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시험의 탑은 총 54층까지 있다. 그리고 5층마다 잡몹도 없이 오로지 강한 보스 몬스터 한 마리만이 나온다.
그리고 지금 김진석은 30층을 클리어했다.
눈앞에 계단이 나타났지만 김진석은 올라가지 않았다.
다행히 탑은 그를 몰아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계단이 나오면 바로 올라가야 하는 줄 알았다. 혹여나 계단이 사라진다면 그는 탑 속에서 갇힐 테니깐.
자발적으로 몰아쳐진 김진석은 지쳐 쓰러져 기절해 계단을 올라가지도 못할 상황에 다다랐다.
그런데 기절에서 깨어났는데 계단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그 덕분에 김진석은 영구적인 상처도 치유할 수 있었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부서지는 건 다반사였다. 언제는 공기에 스며드는 독을 사용해 폐가 망가졌는데, HP 회복 포션과 해독약과 같은 포션을 먹으며 버텨 냈다.
그의 몸에 기생충을 심었을 때도 있었는데, 눈치채지 못하고 다음 층으로 넘어갔다가 시간이 지나자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 직접 칼로 살을 째고 몸 안에 있는 기생충을 꺼낸 적도 있었다.
게임 속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원래 시험의 탑에서 나올 몬스터들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분명 10층까지는 김진석이 아는 몬스터들이 나왔는데, 그 이후부터는 생김새가 기괴한 온갖 몬스터부터 그들을 다루는 하위 악마까지.
하지만 김진석은 하위 악마를 붙잡아 알아낸 것이 있었다.
“고위 악마들이 나를 죽이려고 만들어 낸 실험체들이다, 라…….”
퍼즐이 하나둘 풀리고 있었다. 고위 악마, 비네와 같은 자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의 탑 1층에 연구소를 만들어 김진석을 분석하고 그를 죽일 몬스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부터 이어졌으면 아마도 그들은 김진석에게 수백 번은 넘게 죽은 악마들이다. 하지만 시험의 탑 특성상 다시 살아났을 테고, 기억은 계승된 것 같았다.
게임 속에서는 없었던 안개의 독도 그렇고, 기생충도 그렇다.
안개의 독은 속도와 호흡이 중요한 김진석의 메인 캐릭터인 카이를 견제한 것일 테고, 몸에 심는 기생충은 가장 몸을 거칠게 다루는 키잔을 견제한 것이겠지.
하지만 놈들도 제한이 있는 것 같았다.
결국엔 이곳도 악마들이 만들어 낸 공간이 아닌 시험의 탑이라는 곳이었으니, 시험의 탑의 룰을 벗어날 순 없겠지.
“하긴, 애초에 제한이 없었다면 지금 놈들이 들이닥치면 되니깐.”
김진석의 레벨은 지금 85. 80이 넘었을 때부터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지만 레벨이 점점 더 높아지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그를 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적어도 넷 이상이었다.
숫자도 정확했다. 50층을 넘어 51층 이상부터 1층마다 레이드 보스가 나온다. 시험의 탑 끝이 54층이니 총 네 마리의 보스가 나온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김진석을 지켜보는 시선의 숫자도 넷.
놈들이다. 레이드 보스 몬스터. 악마들이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들이 아는 김진석보다 훨씬 약해졌는데 뭐라고 생각할까. 또 다른 부캐릭터라고 생각할까? 이제 갓 탑을 오르는 캐릭터?
저들은 이곳이 게임 속이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온갖 생각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결과는 다른 게 없었다.
어차피 저들은 51층부터 나올 것이고, 한 놈씩 나오겠지. 김진석은 놈들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았다.
수백 번 김진석 자신에게 죽었겠지만 지금 그들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연구까지 해 가면서.
1년 9개월 동안 김진석은 1층에서 30층까지밖에 못 왔다. 그동안 죽음의 위기는 일상다반사처럼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비록 탑 속에서 죽인 몬스터들은 아이템과 금화를 떨어뜨리지 않지만 이미 금화와 포션은 넘치도록 있었다.
거의 절반 넘게 사용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나오는 몬스터들이 악랄하게 변하고 있었지만 점점 포션을 사용하는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껏 죽였던 몬스터들은 악마들이 김진석의 게임 속 캐릭터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몬스터다.
약하지만 더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닌 김진석이 당할 리 없었다. 당할 순 없었다.
80레벨을 달성했을 때부터 시선이 느껴졌다고 했지. 그때 검은색 글씨는 똑같이 보상을 주었지만 김진석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30층까지 죽음의 위기를 수십 번 겪으면서 올라오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김진석이 고작 30층까지 올라오는데 85까지 레벨 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단탈리온. 포기하고 다시 처음부터 올라가겠다.”
단탈리온과의 연결은 끊기지 않았다.
원래 게임 속 시험의 탑은 얼마든지 다시 나가서 처음부터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가서 악마의 세계, 지옥으로 갈 수 있었는데 김진석은 그러지 않았다. 무엇 하러 그러겠는가.
악마의 간섭은 있긴 하지만 얼마든지 레벨 업할 수 있는 곳인 시험의 탑이 있는데 굳이? 악마가 직접 간섭할 수 있는 지옥보다는 시험의 탑이 훨씬 좋았다.
그리고 단탈리온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악마들의 침공이 시작되진 않았죠?”
“네.”
이미 통수를 맞은 전적이 있지만 오해가 있었으니 김진석은 그냥 대놓고 악마의 침공이 있는지 물어봤다.
게이트의 너머에서, 단탈리온은 아직 아니라고 말했다.
김진석은 계획을 바꿨다. 무한한 성장이 가능한 이 탑에서 한계까지 레벨 업을 할 생각이었다.
시험의 탑에도 악마가 있긴 했지만 본래의 힘보다 약하게 나올 테니깐. 하지만 김진석은 슬슬 때가 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엔 시험의 탑을 클리어하거나 포기하겠습니다.”
“좋은 선택이야. 악마의 침공이 임박했습니다.”
사실 김진석은 이미 45층까지 깬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시험의 탑을 초기화가 가능한지 몰랐고, 울며 겨자 먹기로 올라간 것이다.
온몸이 망가지고 더는 위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김진석은 본능적으로 포기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 단탈리온이 나타나 그를 도와준 것이다.
지금껏 김진석은 언제나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를 죽이며 성장해 왔다. 효율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세계는 현실이었고, 레벨 낮은 몬스터를 수백, 수천 마리를 죽일 수 없는 곳이었으니.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악마의 실험체인지, 아니면 시험의 탑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몬스터가 계속해서 나왔다. 물론 악마들의 계략으로 절대 평범하지 않은 몬스터들이었지만 할 만했다.
그리고 여러 번 탑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해 보니 김진석은 깨달았다. 1층부터 30층까지가 효율이 좋고, 그 위로부터는 정말 악랄한 몬스터들이 나오는 것을.
아마 30층 이후부터는 시험의 탑의 제한이 많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안전하고 레벨 업도 잘되는 30층까지만 딱 돌고 초기화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악마의 침공이 임박했다. 1년하고도 9개월. 오로지 제대로 먹지도 않고 레벨 업에만 집중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지금 김진석이라면 한 달 동안 물도 안 마셔도 만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김진석은 게이트를 타고 시험의 탑 처음으로 돌아가기 전. 어디선가 보고 있을 악마들에게 말했다.
“기다려. 금방 죽이러 갈 테니깐.”
* * *
마족과 인간의 전쟁은 2년째 유지되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그 남자가 조심성이 많았나 봅니다.”
1년 9개월 동안 지지부진 했던 마족과의 전쟁이 3개월 만에 재개되었고, 인간들은 봇물 터지듯이 밀고 나갔다.
성주 격 마족이 나타나도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갔고, 3개월 만에 마계의 절반 이상을 인간들이 점령했다.
세라스는 그 결과를 보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고, 리차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했던 거에 비해 결과가 너무 잘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마족들은 오만했다. 정확히는 레벨이 높은 마족들이 오만했다.
협력이란 개념이 없는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세력을 꾸려 자신의 구역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끔 괴짜 마족만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어차피 기다리면 잡것들이 인간을 조공하니 굳이 그들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건 인간이 마계에 몰려들었을 때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들의 예상외로 인간들은 강했다.
그리고 지금, 기세가 오른 인간들은 한 구역에 도착했다.
“뭔가 이상한데…….”
“전원 정지.”
세라스의 말에 리차드는 바로 그의 용병단에 말했고, 용병단이 멈추니 인간들 전원이 멈췄다.
어느새 인간들의 중심이 된 리차드와 그의 용병단이었다.
이제는 가장 선두에 있던 리차드의 용병단이었지만 그들이 멈추자 가이크가 앞으로 나서며 세라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기가… 아예 안 느껴져.”
“그러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닙니까? 마족이 없다는 것 같은데, 도망친 건가…….”
세라스의 말에 리차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마족들이 드디어 인간을 무서워해서 도망간 건가 싶어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도망쳤다 하더라도 마기가 아예 안 느껴질 순 없어. 하지만 느껴지지 않아. 이 경우는 나와 같아. 일부러 숨긴 거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하늘을 보십시오!”
누군가의 말에 하나둘 하늘을 바라봤다.
검은 대지와 정반대로 푸르른 하늘이 있었다. 그런데 푸르른 그 하늘에 검은색 점이 하나 있었다.
그 점은 처음엔 하나였는데, 계속해서 늘어나 하늘을 뒤덮었다.
“전투 준비!”
그것들은 바로 마족이었다. 수많은, 날개가 달린 마족. 벌레와 같은 날개, 새와 같은 날개, 박쥐처럼 생긴 날개 등등.
모든 날개가 달린 마족이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엔 자그마치 여덟 쌍의 날개가 달린 하나의 마족이 날고 있었다.
[이프. LV:85]
창공의 이프. 하늘을 지배하는 마족이다. 마계의 이인자, 플뤼톤의 바로 아래 단계의 레벨인 이프는 마족에게도, 인간에게도 관심이 없는, 마족 중에서도 괴짜였다.
그는 마족과 인간의 전쟁이 벌어졌음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영역에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원래 세력도 만드는 걸 싫어하는 이프였지만 날개를 가진 마족들은 그를 동경하다시피 해서 이프를 따랐고, 알아서 세력이 만들어진 것이다.
날개의 길이만 6미터는 되어 보이는 이프는 여덟 쌍의, 전부 모양새가 다른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은 맹금류와 같았다. 얼굴을 제외한 몸은 평범한 인간 남성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뭐지?”
인간들은 이프를 보고 지금껏 보았던 마족과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프는 하늘에 뜬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맹금류의 얼굴이라 제대로 감정을 알 순 없었지만 지금 그는 처음 보는 존재에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실험이 성공한 것인가. 인간에게 저렇게 완벽히 마기가 정착하다니.”
이프가 말하고 있는 자는 바로 세라스였다. 그녀의 레벨도 3개월 동안 올라서 85로 이프와 같은 레벨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눈앞의 이프는 쉬이 볼 수 없었다.
“신기하군.”
맹금류의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프는 새를 좋아하는 자들이 보면 귀여워 보이겠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인간들에겐 아니었다.
가이크도 세라스조차도 공격하기가 꺼려지는 상대. 그게 이프였다.
마족들과 인간이 서로 바라만 보며 대치 상태일 때 이프가 말을 이었는데, 그 말은 한 인간, 아니 엘프가 간신히 달랜 마음에 불을 지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