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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94화 (94/201)

94화

김진석은 모르고 있겠지만 눈앞의 넬은 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짙은 농도의 살기. 악마인 자신도 흠칫 놀랄 수준이었다.

그 붉은색 살기는 분명 형체가 있었다. 그건 넬에게는 익숙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살기가 다시 김진석의 몸으로 들어가며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돌아갈 이유가 생겼군요.”

살짝 웃으며 말하는 김진석이었지만 넬은 방금의 그를 기억하며 억지로 웃음을 내보일 뿐이었다.

* * *

“키잔?”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세피드도 그 기운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분명 그 기운, 살기는 키잔의 것이었다.

물론 키잔의 스킬을 계속해서 사용한 김진석이었지만 그건 오로지 김진석의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방금 그 살기는 키잔의 것이다.

“도대체가…….”

세피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 * *

53층을 클리어한 김진석이었지만 더더욱 기분이 좋지 못했다.

비록 비네와는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바포메트와 넬과의 대화를 통해 알았다. 이들은 자신을 죽일 의도가 없다는 걸.

물론 죽이면 좋겠지만 그들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김진석에게 수백 번 이상 죽어 온 그들은 그를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51층의 궁극기의 연계를 통해 더더욱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네 악마 중 가장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넬은 할 말이 다 떨어졌는지 바둑을 그만두고 그저 가슴을 김진석의 방향으로 내밀 뿐이었다.

한숨을 푹 쉰 김진석은 말없이 녹슨 날개를 꺼내 스나이핑을 심장 쪽으로 사용하며 최대한 고통 없이 그녀를 보내 주었다.

“즐거웠어요.”

“…….”

모든 말에 대답해 준 김진석이었지만 마지막 넬의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정말 한 걸음만이 남았다. 굳이 안 올라가도 되는데도 그들을 죽이며 올라갔고 이제는 54층, 세피드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층, 레이드 보스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나온 세피드는 그만큼 난이도가 어려운 보스였다.

현실에서나 있을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그는 얼마 없는 여성 플레이어가 몰려들게 한 1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세피드를 보러 가기까지가 매우 힘들었고, 본다 하더라도 세피드는 지금껏 나왔던 모든 레이드 몬스터 중에서 가장 어려웠다.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하는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세피드를 잡지 못하고 포기한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피드, 그는 악마이며 기사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페가수스처럼 날개가 달린 말을 타고 다녔지만 온몸에 검은색 오오라가 달린, 마치 흑호 같은 모습이었다.

이름까지 있는 말, 이클립스는 3미터에 다다르는 거구의 말이었으며 입에서는 마기로 된 브레스까지 뿜어내는 괴물이었다.

아무리 김진석이 활이 있다고 한들 날아다니는 상대는 언제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지만 90레벨을 달성했을 때. 김진석은 검은색 글씨가 내어 준 보상을 보고 세피드를 상대하기 위한 보상을 선택했다.

“…후.”

크게 숨을 내쉰 김진석은 눈앞에 생겨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눈앞이 바뀌는 모습. 넬이 지배하는 공간인, 악마답지 않게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화단 같은 공간이 아닌 모니터 속에서 자주 보았던 곳.

지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옥이라고 막 어둡고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지옥도 악마가 사는 세계였고,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 그들은 훨씬 더 많은 걸 이루어 냈다.

이름만 지옥이었지 사실 현대와 다름없었다. 빌딩 같은 건물이 세워져 있으며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완벽한 현대였다.

비록 아무도 없는 유령 도시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아니,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도시의 한가운데. 김진석보다 조금 더 큰 키와 얼굴까지 전부 가린 검은색 풀 플레이트 아머와 자신의 두 배만 한, 큰 창을 착용한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었다.

“세피드.”

“…꽤 오래 걸리셨군요.”

투구 안에서 나오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 세피드였다. 그는 완전 무장한 채 김진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할 게 많아서 말이지.”

“…넬에게 말씀하신 게 전부 사실인가 보군요.”

넬과의 대화는 세피드는 물론이고 이미 죽었다 살아난 비네와 바포메트도 같이 듣고 있었다. 비네는 말도 제대로 못해 보고 죽어 버려서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뭐가 말이지?”

“당신이 이곳을 나갈 수 있는데도 저희를 죽이는 이유가 말입니다.”

김진석은 정말 거짓 없이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말했다.

“또 다른 저희를 막기 위해서 힘이 필요하다…….”

물론 거짓 없이 말하긴 했지만 쓸데없는 말은 없앴다. 이 시험의 탑이란 곳을 클리어하면 보상을 준다는 말은 빼고 또 다른 그들을 막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깐.

“지금 당신은 저희를 가볍게 짓누를 힘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또 다른 그들이 있다는 말은 바로 믿어 주었다. 네 악마도 결국 알 수 없는 힘에 시험의 탑에 갇힌 신세였으니깐.

그들에게 고작 또 다른 자기들이 있다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넬에게도 말했지만 놈들과 너희는 같은 존재지만 엄연히 달라.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봐야지.”

“저희를 죽이면서까지 말입니까?”

“…그래. 우리가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인간과 악마일 뿐이잖아?”

그저 게임 속에서 보았던, 김진석이 일방적으로 알았던 사이이다. 그에게 죄책감 따위는 없다.

“넬이 죽는 것을 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꽤 오래 기다렸습니다. 바포메트나 비네를 죽였을 때보다도 오래 말이죠.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신 겁니까.”

세피드는 김진석이 넬을 죽인 순간부터 바로 완전 무장한 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진석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54층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그는 과연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마지막 하나만 물어보지.”

“…물어보십시오.”

세피드는 넬에게서 전부 들었을 김진석이 뭔가를 묻는 거에 이상함을 느꼈다.

김진석이 해맑은 넬에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단 하나.

“날 원망하나?”

그들을 수백 번 죽인 김진석 자신을.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해맑은 여고생 같은 넬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아 물어보지 않았던 그것.

세피드는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예.”

예상한 그 말에 김진석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에서 츠바이핸더를 꺼냈다. 하지만 세피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면, 저희와 같은 처지인 것 같군요.”

“…무슨 소리지.”

김진석은 츠바이핸더를 손에 든 채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당신도 결국, 이 세계에 갇힌 것 아닙니까?”

세피드와 세 악마는 시험의 탑에 갇혀 있다. 그리고 김진석은 시험의 탑보다는 넓지만 그도 결국 로스트 월드라는 게임 속 세계에 갇힌 것이다.

하지만 네 악마와 그의 차이점은 힘들지언정 즐겁다는 거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세피드가 말했다.

“같은 처지인 저희끼리 딱히 원망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김진석은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수백 번을 넘게 죽인 자를 같은 처지라고 원망하지 않는다… 라.

“악마가 아니라 성인이군.”

“…예?”

성인(聖人). 어쩌면 그는 김진석이 아닌 자신을 이곳에 가둔 다른 자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망의 대상이 달라서, 비교적 김진석에게 향한 원망이 적어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들의 입에서 김진석 자신을 원망하고 있지 않다는 소리가 나왔으니까.

어느새 세피드의 옆에는 그의 말, 이클립스가 서 있었고 그는 말 안장 위에 타며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김진석이 잠깐의 생각으로 인해 틈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저게 성인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김진석은 악마 같지 않은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츠바이핸더를 도로 다시 집어넣었다.

세피드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뒤이어 꺼내는 활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치켜뜨며 놀랬다.

그건 뒤에서 지켜보던 다른 세 악마도 마찬가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활은 그들에게 PTSD, 트라우마를 안겨 준 무기나 다름없었으니깐.

[고요한 카인의 활. 공격력 162. 레벨 제한 없음. 직업: 카인.]

손에 들었지만 들지 않은 것 같은 무게감. 그림자를 활로 형상화시킨 듯한 그 모습은 네 악마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진심으로 해 주지.”

레벨 90을 달성했을 때 받은 보상, 아이템이었다. 선택형 보상지였고, 김진석은 세피드를 가장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죽일 수 있는 무기, 고요한 카인의 활을 선택했다.

처음엔 츠바이핸더를 꺼내 그의 공격 방식이 게임과 같은지, 이클립스가 어떤지 전부 확인하려고 했었지만 세피드의 말을 듣고 그 생각을 거뒀다.

“스나이핑.”

김진석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 * *

“세라스 님!”

“본 스피어.”

가이크와 세라스, 그리고 노라와 다이아는 플뤼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알카는 마계에 와서 배운 방식으로 플뤼톤의 마법으로 가득 찬 화산의 마법진을 해체하며 나아갔다.

비록 느리기도 했고 플뤼톤이 직접 마법진을 발동시켜 사용하기도 했지만 희생은 없다시피 했다.

결국 온전히 플뤼톤에게 다다른 인간들은 가장 많은 자신의 동료를 잃게 한 플뤼톤을 향해 엄청난 분노를 내비쳤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렸다. 리차드의 명령을.

리차드는 이미 얘기해 둔 계획을 실행시켰다.

마계를 점령하며 리차드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주 격 마족을 제외한 다른 마족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물론 그건 그들이 성장했기에 그렇게 느낀 것이었고, 계획은 간단했다. 플뤼톤을 잡아 둘 수 있는 자들을 선발해 그를 묶어 두는 것.

가이크와 세라스는 확정이었고, 자발적으로 받았는데 플뤼톤을 상대할 만한 강자는 자신의 기사단이 있거나 소속되어 있는 곳이 있어 선발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소속이 없는데도 그 누구보다도 활약하는 둘이 있었으니, 바로 노라와 다이아였다.

그렇게 총 네 명의 인원은 다른 인간들이 플뤼톤의 세력을 와해시킬 때까지 그를 붙잡아 두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 네 명은 언제나 선봉에 서서 마족들을 죽이는 자들이었다. 즉, 합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플뤼톤은 당혹스러웠다.

백색의 기사 갑옷을 입은 인간은 자신의 마법을 맞고도 묵묵히 버티며 자신을 견제했다.

그럴 때마다 어둠 속에 숨은 적발의 인간 여자는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때면 어디선가 나타나 방해했다.

게다가 멀리서 자신을 저격하는 엘프의 화살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자는 회색의 장발 머리 인간 여자였다. 아니, 그녀가 인간이 맞는지도 헷갈렸다.

마기를 가지고 있는데, 마기만 보면 어쩌면 자신보다도 많은 것 같았다.

비록 본신의 무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해골들은 자신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줄여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하는 몇 없는 스킬은 자신에게도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소환한 딱 하나의 소환수, 가디언.

[스켈레톤 가디언. LV:88]

악마 가디언보다는 약했지만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가디언은 아무리 부서져도 회복됐고, 6미터에 다다르는 그 거대한 몸집은 화산을 쑥대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플뤼톤은 부족했다. 이렇게 합격을 하는 자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에게 대드는 마족 따위는 없었으니깐.

딱 한 명, 그 마족에게 당했을 때 빼고는 져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아몬! 언제까지 보고 있을 참인가?!”

수세에 몰린 플뤼톤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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