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넬과 비네, 세피드는 지금의 김진석을 바라봤다.
분명 처음에는 1층에서 나오는, 고작 조금 개조한 몬스터에게도 고전하는 모습을 면치 못했던 김진석이 지금은 그들의 역작인 칼바로스조차도 뛰어넘어 바포메트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이상해. 분명 아는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달라.”
스나이핑. 분명 하나의 대상만 공격하는 스킬인데 바포메트가 희생양으로 소환한 가디언을 뚫고 바포메트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스킬까지. 다른 분신의 스킬 전부를 사용했지만 전부 하위 호환 격인 스킬이었다.
하지만 스킬이 약할지언정 김진석이 약한 건 아니었다.
모든 스킬을 사용하는 김진석에겐 약점이란 개념 따위는 없었고, 모든 상황에 대처하고 오로지 공격만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악마들은 그것만으로 김진석의 약점을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있어. 그리고 전 층에서 보면 알다시피 몸이 약해.”
“모든 걸 공격에 투자한 타입인가?”
어떻게 보면 정확한 말이었다. 공격에 올인하진 않았지만 악마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태생이 인간이라 게임처럼 몇 대 맞는다고 안 죽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게다가 김진석은 가죽 갑옷을 제외한 그 어떠한 방어구도 입지 않았다. 인벤토리에는 수많은 방어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자신의 몸에 딱 맞게 변한다고 한들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마음 같아선 가죽 갑옷도 입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마저 안 입기에는 무리가 좀 있었다.
“그리고… 우리랑 대화가 가능하다.”
언제나 그들을 기계같이 죽이던 김진석은 더는 없었다.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에 대답해 주며 감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마치 분신이 아닌 본신처럼 말이다.
비록 그 감정의 폭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저게… 저자의 본모습인가?”
바포메트가 많이 봐주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고작 저 정도의 무력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은 필사적으로 보였다.
처음부터 궁극기를 사용하는 건 악마들에게 수많은 죽음에서도 몇 번 없던 일이었다. 대부분 마지막에 사용했으니깐.
하지만 그 공격 하나로 바포메트의 가디언과 마법사라 높은 수치의 방어막이 있음에도 단번에 뚫어 냈다.
1층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모습은 악마들은 적응할 수 없었다.
그때 세 악마도 경시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그의 대검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은 그의 분신조차도 내지 못했던, 희망을 가지던 세 악마의 마음을 꺾어 버리는 힘이었다.
【 아크, 그리고 지구 】
“…후.”
갈증과 비기, 광전사의 분노. 궁극기를 두 개나 사용할 수 있는 김진석만이 가능한 연계였다. 사실 김진석도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연계를 가르쳐 준 건 누구도 아닌 바로 스킬, 광기였다.
비명의 숲에서 아이의 원혼을 성불시키고 이후에 오는 마족을 죽이다가 사고 쳐 마족들이 몰려든 적이 있었다.
그때 김진석은 괴물 같은 마기를 느꼈고, 뒤도 볼 거 없이 바로 스킬 광기를 사용했다.
그 마기의 정체는 바로 애드몬드. 죽은 자들의 성의 성주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을 보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바로 김진석의 궁극기로 인해.
분노에 휩싸인 김진석은 분명 배우지 않은 스킬인데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두 번째 메인 캐릭터인 키잔과 똑같은 스킬을 말이다.
애드몬드는 키잔의 궁극기, 비기, 광전사의 분노로 인해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분노에 잠식되어 있었지만 그 기억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키잔의 직업, 버서커의 또 다른 궁극기인 갈증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80레벨을 달성했을 때 김진석은 보상으로 갈증을 얻었다. 그리고 이번이 첫 실험이다. 갈증과 광전사의 비기가 중첩으로 적용이 되는지.
왠지 모르겠지만 광기를 사용하면 광전사의 분노를 사용할 수 있었고, 갈증은 80레벨에 배운 스킬이다.
그리고 이젠 광기를 사용해도 이성을 찾을 수 있었으니 눈앞의 상대, 바포메트에게 사용해 본 것이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허…….”
분노로 만들어진, 하늘을 뚫을 듯한 대검은 이 세계를 두 쪽으로 갈라 버렸다. 시험의 탑이지만 바포메트의 구역인 이 공간을 절반으로 나누어 버렸다.
어쩌면 그의 캐릭터, 키잔이 사용한 광전사의 분노보다도 강력해 보였다. 김진석이 천천히 걸어가며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를 보고 있을 때.
“대단하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극히 평온한 목소리. 흠칫 놀란 김진석은 뒤를 돌아봤고, 그곳엔 바포메트가 멀쩡히 서 있었다.
“…넌?”
“51층을 클리어하셨으니 당연히 저도 사라져야죠.”
아니, 멀쩡한 건 아니었다. 온몸이 빛으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바포메트는 평온한 목소리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껏 보았던 당신과는 다르군요. 겉모습도, 힘도 무엇 하나 같은 게 없습니다. 그게 당신의 본모습입니까?”
“…….”
바포메트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바포메트에게 진실을 알려 준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었다. 그렇기에 김진석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바포메트는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김진석은 포션 하나 먹지 않고 바포메트를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한참 동안 바포메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세 악마는 그 결과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봐준 건가?”
세피드의 말에 그들의 뒤로 빛무리가 모여들었고, 이내 바포메트가 나타나며 그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랬지. 사실 봐준 것도 아니야. 그저 방어만을 했을 뿐. 자네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비네, 너는 처음에 그를 봤을 때 다리를 바들바들 떨던데.”
“…그 정도는 아니었어.”
시험의 탑의 특성상 그들은 죽지 않는다. 비록 죽을 때의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그들은 다시 살아난다.
김진석의 분신, 게임 속 캐릭터의 무자비함을 알고 있는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의 공격을 막게 된다.
그들은 이미 그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자신들을 죽이고 나아가려는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상대이기에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 김진석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보다 그가 약한 분신으로 온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가졌는데…….
“세피드, 자네는 저 공격을 막을 수 있겠나?”
“…적어도 한 번에 죽지는 않을 수 있다.”
“결국엔 죽는다는 거군.”
“…….”
바포메트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세피드도 말을 아꼈다.
“바포메트, 왜 네가 자랑하는 몬스터들을 부르지 않은 거지? 만약에 그랬다면 더더욱 시간을 끌 수 있었을 텐데. 잘하면 죽일 수도 있었어.”
넬은 바포메트가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거에 의문을 가졌다. 바포메트는 마법사이면서 몬스터들을 다루는 조련사다.
처음부터 그가 몬스터들을 소환해 싸워 나갔다면 몸이 약한 김진석을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궁금했다.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그였어. 뭐든 물어보고 싶더군.”
하지만 마법사들이 대개 그렇듯 호기심이 많다. 바포메트도 악마이기 전에 마법사였고,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건 예측하지 못했어. 자네들도 봤지?”
“…그래, 어쩌면 비장의 수였는데 말이지.”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 호랑이를 소환하고 뒤로 물러나 스킬을 사용하려 했지. 하지만 사라진 것에 나는 당황했고,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격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내가 죽었다. 그게 전부야.”
넬의 말처럼 바포메트는 진심을 다해 김진석을 상대하려고 했다. 그래서 아직 말을 따르지 않지만 가장 강한 호랑이를 꺼내 시선을 분산시키고 그가 스킬을 사용하려 했지만… 이렇게 된 거다.
“비네, 자네도 대화를 나눠 봐서 알겠지만 그는 전과 달라졌다.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부터가 달라진 거지만 적어도 그는 나를 최대한 빠르게 죽이려 하지 않았다. 만약 처음부터 저 스킬을 사용했다면 내가 손쓸 새도 없었겠지.”
바포메트는 자기의 차례가 끝났으니 자신이 알게 된 모든 것을 세 악마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이젠 그들이 김진석을 상대해야 했다.
“제일 중요한 건 대화가 가능하다는 거다. 최대한 대화를 많이 해. 그리고 몇 가지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지 모르니 최대한 오래 버텨라. 세피드가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취득할 수 있게.”
52층의 비네, 53층의 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희생양이다. 이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방금의 일격을 보고 희망을 다시 버렸다.
그렇다면 하나,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세피드에게 모든 걸 맡겨야 했다.
“…부탁한다.”
* * *
김진석은 바포메트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뒤늦게 떠오른 검은색 글씨를 발견했다.
- 레벨 90 달성. 보상을 선택하라.
바포메트를 죽이고 레벨 90을 달성했다.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이 세계에서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레벨을 달성했는데도 기분이 좋지 못했다.
“…짜증 나는군.”
갑자기 모든 게 짜증이 났다. 사실 김진석은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이 오히려 좋았다. 현실에서는 기껏해야 편의점에 아르바이트생이었고, 게임 좀 잘하는 덩치 큰 남자인 게 전부였다.
그런데 게임 속 세계인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비록 처음에는 죽을 뻔한 경험이 더 많았지만 노라와 다이아를 만나 자신에게 전투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걸 확인했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성장 속도도 부족하다고 판단해 김진석 본인이 그들의 품을 떠났지만 그들 덕분에 성장할 수 있던 건 사실이었다.
김진석은 이 세계가 즐거웠다. 악마의 침공이 예견되어 있지 않았다면 정말 여유롭게 이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이 세계에 정이 든 것이다.
하지만 바포메트는 아니었다. 게임 속 세계이긴 했지만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
그런데 바포메트를 비롯한 다른 악마들은 김진석이 게임 속 시험의 탑에서 행했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을 수백 번 넘게 죽인 것을 말이다.
물론 김진석은 시험의 탑에서 더 오를 필요가 없기도 했다. 악마의 침공이 다다른 지금 레벨 89가 되었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해 바포메트까지 상대한 것이다.
검은색 글씨의 퀘스트를 깨고 보상을 얻기 위한 것도 있지만 결국 핑계다. 김진석 자신이 그를 죽이는 걸 선택한 것이다.
“씨발…….”
역겨웠다. 자신이.
바포메트는 자신을 상대할 때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레이드 보스 몬스터로 있을 때의 패턴은커녕 시험의 탑 오리지널 패턴도 사용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현실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에 대한 두려움일까.
최소 782번 이상 자신에게 죽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만든 자가 도대체 누굴까. 누가 이곳에 자신을 데려왔을까.
“단탈리온, 그쪽은 아나?”
모든 말에 대답하는 단탈리온이었지만 김진석의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김진석도 대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 계단이 나타났지만 그는 바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이 시험의 탑의 오류를 발견했다.
“궁극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스킬의 쿨타임도 줄어들고 있다는 것.
김진석은 카이의 궁극기인 쉐도우 트랩과 스나이핑, 키잔의 궁극기인 갈증과 광전사의 분노의 쿨타임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