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87화 (87/201)

87화

“대답해. 이게 뭔지.”

김진석은 비네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자 바로 강압적으로 나갔다. 정작 싸우면 본인이 지겠지만 지금 그녀는 모르니깐.

“당신을… 막기 위해서 악마들이 종합한 자료입니다.”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김진석은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이곳은 시험의 탑이다.

이미 죽었던 레이드 보스 몬스터도 나오는 곳이다. 물론 혼자서 잡는 것이기에 본래의 힘보단 약해져서 나온다.

그런데 플레이어들은 탑을 끝까지 올라 아이템을 전부 맞춰도 다시 돌아와 탑을 오르기도 한다.

이유는 하나. 랭킹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탑을 얼마나 빨리 올라가는지 시간을 잰다. 그리고 당연히도 김진석은 그 랭킹 안에 들어 있다.

소위 말하는 현질, 현금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컨트롤 하나로 극복해 랭킹 10위 안에 간신히 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비네가 말하고 있는 건 도대체 누굴까.

“내 이름이 뭐지?”

물어보면 됐다. 컴퓨터에는 마엔. 김진석이 키웠던 도적 캐릭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비네는 지금 김진석에게 도대체 누굴 투영해서 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이상했다.

“당신의 이름은 여러 개입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비네의 대답은 이상했지만 김진석은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캐릭터를 여러 개를 키운 만큼 탑도 여러 번 올랐다.

이름이 여러 개라는 것은 그걸 뜻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녀가 김진석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한, 내가 가장 잘 알 거라는 말.

김진석은 PVP를 즐겨 하긴 했지만 시험의 탑 같은 PVE 컨텐츠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템을 얻으러 시험의 탑을 전부 올랐을 때도 재밌어서 랭킹에 도전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으니깐.

PVP의 경험을 살려 상대의 체력을 계산해 스킬의 분배를 정확히 맞춰서 사용해 랭킹에 들었다.

물론 그게 단번에 되는 게 아닌 수십, 수백 번을 도전해 이룬 결과였다.

지금 이곳은 게임 속 시험의 탑이었다.

“그러면 지금 이곳은 몇 층이지?”

“…1층인데요?”

점점 비네도 눈앞의 김진석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김진석만큼은 아니었다.

“1층에 왜 네가 있지?”

1층엔 고작해야 잡몹 몇 마리 나오고 다 죽이면 보스 몬스터가 나오긴 하지만 원래 레이드 보스 몬스터인 비네가 나올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나온다면 이 탑의 난이도는 극악일 테니깐.

“…….”

김진석의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김진석은 그녀를 밀치고 그녀가 들어온 실험실의 방 밖으로 나갔다.

애초에 시험의 탑에는 이런 공간 따위는 없었다. 단탈리온의 게이트를 타고 이동해 오면 그저 밋밋하게 갇힌 공간 하나 나오고, 몬스터가 생성된다.

그리고 다 죽이면 앞에 계단이 나타나며 거길 올라가면 다음 층이다. 그런 곳에 이런 연구소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이게… 무슨?”

실험실의 문밖은 익숙한 그곳이었다. 시험의 탑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그곳. 원래 게임에서는 허공에 거대한 바닥이 떠 있는 듯한 곳이었다.

아무런 벽도 없이 뻥 뚫린 공간에 떡하니 바닥 하나만 있는 곳이다. 다른 곳을 바라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저 몬스터만을 잡는 공간.

“본 스피어.”

그때 비네가 뒤에서 스킬을 사용했다. 김진석은 급히 몸을 틀어 스킬을 피했지만 중심을 잃었고, 허공에 떠 있는 그 바닥으로 떨어졌다.

급히 몸을 일으켜 문이 있던 방향을 바라봤다.

“어……?”

그런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문과 함께 비네가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 그 방향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허공에서 빛이 나며 몬스터가 소환되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몬스터는 한 마리, 한 마리 김진석이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잡을 수 있는 괴물들이었다.

“하…….”

깊은 한숨과 동시에 김진석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 * *

인간과 마족의 전쟁이 시작된 지 1년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다.

고작 마족의 잡것들에게 2만의 군세를 잃었던 인간은 더는 없었다. 비록 거기서 3만의 군세를 더 잃어 이젠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인간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달랐다.

우선 그들의 평균 레벨이 10이 더 올랐다. 잃은 5만의 군세 중 대부분이 낮은 레벨의 인간인 것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군세 중에서도 가장 약했을 리차드와 그의 용병단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뒀다.

[리차드. LV:45]

1년 동안 자그마치 14레벨의 레벨 업을 거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신뢰를 얻었다.

가이크를 비롯한 알카와 다른 강자들까지 리차드의 의견을 들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 자신의 기사단과 마법사, 용병들도 자기들의 안위만을 생각하기 바빴다.

안 그래도 위협적인 마족들인데 상대에 대한 원한이 가득해서 복수하고 싶어도 자신이 죽으면 무용지물이었으니깐.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많은 인간이 죽어 나갔다.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개개인의 무력으로는 절대 마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협력해야 했다.

그동안 단 하나의 피해도 없는 리차드의 용병단에 그들은 조언을 구했다. 리차드는 단 일말의 사심도 없이 그들의 전력과 무기, 어떠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봤고, 그에 적합한 일을 맡겼다.

오히려 조언을 구한 이들이 왜 그런 걸 묻냐는 식으로 답하면서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장 먼저 나서서 조언을 구한 가이크와 알카가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하니 죽는 인간이 눈에 띄게 적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리차드는 점점 그들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희생을 줄인 일등 공신은 따로 있었다.

“세라스 님.”

“어, 꼬맹아. 왔니?”

세라스. 그녀가 성주 격 마족들을 맡아 주었고, 놈의 아랫놈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인간들은 성장해 왔다.

리차드도 지금 인간의 최고 전력이 세라스임을 알고 있었고, 그 또한 그녀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꼬맹이입니까?”

“그 남자에 비하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지.”

“…그 남자가 누군지 도대체 만나 보고 싶군요.”

세라스는 여전히 그 남자, 김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레벨은 84. 마족을 죽이지 않음에도 그녀는 마기를 먹고 성장하고 있었다.

“너희는 질리지도 않고 또 왔네.”

세라스의 말에 리차드는 뒤를 바라봤다. 그곳엔 한창 활약하고 있는 두 명의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노라 LV:59]

[다이아 LV:62]

노라는 얼굴에 더 많은 흉터가 생겼고, 다이아의 머리는 전처럼 윤기가 넘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들은 최강자의 자리에 올라서도 모자람이 없었다.

“…아직 연락이 없나요?”

둘은 세라스와 함께 김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말하지만 내게 묻지 마. 그 남자가 뭘 했다고 내게 일일이 보고하겠어? 그냥 알아서 어련히 돌아올 거야. 그니깐 좀 그만 물어봐!”

노라와 다이아는 정기적으로 세라스를 찾아와 김진석의 소재를 묻고 있었지만 세라스라고 알 턱이 없다.

둘도 그걸 알고 있었고, 혹시나 해 물어본 것이다. 노라와 다이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물음을 끝으로 그녀들은 돌아갔다.

리차드는 의자에 앉으며 노라와 다이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매력적이고 강인한 여성 두 분도 그 남자를 기다리는군요. 가이크 님도 그 남자를 알고 있던데… 도대체 뭐 하는 남자입니까?”

그의 물음에 세라스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음… 모르겠는데.”

“…예?”

그녀의 대답에 리차드는 황당했다. 1년하고도 반년 동안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뭐 하는 남자인지를 모른다니.

“몰라, 나도. 베일에 싸인 남자거든. 그 남자가 한 말에 거짓은 없었어. 모든 게 들어맞았지. 비명의 숲 너머에 마족이 살고 있다는 것부터 인간을 실험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까지. 게다가 방금 본 엘프 여자, 다이아 알지? 그녀의 친구가 실험체로 사용됐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어.”

김진석은 숨기려 했지만 마족과 전쟁을 벌이며 결국엔 성과 도시마저도 함락하는 인간들이었고, 그곳에는 수많은 자료가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의 오랜 인간 친구, 다나의 정보가 적혀 있는 서류도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는 김진석의 우려와 달리 곧바로 다나를 구하러 달려가지 않았다.

현실을, 자신의 주제를 파악한 것이다. 고작 이 정도론 그녀를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딱 하나, 그 자신에 대한 건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어. 자기 말로는 이곳, 마계의 실험체 중 하나였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그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어. 어쩌면 마계에 나랑 함께 석 달 동안 있을 때 자신의 자료를 없앤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왜?”

그녀의 말대로 왜일까. 리차드도 생각해 봤지만 그 어떤 결과도 도출해 낼 수 없었다.

“…믿을 만한 자입니까?”

“몰라. 지금 생각해 보면 마족과의 전쟁에서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인데 우연히 들어맞았을 수도 있겠지. 지금 봐. 1년 동안 안 보이잖아.”

당연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다이아의 친구 다나의 이름까지 맞췄으니깐.

“그런데 왜 더 진격하지 못하게 막는 겁니까?”

사실 인간의 군세는 지금 사기가 끝까지 올랐다. 실제로 세라스가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성주 격 마족도 보내 줬는데 희생도 거의 없이 수월하게 막아냈다.

리차드는 이 기세를 몰아 마계의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고 했지만 세라스가 막은 것이다. 바로 김진석의 말 때문에.

“적어도 그 남자의 말이 틀린 건 없었으니깐. 어쭙잖은 병력으로 마족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저 안에는 정말 괴물이 있다고. 김진석이 그렇게 말했으면 정말 괴물이 살고 있겠지.”

“…가이크 님도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말입니까?”

가이크. 지금 그는 웬만한 성주 격 마족을 혼자서 잡을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언제나 선봉에 서서 가장 많은 마족을 죽인 그의 레벨, 79.

“안 되겠지.”

“…그러면!”

하지만 세라스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리차드는 보기 드물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흥분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러면 저희는 그 남자의 말만 따라 버티고만 있어야 합니까? 기회가 있는데도?!”

리차드는 답답했다. 인류 최강의 전력인 세라스가 마족과의 전쟁에 소극적으로 나가고 있는 게 답답했다.

물론 그녀가 인간들을 성장시켜 주는 것은 감사했고, 본인도 그 혜택을 받았지만 1년도 넘게 같은 일의 반복이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마족을 정말 끊임없이 죽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인간들은 지쳐 가고 있었다.

“…3개월. 3개월 동안 소식이 더 없으면 그땐 나도 전력으로 나설게.”

“감사합니다.”

리차드는 그녀의 확답을 듣고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족의 성과 도시를 점거한 이상 인간의 병력은 나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선가 인간과 마족의 전쟁은 지속되고 있을 것이다. 리차드는 용병단을 이끌고 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하…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진짜 도망간 거 아니지?”

그렇게 3개월 후. 김진석은 나타나지 않았고, 인간은 멈췄던 진격을 다시 시작했다.

* * *

“후.”

1년하고 9개월. 2년 가까이 탑에 갇혀 있는 김진석은 탑을 오르면서도 단 한 번도 죽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막 30층을 간신히 깰 수 있었다.

[김진석. LV:85]

지금 그의 레벨은 85. 이젠 정말 괴물이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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