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91화 (91/201)

91화

간을 볼 생각은 없었다.

지금 눈앞의 고위 악마, 바포메트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악마 중 하나다. 스토리상 최종 보스인 아몬조차도 바포메트의 앞에선 강아지 수준이다.

“신기하군요. 당신은 어떤 존재죠?”

바포메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카이의 스킬인 차징 샷은 뭔가에 튕겨 나갔다. 바포메트의 보호막이다.

그 거대한 몸과 다르게 바포메트는 사실 마법사다.

하지만 김진석이 사용하는 가장 강한 스킬 중 하나인 차징 샷이 통하지 않았다는 건 김진석에게 호재는 아니었다.

“나도 내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김진석은 바포메트의 말에 최대한 여유롭게 대답해 주며 그 이후에 날아들어 올 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바포메트는 공격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저희는 당신이 저희를 최대한 늦게 죽이게 방어만을 고집했거든요.”

그의 말에 김진석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한 채 스킬을 사용했다.

1층에서부터 50층까지, 악마들은 새로운 김진석을 관찰했고 조사했다.

그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을 안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지금 김진석이 사용하는 스킬은 바포메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스나이핑.”

김진석의 메인 캐릭터 카이의 직업, 카인. 카인의 두 번째 궁극기다. 로스트 월드에서는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궁극기는 하나밖에 배우지 못한다.

하지만 검은색 글씨가 있는 김진석에겐 적용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레벨 70을 달성한 보상으로 단 하나의 대상에게 엄청난 대미지를 주는 궁극기. 스나이핑을 얻었다.

김진석의 주변으로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스킬을 사용하는 그 자신에게도 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해야 활시위를 당기고만 있을 뿐인데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

그런데 정작 그 스킬을 사용하는 대상인 바포메트는 익숙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땅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와 동시에 게이트와 비슷한 생김새인 소환진이 생겨나며 그 안에서 악마지만 고위 악마인 바포메트보다 한 단계 낮은 악마, 가디언이 거대한 손을 뻗으며 나타났다.

“그 스킬은 하나의 대상에게만 적용이 되더군요.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저 대신 다른……?”

바포메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전부 게임 속의 김진석에게 비롯된 것이다.

“게임과 현실은 달라.”

하지만 눈앞의 김진석은 현실이다.

김진석은 활시위를 놓았고, 그의 손에서 떠난 화살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레벨 90을 가볍게 넘는 악마, 가디언의 몸을 꿰뚫었다.

거기까지는 바포메트도 예상한 결과였지만 가디언의 몸을 꿰뚫고 날아오는 화살은 바포메트조차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김진석의 스나이핑은 바포메트를 꿰뚫…진 못했지만 그를 감싸고 있던 보호막을 단번에 부숴 버렸다.

레이드 보스 몬스터는 게임 속에서 시스템적으로 보호막이 갖추어져 있다. 일차적으로 그 보호막을 제거해야 실질적으로 레이드 보스 몬스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선 그 시스템이 어떻게 적용될지 몰랐지만 김진석은 궁극기 하나로 단번에 그 보호막을 부순 것이다.

바포메트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었지만 김진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맞는 건 달라.”

“…직접 맞아 보기도 했습니다만.”

물론 그렇다고 바포메트가 약해진 건 아니었으니.

“지금부터 시작이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둘의 말이 겹침과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쉐도우 트랩.”

또 다른 카이의 궁극기. 플뤼톤에게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궁극기였지만 그때와 지금의 김진석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상대도 차원이 달랐으니, 바포메트는 바닥에서 그림자가 올라오는 걸 그대로 발로 밟아 짓눌렀다.

바포메트의 앞 허공에 마법진 같은 게 생기더니, 그 안에 손을 집어넣고 꺼내니 바포메트의 손에는 황금색으로 타오르는 채찍이 들렸다.

게임 속에선 원래 마법사인 바포메트가 체력이 낮아졌을 때 나오는 패턴으로, 마법을 남발하던 바포메트가 육탄전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물론 현실엔 그딴 건 없었다.

바포메트는 검지를 뻗어 지휘하듯 김진석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는데, 손가락 끝에서 붉은색 광선 같은 게 나왔다.

이미 그 패턴을 알고 있던 김진석은 피했지만 그 광선에 닿은 땅바닥에서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이 일었다.

김진석은 일부러 그 폭발을 이용해 바포메트에게 다가갔다. 바포메트는 채찍을 휘둘러 김진석을 노리려 했는데, 역으로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가오니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그것도 잠깐. 바포메트는 곧바로 그의 거대한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려 했다.

“…음?”

하지만 날아오르지 못했다. 쉐도우 트랩. 궁극기인 그 스킬이 고작 바포메트에게 밟혔다고 사라지진 않았고, 끝까지 남아 그의 날개를 붙잡은 것이다.

“기교. 급습.”

신체 능력을 강화해 주는 버프와 스킬을 사용하며 바람의 칼날을 손에 쥔 김진석은 싸울 때 가장 거슬릴 게 분명한 바포메트의 날개를 잘라 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바포메트는 자신의 잘린 날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저희를 빠르게 죽이는 게 목적인 그때완 뭔가 다르군요.”

“비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생각보다 악마들은 말이 많구나?”

김진석의 손에는 어느새 바람의 칼날이 아닌 녹슨 날개가 들려 있었고, 화살을 날렸지만 바포메트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가볍게 화살을 쳐 내며 말했다.

“당신과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으니깐요. 목소리조차도 이번에 처음 듣는 겁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바포메트의 말을 무시한 채 김진석은 녹슨 날개를 집어넣고 이번엔 츠바이핸더를 꺼냈다.

“모든 무기를 한 번에 사용하는 당신도 처음입니다.”

“…광기.”

[키잔과의 동기화율 70%]

레벨이 89나 됐음에도 아직 키잔과의 동기화율은 70퍼센트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70퍼센트가 된 덕인지, 아니면 익숙해진 것인지 더는 분노에 잠식되지 않았다.

가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날아가듯 달려가며 바포메트를 향해 츠바이핸더를 휘둘렀다.

광기를 사용하고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반대로 정말 짐승 같은 움직임은 더는 행하지 않았기에 상대를 향한 살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바포메트는 채찍을 휘둘러 김진석을 막으려 했지만 그는 츠바이핸더를 휘둘러 채찍을 쳐 냈다.

하지만 그 채찍은 역으로 츠바이핸더를 감았고, 동시에 바포메트의 앞에 검은색 큐브가 생겼다.

김진석은 채찍에 감긴 츠바이핸더를 손에서 놓고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대검을 꺼내 큐브를 향해 휘둘렀지만 강한 탄력과 함께 검이 튕겨 나갔다.

“큭.”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은 김진석은 이를 악물고 반대 팔로 떨리는 손을 강제로 멈춰 세웠다.

그리고 눈앞의 검은색 큐브가 녹아내리듯 사라지는 걸 바라봤다.

“간신히 잡은 호랑이입니다. 마기를 강제로 주입했지만 마기를 머금고 있음에도 제 말을 듣지 않더군요……?”

바포메트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반쪽밖에 없는 날개로 용케 날아다니며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큐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으로 바포메트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표출했다.

“그럴…리가 없는데? 탈출할 수 있을 리가……?!”

있을 리 없는데도 바포메트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신사 같은 바포메트였는데, 이 모습은 신선했다.

“그런데 호랑이라…….”

호랑이. 원래 로스트 월드에는 호랑이란 생명체는 없었다. 다만 게임사에서 흔히 불리는 고인물, 게임을 오래 한 사람들이 즐길 거 다 즐기고도 할 게 없다고 말하는 그들을 위해 만들어 준 던전 같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아이템과 금화를 무한정으로 파밍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로스트 월드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몬스터를 죽여서 파밍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가 바로 호랑이다.

[호랑이. LV:99]

최고 레벨의 호랑이는 과연 악마조차도 두려워할 존재이긴 했다. 하지만 레이드 보스인 바포메트마저도 왜 저리 당황하는 것일까.

김진석은 조금이나마 짐작 가는 게 있었다.

“호랑이가 혹시 까맸나?”

“…예?”

바포메트의 말을 듣고 김진석은 확신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이곳에서 녀석을 보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깐.

“차징 샷.”

카이와의 동기화율도 70퍼센트가 된 지금, 차징 샷의 쿨타임도 많이 줄어들었고 바포메트가 방심하고 있을 때 스킬을 사용했다.

정말 괴물 같은, 아니 어쩌면 괴물인 바포메트는 찰나와도 같은 반응 속도로 채찍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하지만 김진석은 고작 가장 강력한 스킬 중 하나인 차징 샷을 거리를 줄이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다.

녹슨 날개를 집어 던지고 떨어뜨렸던 츠바이핸더를 한 바퀴 굴러 집은 다음 스킬을 사용했다.

“갈증.”

로스트 월드에 유일하게 있는 버프형 궁극기, 갈증. 버서커만이 가지고 있는 궁극기이며 그 스킬의 효과는 간단하다.

다음에 사용할 스킬의 공격력을 300퍼센트 증가시킨다. 화려한, 붉은 이펙트는 덤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김진석만이 사용할 수 있는 연계.

“비기, 광전사의 분노.”

또 다른 궁극기, 광전사의 분노. 모든 기운을 대검에 주입해 분노로 만든 검을 휘두른다. 80레벨을 달성하고 배운 두 가지의 궁극기다.

하늘을 뚫은 듯한 붉은색 기운이 대검에 모이고 있었다. 정작 그 스킬을 몸으로 받아야 할 바포메트는 황홀하다는 듯이 분노의 대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보았던 스킬인 것 같은데… 아름답군요.”

그 말을 끝으로 분노의 대검이 바포메트를 집어삼켰다.

* * *

“…저 남자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던 남자가 맞나?”

세 악마는 김진석과 바포메트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다. 저자의 영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았어.”

악마가 김진석을 게임 속 캐릭터와 동일시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겉모습이 아닌 그 속의 내면, 영혼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창한 건 아니었다. 그자의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전부였으니.

“비네? 네가 처음 발견했잖아. 그때도 저 정도였어?”

현재 마계에 있는 세라스와 똑같이 생긴 악마, 비네에게 말은 건 악마의 이름은 넬. 비네와 비견되거나 혹은 더 아름다운 그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서큐버스였다.

피처럼 붉은 장발의 머리와 검은색 뿔, 박쥐 날개를 가진 그녀는 그 어떤 남자라도 매혹할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아니, 처음엔 두렵긴 했지만 뭔가 이상했어. 이곳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제일 다른 점은 약했다는 거야. 너희도 봤지? 고작 1~10층쯤에서 고전하는 그의 모습을.”

비네는 그렇게 말하며 넬과 지금 이곳의 유일한 남성체인 악마를 바라봤다. 그는 완벽히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성의 모습이었다.

넬이 서큐버스이니 남성은 인큐버스로 헷갈릴 정도로 잘생긴 남성의 모습이었다. 그의 이름은 세피드. 54층에서 나오는 악마로, 이 중에서 가장 강한 고위 악마다.

하지만 고위 악마끼리는 딱 한 명 빼고는 순위를 나누지 않았고, 그들은 서로를 편하게 불렀다. 오랫동안 같은 처지이니 친구 같은 포지션이기도 했다.

“나도 봤다. 그의 분신 중 그렇게까지 약한 자는 처음 보았지.”

악마는 김진석을 한 단계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혼은 같았지만 겉모습이 달라지는 걸 분신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신처럼 유흥을 즐기기 위해 위의 존재가 분신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