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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93화 (93/201)

93화

* * *

“세라스 님, 이젠 몇 구역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어느새 인간들은 마계의 구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비록 처음 들어온 10만 군세의 절반 이상이 죽었지만 남은 이들은 죽은 이들의 몫을 충분히 다 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마계에 각자 구역을 정했고,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몇몇 구역이 있었다. 그리고 이젠 단 두 곳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 두 곳을 남겨 둔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강한 마족이 그곳에 상주하기 때문이다.

“플뤼톤과… 아몬이었나요?”

“맞아, 플뤼톤은 김진석에게 치명상을 입고 회복에 전념했지.”

리차드와 세라스는 아몬과 플뤼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 둘을 제외하고는 성주 격 마족이 이젠 없었다.

하지만 그 둘이 제일 문제였다. 플뤼톤은 아몬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대외적으로 거의 활동하지 않는 아몬을 대신해 마족들을 이끌고 있다.

물론 각자도생이 강한 마족들을 이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아몬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마족도 있기에 플뤼톤이 가장 강한 마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플뤼톤이 김진석에게 큰 부상을 입어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김진석에게 상처를 입은 지 2년.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뭔가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 남자를요?”

[리차드. LV:52]

어느새 리차드의 레벨이 50이 넘어섰고, 그를 비롯해 인간들은 세라스를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해졌다.

[세라스. LV:86]

그녀의 레벨 또한 올라 플뤼톤과 같은 레벨이 되었지만 세라스는 본신의 무력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물론 리차드 정도야 눈 감고도 이기겠지만 레벨 86에 걸맞은 무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플뤼톤은 다르다.

그는 마법사, 그것도 가장 위력이 강하다는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이다. 사실 인간들은 기세를 타고 7만의 군세가 살아 있을 때 플뤼톤의 지역, 화산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2만의 군세를 잃었다.

* * *

다른 마계의 지역과는 차원이 달랐다. 처음 동료를 잃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디선가 마법이 날아왔다.

하지만 인간들은 포기하지 않고 방어 대형을 갖추며 나아갔지만 그게 리차드가 한, 가장 큰 실수였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마법을 그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분명 마법 사용자가 있을 것이다, 라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많은 마법이 날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1만의 군세를 잃고 나서야 인간의 마법사 중 가장 강한 자, 알카가 화산 지역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요새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요새.”

화산이라 불린 이유, 이곳이 전부 잿더미로 된 건축물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화산 지역은 전부 플뤼톤의 손아귀 안이다.

알카조차도 어디서 마법이 날아들지 예측할 수 없었지만 마법이 사용되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화산에 더 들어갈 수 없을 노릇. 플뤼톤은커녕 다른 마족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히 알카가 마법이 사용될 때 곧바로 인간의 마법사들이 방어막을 펼쳐 효과적으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아직 자신들이 부족하다고 판단, 리차드는 곧바로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그때 플뤼톤과 그를 따르는 휘하 마족들이 나타났다.

리차드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맞설지, 아니면 퇴각할지.

플뤼톤과 싸운다면 얼마의 희생이 있을지 모른다. 뒤에 더 강한 마족이 남아 있는데 그와 싸우다 너무 많은 병력을 잃으면 뒤에 올 마족을 감당할 수 없다.

퇴각한다면 분명 플뤼톤은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고, 허무한 희생만이 있을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 리차드는 자신의 명령에 수많은 인간이 죽었지만 그들의 희생은 고귀했다. 그들도 기꺼이 리차드를 믿고 나섰으며 죽을 때조차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말 그대로 개죽음이었다. 무능한 상관의 명령을 따라 무리하게 이 화산까지 따라온 그들이었다.

그때.

“제가 남겠습니다. 퇴각하십시오.”

“저도 남죠.”

그 말을 한 자는 클라우드, 그리고 세드릭이었다. 클라우드는 레온하르트와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기사로 방어 하나만큼은 가이크도 인정한 자다.

세드릭, 알카를 제외하고 화염 마법을 그 누구보다도 잘 다루는 마법사다. 아니, 어쩌면 화염 마법 하나만큼은 알카보다도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자였다.

그리고 그들을 보좌하는 다른 자들까지. 적어도 1만의 군세였다.

인간 최고의 전력 중 하나인 그들이 고작 다른 자들이 도망치게 시간을 벌어 주는, 희생하는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괜찮겠나?”

“레온하르트, 이젠 당신이 최고의 방어형 기사입니다.”

“…길티안이 남아 있다만.”

레온하르트와 클라우드의 마지막 대화이다. 아직 젊은 클라우드를 대신해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남고 싶었지만 기사이기 전에 칼라 성의 성주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걸 아는, 성주가 아닌 클라우드는 자신이 남겠다고 말한 것이다.

세드릭은 알카를 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알카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비겁하게. 너희에게 알맞게. 도망쳐라.”

왠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플뤼톤은 인간들을 도발했다. 그 말에 리차드는 이가 갈렸다. 마찬가지로 화가 났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저런 가벼운 도발에 넘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부탁…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리 쉽게 죽진 않을 것이니.”

비참했다. 자신의 판단 미스로 인해 그들이 희생되어야 한다니. 그것도 자신을 위해. 무기력하고 멍청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런데 진작에 그 감정을 느껴 본 전적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

“떨쳐 내. 그리고 네가 뭘 잘못했는지 깨달아. 그게 네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거다.”

“과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이겨 내세요.”

[노라 LV:69]

[다이아 LV:71]

이제는 인간의 전력 중 없어서 안 될 존재가 된 노라와 다이아였다.

거의 매일 세라스에게 찾아가 김진석의 소재를 묻고 있는 그녀들은 마찬가지로 리차드도 세라스에게 마족에 관해 묻는 것이 많았기에 자주 마주치게 됐다.

자주 만난 그들은 서로의 근황을 간간이 물어볼 정도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노라와 다이아도 김진석 때문에 리차드가 느낀 감정을 알 수 있었고, 그에게 조언을 건넨 것이다.

사실 리차드가 화산에 들어온다는 결정을 내린 것도 김진석 때문이다. 성주 격 마족을 김진석이 죄다 죽여 버렸기 때문에 인간들은 승승장구하며 마계를 점령할 수 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세라스밖에 없었고, 김진석이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뤄 낸 결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들을 잃고 시간이 지난 후. 쓰라린 상처를 견디고 일어난 리차드와 인간들은 다시 한번 화산에 도전했다.

“오랜만이군요, 가이크 님.”

“오랜만입니다, 리차드.”

[가이크 LV:80]

세라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레벨인 80. 그는 정말 인간의 최종 병기가 되었다. 2만의 군세를 잃은 날, 화산에 들어갔을 때 가이크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짐승의 도시를 공략하고 있었다. 리차드의 멍청했던 선택. 짐승의 도시와 화산을 동시에 공략하려 했었다.

다행히 짐승의 도시는 성주가 없었기에 쉽다면 쉽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화산에서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리차드는 깨달았다. 인간은 전력을 나눌 수준이 아직 되지 못한다고. 자신들의 장점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에 다다랐습니다. 화산의 공략을 시작합니다.”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당신은 인간이 맞나요?”

“넌 악마가 맞냐?”

지금 김진석은 53층이었다. 눈앞의 넬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넬은 서큐버스다. 그녀의 가장 중요한 스킬은 환각이다. 흔히 서큐버스는 꿈속에서 환각을 통해 정기를 빼먹는다고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현실에도 간섭을 미치는 환각을 다루는 그녀는 꽤나 까다로운 상대일 것이다.

상대였어야 했다.

“뭐 하는 거지?”

“…어?”

하지만 넬의 환각은 김진석에게 통하지 않았다. 우선 환각에 빠트려야 넬이 뭔가를 하든 말든 하는데, 아예 환각 자체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넬의 당황함을 느낀 김진석은 그저 가만히 있었고, 넬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만져 보고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었다.

환각이 없는 넬은 그저 조금 강한 마족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전략을 바꿨다.

“…바둑 룰 모르는데?”

“알려 드릴게요.”

어차피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52층의 비네는 김진석에게 거의 반항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소환하는 가디언을 비롯한 최강의 해골들은 김진석의 앞에선 버러지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스킬을 사용하며 김진석에게 조금 버텼지만 그것도 잠시. 김진석은 세라스와 같은 외모인 그녀가 뭔가 거북해 그냥 갈증과 광전사의 분노를 사용해 곧바로 죽여 버리고 넘어온 것이다.

그래서 넬은 그냥 허공에서 바둑판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환각의 일종이어서 김진석이 만지기만 해도 사라지기 때문에 김진석은 말만으로 돌을 두고 넬이 그걸 들어 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김진석은 바둑 같은 걸 전혀 둘 줄 몰랐고, 연전연승을 거두는 넬이었다. 알 수 없는 정복감을 느끼며 넬은 김진석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고, 김진석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뭘 원하는 거지?”

“그냥 별거 없어요. 당신을 방해하는 게 전부죠.”

“여기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나?”

“나갈 수 있었다면 진작에 나갔겠죠.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예요.”

어차피 김진석도 단탈리온에게 아직 악마의 침공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걸 들었기에 조금의 여유를 갖고 바둑을 두며 넬의 질문에 전부 대답해 주었다.

“당신은 신인가요?”

“아니.”

“그러면 그 많은 분신은 뭐죠?”

“…분신? 아… 어차피 설명해도 못 믿을 거다.”

넬은 사소한 것부터 대답하기 어려운 것까지, 뭐가 그리 궁금한 것이 많은지 생각보다 수다쟁이였다.

하지만 김진석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대답해 주었다.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답은 해 줬다.

그런데 넬의 마지막 질문은 김진석도 대답할 수 없었다.

“김진석, 당신의 목적은 뭐죠?”

“…….”

목적, 자신의 목적.

거창한 건 없었다. 그는 원래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고, 그건 현실에서도, 게임 속 세계인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신의 목적이라…….

“악마를 몰아내는 것?”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마음은 없는 건가요?”

어차피 바포메트와 비네, 넬과 세피드는 시험의 탑에 갇혀 있는 존재다. 게임에 관한 걸 걸 제외하고 김진석은 그들에게 모든 걸 알려 주었다.

자신이 다른 세계의 인간이고, 갑자기 이곳에 불려 왔다는 것까지 전부 다.

넬의 질문에 김진석은 딱히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응.”

“왜요? 원래 거기서 살았다면 고향 같은 곳 아닌가요?”

마치 여고생처럼 눈을 반짝이며 묻는 넬의 모습을 보고 김진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세계가 고향은 맞지. 근데 진짜 고향은 내게 지옥 같은…….”

말하다가 멈춘 김진석을 보고 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렇지.”

잊고 있었다. 김진석은 보육원에서 학대당하며 살았다. 투견과의 싸움이 일상이었고, 간신히 그곳에서 벗어나 생활하다가.

“할 수 있는 복수를 하러 갔었지.”

복수. 평생 감방에 머무르게 하는 것도 부족하지만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죽여야겠다.”

이제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의 말에 넬은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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