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바포메트는 김진석의 말에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석은 알 수 있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는 것을. 바포메트의 얼굴은 짐승의 것이라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비네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체념. 지금 바포메트가 가진 감정은 체념이었다.
“처음엔 당신이 맞는지 의문부터 가졌습니다. 너무나 약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의 당신을 보면… 과연 저희가 알고 있는 그분이 맞는 것 같더군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김진석은 게임 속 캐릭터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약했다.
지금 김진석의 레벨은 89이다. 아직도 약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아몬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바포메트는 아니다.
“그러나 부족합니다. 아직 저희에게 도전하기에는 시기상조일 텐데.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당신도 우리한테 많이 죽어 봤을 터이니.”
사실이다. 김진석은 그들에게 많이 죽어 봤다. 게임 속에서.
게임의 최종 컨텐츠인 레이드 보스 몬스터가 그들이다. 비록 혼자서 잡게 설계된 만큼 본래보다 약하게 설정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약하다는 건 아니다.
시험의 탑을 한 층, 한 층 클리어하면 보상, 시험의 탑 증표라는 걸 주는데, 그걸 모아서 단탈리온에게 가져다주면 자신의 직업 무기로 바꿔 준다고 했지.
하지만 최종 컨텐츠로 나온 만큼 난이도도 그만큼 악랄하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의 불만이 컸고, 게임사가 해결해 준 방법은 연습 모드다.
얼마든지 죽어도 아무런 페널티도 없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연습 모드. 하지만 그 연습 모드는 정확히 50층까지 있다.
어차피 50층까지만 돌아도 증표를 모을 수 있어서 직업 무기로 바꾸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51층부터는 주는 증표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직업 무기를 얻는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김진석도 게임에서는 50층까지는 수월하게 깼지만 51층부터는 꽤나 고전했다. 이미 모든 레이드 보스들을 박살 내고 시험의 탑에 도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게임사도 그냥 똑같은 패턴만을 그대로 시험의 탑 레이드 보스들에게 넣은 게 아니라 시험의 탑만의 오리지널 패턴들을 집어넣었다.
그걸 모르고 얕본 김진석은 공략을 완벽히 알아낼 때까지 보스들에게 수십, 수백 번을 죽어 왔다.
“나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김진석은 그 말을 끝으로 인벤토리에서 녹슨 날개를 꺼내 전투를 준비했다. 바포메트도 그의 모습을 보더니 뿔 위의 화염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심호흡한 김진석은 바포메트를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흰 이곳에 얼마나 갇혀 있던 것이지?”
“저희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은 횟수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몇 번이지?”
“782회. 처음부터 세었던 건 아니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바포메트의 말에 김진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녹슨 날개의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 * *
“한낱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창공의 이프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최고 전력인 세라스와 가이크가 이프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인간들은 하늘을 나는 다른 마족들을 노렸다.
리차드가 생각한 방법은 바로 차륜전이다.
어차피 하늘을 공격할 수단이 있는 인간들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최대한 강력한 공격으로 마족들의 숫자를 줄이고 힘을 회복할 동안 다른 자들이 그들을 지키는 것이다.
차륜전과는 살짝 다르긴 하지만 숫자가 월등히 많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키는 자들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동료와 리차드를 믿었다.
지키는 자가 힘이 다 빠지면 다른 지키는 자가 앞으로 나와 버티는 방법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이프는 처음에 말을 그렇게 했지만 딱히 그 마족들이 죽든 말든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마족이었으니.
세라스의 아이들과 단일로서 제일 강력한 가이크가 방어만을 고집하고, 이프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면 어디선가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왔다.
이프가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확인하려고만 하면 가이크가 미친놈처럼 달려들었다.
비록 하프이긴 했지만 그의 부모인 오우거의 피를 짙게 받은 가이크는 상처를 입어도 금방 회복이 됐다.
마치 과거의 사라진 직업, 광전사 버서커처럼 말이다.
게다가 가이크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의 반열에 오른 자이기에 이프는 까다로웠다. 세라스의 아이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 처음으로 이프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이크를 죽이려고만 하면 세라스의 아이가 몸을 던져서 지키니, 결국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지금.
이프를 따르는 마족들은 죽거나 도망쳐 그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쿨럭.”
하지만 가이크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피해가 누적돼 그는 구석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고, 세라스도 과도한 마기의 사용으로 검은색 피가 코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버텨 냈다.
“대단하군.”
그런 인간들을 보며 이프는 우아하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안 보이는 곳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가이크가 뛰어들어 공격했지만 그에겐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기껏해야 여덟 쌍의 날개 중 화살에 맞아 깃털 몇 개가 떨어진 게 전부였다. 레벨의 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진 않았지만 상성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일반적인 마족이라면 절대 이렇게 여유롭게 있을 리가 없었다.
세라스와 가이크는 그런 이프를 보며 이상하게 여겼다.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한들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는데 저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 있다니.
“무슨… 속셈이지?”
분명 처음에는 이프가 광풍을 일으키며 적극적으로 공격했지만 몇 번 공격이 통하지 않자 흥미를 잃어버린 듯 전투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다.
“딱히. 내가 원하던 상대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이프의 말은 세라스를 비롯해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 세라스는 이 중에서 이프의 대해 그나마 잘 알고 있었다.
마계에서도 이프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어서 자세히는 아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건 자기 구역에 들어선 자는 누구든 상관 안 하고 가차 없이 죽여 버린다는 것이다.
설령 마족이라고 한들 말이다.
그런데 수많은 날개 달린 마족이 그의 곁에 있었다. 세라스가 본 자료가 조금 오래된 자료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그가 바뀌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상대?”
“아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계시를 받았다. 갑자기 눈앞에 검은색 글씨가 나타나더니 한 인간을 죽이라더군. 그런데 이곳에 인간이 있어야 말이지.”
계시? 검은색 글씨? 세라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프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날개 달린 놈들을 모아 인간을 찾으라고 했지. 너희를 발견했을 땐 기뻤다. 나태한 내 삶의 재밌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너희는 내가 기다린 인간이 아닌 것 같다. 한 인간이라고 했으니 놈은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뒤에 오는 그의 말에 세라스, 그리고 노라와 다이아도 이프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것만 같았다.
“김진석.”
“아몬도 나와 같은 계시를 받았을 거다. 그리고 놈은 진작에 알고 너희를 노리지 않았던 거야. 쯧, 내가 멍청했군.”
이프는 자신을 자책하는 말로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이프는 그 말을 끝으로 여덟 쌍의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큭!”
그저 이프가 날아오르기만 했는데도 지상의 인간들에겐 몸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가이크조차도 눈을 손으로 가리며 끝까지 이프를 바라보려 했지만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로 치솟아 사라졌다.
사실 지금껏 이프는 인간들의 수준에 맞춰 땅에 발을 딛지는 않았지만 그 근처에서 가이크와 세라스의 아이들을 상대했었다.
“…아직도 우린 부족하군.”
“사상자가 있나?! 최대한 그들을 부축하고 이곳을 빠져나간다! 빨리!”
리차드는 이프가 사라짐과 동시에 긴장이 풀려 지쳐 버린 인간들을 이제는 능숙하게 이끌며 그들을 재촉했다.
사라진 이프였지만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인간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노라와 다이아, 그리고 세라스는 이프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굴에서 살던, 인간 말을 하던 몬스터들이 김진석을 쫓아 칼라 성까지 온 적이 있었어. 갑자기 말이야.”
노라는 과거, 광기의 굴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엘우드에도 갑자기 마족이 나타났었죠. 하지만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딱 그곳에 있었고, 그 마족을 격퇴했었습니다.”
다이아는 자신의 고향인 엘우드의 근처에 몬스터를 잡으러 갔다가 마족을 발견해 죽인 일을 상기했다.
“녀석은 내 아이들도, 내 이름도, 내 힘도 정확히 알고 있었어.”
세라스는 그의 나이에 비해 자신을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는 김진석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의문이면서도 두려워 물어볼 수 없었던 한 가지.
“도대체 호랑이는 왜 그를 따르는 거야?”
“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처음 보는 생명체인데… 호랑이? 호랑이가 걔를 따르는 이유가 뭐예요?”
세라스의 말에 가장 먼저 김진석을 따르는 흑호의 존재를 안 노라는 그녀에게 물었다. 다이아도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궁금한 건 마찬가지.
그 궁금증이 증폭된 건 바로 얼마 전에 흑호를 보았을 때 알카와 세라스,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처럼 나이가 많은, 악마의 침공을 겪은 그들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하긴, 너희는 잘 모르겠구나……. 아니, 사실 우리도 잘 몰라.”
그녀의 말에 노라와 다이아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고, 세라스는 뭔가를 생각하며 말을 이어 나가려 할 때 대신 말해 주는 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악마가 데려온 몬스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더군.”
인간의 군세, 인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 가장 경험이 많은 자, 레온하르트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악마조차도 두려워하는 몬스터였다. 아니, 몬스터도 아니다. 마치 신수 같았다. 영웅들과 같이 우리를 지키려고 하늘에서 내려다 준 신수.”
레온하르트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악마조차도 물어뜯어 죽여 버리는 호랑이의 기억이.
하지만 그런 호랑이 중에서도 검은색 호랑이는 레온하르트의 기억 속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서 검은색의 특징은 마기다.
호랑이가 마기에 잠식된 게 아닐까, 하여 김진석의 흑호를 보았을 때 그들은 식은땀을 흘린 것이다.
“고위 악마 중에는 몬스터를 다루는 자가 있다. 김진석, 그자는 마족이 아니겠지. 그렇다면 악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다이아도 엘리온도 그가 마족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하지만 그것이 수준의 차이가 현격히 났다면, 그래서 느낄 수 없었던 거라면.
“…….”
의심이 짙어진 노라와 다이아, 세라스도 레온하르트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 * *
“차징 샷.”
정작 의심받고 있는 김진석은 그 몬스터를 다루는 고위 악마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