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세라스와 리차드는 그의 외침을 듣고 곧바로 하늘을 쳐다봤다.
분명 그들은 밤이 아닌 아침 해가 떠 있을 때 화산에 들어왔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마족들도 기이한 광경에 하늘을 쳐다봤고, 그곳엔 고고히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백색 정장을 입은 그는 마치 세피드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는 세피드의 마기를 받은 마족, 아몬이었다.
아몬은 서서히 땅에 내려왔다.
가이크와 세라스조차도 식은땀을 흘릴 정도의 마기가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아몬은 그들에게 시선도 두지 않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강림하시는군요.”
“그게 무슨……?!”
플뤼톤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소리치려는 순간.
하늘이 갈라졌다.
“…게이트다.”
세라스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다. 악마가 침공했을 때 딱 한 번.
그런데 지금, 게이트가 다시 열린 것이다.
하늘이 절반으로 나뉘며 그 안에서 수많은 몬스터와 아몬과 같지만 검은색의 정장을 입은 남자가 고고하게 검은 날개를 가진 말의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귀족 같은 그의 모습을 그 누가 악마라고 생각할까.
“다행히 대악마는 하나뿐이야. 우선 퇴각하고 태세를 정비하는 게 좋을……?”
세피드와 같은 고위 악마를 그들은 대악마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고위 악마인 세피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들과 마족들은 물론이고 아몬마저도 세피드를 보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금방 풀릴 수 있었다.
검은 하늘이 다시 한번 갈라진 것이다.
“게이트가… 하나 더?”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는 인간들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피드가 대악마인 건 몰라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그들이 여태껏 본 적 없는 수준의 짙은 농도였으니깐.
그런 대악마가 나온 게이트가 하나 더 열린 것이다.
“…어?”
그런데 게이트가 열리고 그 안에서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가 하늘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떨어졌다.
그 형체가 땅에 닿자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흙먼지가 일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창공의 이프가 흙먼지 속으로 날아들며 외쳤다.
“내가 기다리던 인간이 바로 그대인가?!”
여덟 쌍의 날개로 광풍을 일으켜 흙먼지를 전부 날려 버리며 나타난 이프는 인간으로 보이는 그 형체에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빛으로 사라졌다.
알 수 없는 상황에 그곳에 있던 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강대했던 이프가 갑자기 빛으로 변해 사라지다니?
하지만 유일하게 대악마 세피드만이 이프가 빛으로 변해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화살. 그 화살이 이프를 꿰뚫었다.
인간으로 보이는 형체가 누군지 알 것만 같은 세라스, 그리고 노라와 다이아는 쓴웃음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화려한 등장이네.”
* * *
인간으로 보이는 형체. 김진석은 단탈리온에게 게이트를 열어 달라고 했다.
이미 그에게서 악마의 침공이 이제 막 시작됐다고 들어 악마의 옆에 바로 게이트를 열어 달라고 했는데, 진짜 바로 옆에 열어 준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김진석은 단탈리온에게 투덜거리며 흙을 털며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마족이 달려들었다. 이프. 김진석도 알고 있는, 강대한 마족이었다.
그런데 하필 54층을 클리어하고 바로 나온 거라 그의 손에는 고요한 카인의 활이 들려 있었고,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이프에게 스킬을 사용한 것이다.
“관통 샷.”
고작 그 스킬. 화살 하나에 꿰뚫려 죽어 버린 것이다.
김진석이 이프가 떨어뜨린 금화와 아이템을 당연하다는 듯이 줍고 있을 때.
“당신이군요. 단탈리온이 말한 인간이.”
이클립스를 타고 세피드가 다가왔다. 대악마이면서도 한낱 인간에게 존대하는 악마. 그가 바로 세피드다.
“성격은 똑같군.”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군요.”
당연히 모를 거다. 시험의 탑에서 보았던 세피드를 말한 것이니깐.
“단탈리온이 무슨 말을 했지?”
“당신이 이 세계의 중심이며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중심일 순 있다. 게임 속에선 언제나 플레이어가 중심이었으니. 하지만 주인이라…….
“어떤 주인?”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무슨 소린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대화하려고 만난 건 아니니 상관없었지만.
눈앞의 세피드의 눈치를 보며 노라와 다이아, 세라스를 중심으로 인간들은 모이고 있었다. 김진석이 나온 게이트는 닫혔지만 세피드가 나온 게이트는 아직 닫히지 않았고 계속해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몬스터들은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니었다. 이클립스와 같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날고 있는 그들은 기사단이었다.
인간의 기사단과 악마의 기사단이 대치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없는 이상 당신도 혼자서 모든 걸 할 순 없을 텐데요.”
김진석은 눈앞의 세피드가 확실히 시험의 탑 세피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험의 탑의 그였다면 저렇게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를 부릴 리가 없었다.
시험의 탑 세피드는 죽을 때까지도 김진석을 보고 긴장하며 인정하고, 끝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세피드 LV:99]
둘의 레벨도 같고, 이름도 같지만 힘, 그리고 성격도 다를 것이다.
악마의 세계에서 그 누가 그에게 대적하겠는가. 아무리 귀족 같고 기사 같은 악마라고 한들 오랜 기간 그렇게 지내면 성인이라도 변할 것이다.
“그들이 누군지 대충 알 것 같긴 한데, 적어도 혼자는 아니야.”
김진석의 말에 노라와 다이아를 비롯한 인간들은 자신을 얘기하는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은근히 무시하는 세피드의 말에 짜증이 일었으니깐.
하지만 김진석도 인간들을 말하는 건 아니었으니.
“너희는 너희가 해결해.”
“알겠습니다.”
“…너는?”
세피드의 앞에 나타난 건…….
세피드였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시험의 탑의 세피드는 고요한 카인의 활을 든 김진석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엔 죽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김진석을 인정했고, 그저 그 한마디만을 끝으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 시험의 탑 클리어. 보상을 선택하라.
과연 검은색 글씨 퀘스트답게 여러 선택지가 주어졌는데, 김진석은 딱 하나의 선택지에 눈이 갔다.
- 시험의 탑. 해방.
고작 여섯 글자의 선택지. 하지만 그걸 고르고 난 이후의 일은 절대 평범치 않을 것이다. 시험의 탑에 갇힌 악마들이 전부 풀리게 된다면, 로스트 월드의 세계는 혼돈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들과 같은 악마도 존재하게 될 것이고, 악마가 늘어난다는 건 인간들에게도 좋지 못했으니. 하지만 김진석은 악마들이 인간계를 왜 침공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매우 간단한 이유다.
현실에서도 어쩌면 미래에 겪을 일. 악마의 세계는 이미 피폐했다. 현대와 같은 기술을 가진 악마의 세계는 지구와 같았다.
하지만 지구와 다른 점은 매우 조그마한 땅의 크기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그마한 땅에서 기술의 발전만 있으니. 게다가 마법과 같은 스킬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 그들에게는 그 땅이 너무나 작았다.
그런데 차원을 다루는 악마가 다른 세계의 땅을 찾아냈고, 악마들은 그 세계로 땅을 넓히려고 한 것이다.
현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다. 미국과 인디언의 전쟁.
로스트 월드에선 악마가 미국이고, 인디언이 인간일 뿐이었다. 어쩌면 간단하지만 인디언인 인간들에겐 간단하지 않은 이야기. 그게 전부다.
하지만 그건 로스트 월드의 악마들, 시험의 탑의 악마들과는 달랐다.
“시험의 탑을 해방하겠다.”
“확실한가? 악마들이 풀려날 텐데요?”
그때 단탈리온이 나타나 김진석에게 물었다.
“고작 죄책감, 아니면 동정심인가요? 더 나은 보상이 분명 있는데도 그 보상을 선택하겠다?”
계속해서 말투가 바뀌는 단탈리온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이상했다. 감정이라곤 일절 없는 단탈리온이었지만 눈앞의 그는 놀람이라는 감정이 대놓고 드러났다.
하지만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도 생각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도플갱어. 똑같은 둘이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그 말.
만약 시험의 탑에서 해방된 악마들이 로스트 월드에 있는 자신들과 만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싸우게 되겠지.
- 시험의 탑을 해방한다.
김진석의 확답에 검은색 글씨도 답했다.
그와 동시에 시험의 탑에 안에 있던 김진석의 주변이 전부 빛으로 변해 눈이 저절로 감겼고, 눈을 뜨니 단탈리온의 오두막이었다.
김진석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태창을 오랜만에 확인했다.
[김진석 LV:91]
[감정][시험의 탑]
온갖 스킬로 도배된 상태창을 무시하고 그의 오리지널 스킬을 주목했다. 최초 플레이어로서 받을 수 있었던 스킬, 감정. 그리고 몇 년 만에 얻은 새로운 스킬, 시험의 탑.
하지만 또 쓸데없이 설명은 없었고, 알아서 알아봐야 했다.
물론 알아내는 방법도 간단했다.
“시험의 탑.”
사용하면 됐다.
* * *
“듣긴 했지만 진짜 제가 둘이군요.”
“이게 무슨…….”
로스트 월드의 세피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누가 자신이 둘인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시험의 탑, 그 스킬의 사용법은 매우 간단했다. 다른 이를 시험의 탑으로 부를 수도 있으며 시험의 탑 안에 있는 자들을 내보낼 수도 있었다.
비록 그들이 원한 진짜 해방은 아니었지만 김진석이 원하면 해방해 줄 수 있었다.
악마들은 해방을 원한다면 김진석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강제적으로 김진석에게 순종하게 된 그들이었다.
물론 김진석은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공격이 통하지 않는, 그나마 안전한 넬을 불렀다.
그리고 넬은 자신들에게도 계시와 비슷한 것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바로 시험의 탑 스킬 주인인 김진석을 죽이면 그들도 해방될 것이라고.
얼마든지 등 뒤를 노릴 수 있는 악마들이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망설임 없이 세피드를 불렀고, 자연스럽게 명령 조로 말했다.
김진석은 그들에게 말해 두었고, 지금 다시 한번 말했다.
“너희와 같은 자들을 죽이면, 너희는 해방이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김진석이 부른 자는 세피드뿐만이 아니었다. 비네를 제외하고 바포메트와 넬을 불렀다. 비네를 제외한 이유는 자신과 같은 자면 세라스를 죽일 수도 있었기에.
게임 속에선 악마의 힘을 받은 뒤 종국에는 악마가 된 세라스였지만 김진석 자신으로 인해 바뀐 이 세계에선 비네라는 악마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비네는 제외했다.
“어째서… 악마가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린 김진석을 보고 노라와 다이아, 그리고 세라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 갑자기 거대한 배틀 엑스가 김진석에게 휘둘러졌다. 김진석은 그저 그 배틀 엑스를 쳐다보고 있었고, 바포메트가 손으로 가볍게 그 배틀 엑스를 쳐 냈다.
“레온하르트 님이 추리한 게 맞은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 배틀 엑스의 주인은 가이크였다. 레온하르트를 비롯한 인간의 최고 전력들은 김진석을 중심으로 섰지만 지금 보니 마치 포위하는 모습이었다.
노라는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 포위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와 김진석에게 물었다.
“마족은 아니라고 했지……. 그럼 악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