러도 김진석은 면제가 될 수준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남을까?
“…해결되고 난 이후에 생각하죠.”
아직도 하늘에서 싸우고 있는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와 시험의 탑 세피드가 있었다. 온갖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는 이곳에서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 * *
“…내가 맞나?”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는 자신과 같은 모습을 했을뿐더러 이클립스까지 있는 눈앞의 시험의 탑 세피드에게 실망했다.
그는 자신과의 혈투를 원했는데 시험의 탑 세피드는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과 비빌 만한 실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아쉬웠다.
둘 다 서로의 힘을 제대로 개방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환경이 폭발하고 부서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저 인간이 그대의 주인인가? 왜 우리 악마가 고작 인간의 말을 듣는 거지?”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는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눈앞의 자신이 자기보다 약해 보여도 그 또한 대악마.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단탈리온에게 들은 바로는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악마가 그를 따를 이유는 없었다.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는 기사보다는 귀족에 가까웠고, 그는 누군가를 따른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시험의 탑 세피드는 달랐다.
“내가 그에게 부탁했다. 또 다른 나와 싸우고 싶다고.”
그는 기사. 강한 상대와 싸워 보는 것도 좋지만 자기 자신과 싸우며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지를 알고 싶었다.
오히려 자신과의 싸움을, 시험의 탑 세피드는 바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 주변의 모든 자가 사라지기를. 비록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의 기사단과 히포그리프 기사단이 싸우고 있었지만 어차피 저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낄 수준이 못 된다.
시험의 탑과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가 다른 점은 시험의 탑의 세피드는 자신의 오리지널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는 싸우다 말고 이클립스에서 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는 고개를 비틀었다. 자신을 농락하는 듯한 행동에 화가 난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가 화를 내려는 순간.
시험의 탑 세피드의 날개가 전신을 감싸더니, 이내 갑옷으로 바뀌었다. 날개가 아닌 날개가 달린 갑옷으로.
“진심으로 상대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