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름이 다나인가? 마기와 잘 맞는 인간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다나, 다이아의 오랜 인간 친구의 이름이었다. 그 말에 놀라 다이아가 급히 이프에게 물으려 했지만 노라가 말렸다.
“아아, 아니겠군. 아몬에게 갔다고 들은 것 같으니. 그럼 넌 뭐지?”
세라스도 다이아의 친구 다나의 이야기를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창공의 이프.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호오, 인간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무엇이지?”
이프의 말에 금방이라도 전투가 일어날까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인간들은 동공이 커지며 깜짝 놀랐다.
지금껏 보았던 모든 마족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같은 말을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도 벌레와 굳이 말하려고 하지 않지 않는가.
마족들도 그와 같았다.
그런데 이프는 세라스의 말을 흔쾌히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들어 줄지는 의문이었다.
“마족이 전부 죽어도, 당신은 상관하지 않을 겁니까?”
지금 인간의 목적은 마족의 멸절. 눈앞의 이프와 그를 따르는 마족들을 상대한다면 인간의 희생이 많을 게 분명했다.
그들이 강해진 건 의미가 없었다. 몬스터 중에서도 날개가 달린 것들은 피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무기나 직업이 아닌 이상 그들을 잡기는 어려우니깐.
그런데 인간과 비슷하거나 혹은 높은 마족이 날개까지 달렸다면 아무리 인간이 강하다고 한들 상대하기 꺼릴 것이다.
게다가 저 숫자. 적어도 수천이다.
하늘을 뒤덮는 날개 달린 마족의 무리. 그들이 세라스의 물음에 하나같이 눈을 치켜뜨고 인간들을 바라보자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턱으로 보이는 부리에 갖다 대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딱히 다른 놈들은 죽어도 별 상관은 없다만, 나를 따르는 아이들은 되도록 살려 줬으면 하는데.”
그 말에 인간들은 물론이고 마족까지도 놀랐다. 이프의 말은 즉, 저들은 지금 자신들을 죽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세라스가 마기를 감췄다는 걸 알아차렸듯이 이프도 세라스가 마기를 감췄다는 걸 알아차렸다.
즉, 세라스는 이프인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강한 마기를 다루는 인간이란 거다.
원래 이프는 게임 속에서 스토리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스토리를 끝내고 마족들이 전부 죽었을 때 나올 서브 퀘스트 중 하나에서 아직 마족이 살아 있다는 퀘스트가 나온다.
플레이어가 살아 있다고 의심되는 곳에 갔더니 하늘에서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마족, 이프가 나오는 것이다.
결국 이프는 마족이 전부 죽을 때까지 전쟁에 나오지 않았던 마족이란 것이다.
만약 이곳에 김진석이 있다면 한번 그를 회유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플뤼톤 다음으로 강한 이프를 회유한다면, 아니 적어도 전쟁에 참여만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승률이 훨씬 오를 테니깐.
하지만 이프가 자신의 구역에서 나오지 않는 자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인간들이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세라스는 이프의 말에 동의하는지 주변 인간들을 바라봤다. 사실 그녀는 상관이 없었다. 이프와 싸우더라도 그건 인간의 선택이었고, 결과는 그들이 책임져야 할 테니.
설령 인간이 전부 죽더라도 그녀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살 만큼 살았고, 앞으로 살날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
리차드와 가이크를 비롯한 다른 인간들은 생각이 같았다.
“생각할 가치가 있습니까? 마족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세라스 님이 아니었다면 굳이 멈추지 않았을 겁니다.”
이프의 힘에 놀랐고, 본능적으로 움츠렸지만 그들은 2년 동안 마족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정예 중의 최정예다.
고작 강한 마족이 나왔다고 멈출 그들이 아니었다.
“아쉽군. 오랜만에 재밌는 인간들이었는데.”
“마족을 섬멸하라!”
리차드의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마족과 인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전장엔 이프의 광풍이 몰아쳤다.
* * *
“후… 곧인가.”
김진석은 이제 막 50층을 클리어했다.
[칼바로스. LV:98]
50층의 보스 몬스터, 칼바로스는 김진석이 알고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게임 속에선 시험의 탑에서만 나오는 오리지널 몬스터로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발키리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천사의 날개와 여성형 갑옷을 입은 칼바로스는 공략을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깨는 난이도를 가진 몬스터였다.
레이드 몬스터를 제외하면 어쩌면 가장 강한 몬스터로 분류될 수준의 몬스터다.
그런데 칼바로스의 모습은 김진석이 원래 알고 있던 칼바로스가 아니었다. 순백의 발키리와 같은 모습이어야 할 칼바로스는 새까맸다.
게다가 천사의 날개가 아닌 악마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천사의 날개는 전부 뜯긴 채 그 위로 악마의 날개가 나 있었다.
공격 패턴까지도 전부 달랐다. 1층부터 49층까지 몬스터들이 사용하는 공격을 전부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이상한 촉수까지.
고고하고 아름다워야 했을 칼바로스는 사라지고 온몸이 기괴하게 꺾이며 마치 귀신처럼 공격해 오는 몬스터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석은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는 단 4층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김진석. LV:89]
지금 그의 레벨은 89. 아직 고위 악마인 그들에게 도전하긴 부족하지만 시간도 마찬가지로 부족했다. 적어도 90레벨은 찍고 도전하고 싶었지만 아쉬웠다.
칼바로스와의 싸움은 꽤나 힘들었지만 여력은 아직 남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눈앞의 계단으로 향하진 않았다.
우선 김진석은 자신의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바람의 칼날. 공격력 83. 레벨 제한 80]
[녹슨 날개. 공격력 81. 레벨 제한 81]
[츠바이핸더. 공격력 85. 레벨 제한 70]
순서대로 단검과 활, 그리고 대검이었다. 레벨 제한이 가장 낮은 츠바이핸더가 가장 높은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람의 칼날과 녹슨 날개는 단검과 활이기도 했지만 일반 몬스터를 잡고 나온 것이고, 츠바이핸더는 보스급 몬스터를 잡고 나온 아이템이라 그렇다.
이외에도 여러 무기가 있었지만 가장 공격력이 높은 아이템은 저것들이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가장 중요했을 금화. 하지만 김진석은 금화를 사용할 때가 없었고, 계속해서 모으다 보니 지금, 이 지경까지 모였다.
[32,000,000]
총 3,200만 금화. 게임에서도 김진석이 이렇게까지 모아 본 적은 없었다. 조금 모았다 싶으면 바로 사용해야 하는 곳이 게임 로스트 월드였으니깐.
정확히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용처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인 이곳은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아디스의 근처에서 몬스터를 잡다 보니 더더욱 사용할 곳이 없었다. 그냥 김진석이 원하면 범죄자들이 가져다가 줬으니깐.
범죄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그들을 죽이는 김진석의 악명은 널리 퍼졌고, 그들의 대부인 밀론의 신임까지 받고 있으니 김진석은 아디스에서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사용할 곳도 없고 쌓이기만 하니 이렇게까지 모일 수밖에. 그리고 게임에서보다 금화와 아이템을 훨씬 더 잘 주는 것 같기도 했다.
현실이라 편의성을 봐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포션… 충분할 줄 알았는데. 더 사 둘 걸 그랬나?”
[중급 포션 120개, 상급 포션 30개, 최상급 포션 8개.]
아낀다고 아낀 거지만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로스트 월드 게임에서는 시험의 탑과 더불어 레이드를 할 때는 포션이 제한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제한 따위는 없었고, 레벨이 부족한 걸 포션으로 커버한 그는 포션이 부족한 게 새삼 아쉬웠다.
포션을 거의 마시지도 않았다. 안개 독에 걸려 폐가 망가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부 상처 위에 뿌려서 치료했다.
그런데도 부족했다. 특히 최상급 포션은 애초에 몇 개 없었는데, 이젠 열 개도 남지 않았다.
다행히 중급 포션이 많긴 했지만 워낙 악랄한 공격을 해 오는 몬스터들은 중급 포션으로도 상처를 금방 치유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이번 50층까지 올라오는 데는 포션 스무 개도 안 써서 이 정도였다.
“끝이 보이네.”
김진석이 곧바로 지옥에 갈 수 있는데, 인간들을 도와줄 수 있는데 시험의 탑에서 있는 이유는 바로 검은색 글씨 때문이었다.
- 시험의 탑을 클리어하라.
오랜만에 레벨 업이 아닌 다른 퀘스트였다. 검은색 글씨가 주는 퀘스트는 전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리스크는 크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
자기 점검을 마치고, 김진석은 숨을 깊게 마신 뒤 내뱉으며 눈앞에 생긴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음……?”
51층에 들어서니 처음으로 시야가 바뀌며 허공에 땅바닥만 둥둥 떠 있는 게 아닌, 다른 공간으로 들어섰다.
분명 김진석은 이곳이 처음 오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했다.
“영지군. 지옥의 한 영지.”
고위 악마들은 마족들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있다. 아니, 마족이 악마들과 같은 거겠지.
하지만 악마의 영지와 마족의 영지가 다른 점은 바로 몬스터의 유무다. 애초에 몬스터가 악마로부터 창조된 놈들이라 악마의 명령을 잘 따른다.
그래서 악마의 피를 짙게 받은 일부 마족은 자기보다 약한 몬스터들을 다루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김진석이 보고 있는 곳은 두 개의 마족 영지를 섞은 듯한 모습이었다.
“짐승의 도시와 죽은 자들의 성을 섞은 것 같군.”
죽은 자들의 성과 같이 실험체를 가두는 철창 같은 것이 있고, 실험대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짐승의 도시와 같이 전부 난잡하게 되어 있고, 멀쩡한 건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드물었다.
진짜 악마의 세계. 지옥이었다면 이곳엔 수많은 몬스터가 날뛰고 악마가 날아다니고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이곳은 시험의 탑이다.
그리고 김진석은 이곳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다.
“바포메트.”
“이런, 당신은 처음 보는군요.”
[바포메트. LV:99]
과거 김진석은 마족 바포메트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악마 바포메트는 놈과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51층의 보스, 바포메트. 놈은 미노타우로스와 비슷하게 생기고 칠흑같이 새까만 가죽과 털, 뿔이 위로 자라나 있고, 그 위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까진 마족 바포메트와 똑같았지만 다른 점은 훨씬 거대한 크기와 그 몸을 뒤덮을 만한 날개까지.
김진석이 알고 있는 악마 바포메트와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기계처럼 스킬을 사용하며 몬스터를 잡는 살상 기계와 같은 당신은 어디 가서 없고,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며 저희한테 말을 거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언뜻 8미터를 넘어가는 거인과 같은 모습의 바포메트였지만 놈의 음색과 말투는 마치 신사와 같았다.
비유로 한 말이었지만 살상 기계와 같다는 말은 정확했다. 어쩌면 기계 속에 있는 게임을 한 것이고, 기계처럼 몬스터를 잡았었으니깐.
“나도 직접 너희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겠군.”
“…역시 알고 계셨군요.”
김진석은 게임과 현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바포메트는 숨어서 그를 지켜본 것으로 오해했다.
물론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김진석도 바포메트, 비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너희는 왜 시험의 탑에 있는 거지? 갇혀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