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김진석은 그림자 밟기의 사용을 끊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채로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오두막에 들어갔을 때도, 단탈리온을 만났을 때도 멈추지 않았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김진석을 알아차렸다.
그림자 밟기는 원래 사용자인 카이가 사용했을 땐 레이드 보스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전부 통했다.
하지만 김진석이 사용할 때 들키는 이유는 아마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키잔과의 동기화율 40%]
[카이와의 동기화율 40%]
레벨이 70임에도 아직도 40퍼센트였다. 분명 전보다 레벨을 많이 올렸지만 고작 40퍼센트였다. 어떻게 보면 높은 수치지만 부족했다.
30퍼센트가 넘어가고 난 이후로 거의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게이트 속으로 들어가고 10분이 지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 김진석은 그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것밖에 할 게 없었기에.
그렇게 10분,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제야 김진석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단탈리온이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게이트를 사용하는 게 이번이 두 번째이긴 했지만 처음은 강제였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저 가만히만 있었다.
몸은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칠흑 같은 어둠이 전부였다. 김진석은 에라 모르겠다, 그냥 한 방향으로만 계속 걸었다.
계속 걷다 보면 끝에 다다르겠지 싶어 걸었는데,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혔다.
텅.
쇠에 부딪힌 소리. 아프진 않았다. 초인이 되어 버린 김진석의 몸은 고작 쇠에 부딪혔다고 아프거나 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 쇠라니. 단탈리온을 통해 악마의 세계, 지옥에 도착했는데?
김진석은 조심스럽게 쇠로 보이는 물체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쇠로 된 벽이었다.
“…횃불 같은 걸 들고 다녔어야 했나.”
지금 그의 인벤토리에는 온갖 잡다한 아이템들이 가득했지만 불을 밝히는 도구 같은 건 없었다.
칠흑 속에 오랫동안 있었는데도 눈은 적응하지 못했고,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초인이나 다름없는 김진석이 그렇다는 건 뭐가 있다는 거다.
“스킬이 있긴 한데…….”
빛을 밝히는 스킬이 있긴 하다. 문제는 그건 잠깐이고, 이 공간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만 있을 순 없는 노릇.
“폭발 덫.”
폭발을 일으키는 스킬. 결국엔 폭발도 불이니 아주 잠깐이나마 주변을 밝혀 줄 것이다. 폭발의 크기를 줄일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쩔 수 없다.
김진석은 폭발 덫을 설치하고 그 위로 인벤토리에서 쓸모없는 잡템을 하나 꺼내서 던졌다.
펑!
다행히 자주 사용하는 스킬이 아니라 스킬의 레벨이 높지 않았다. 폭발이 일자 땅이 흔들리며 주변을 밝혔다.
아니, 분명 밝혔어야 했다.
폭발이 일었는데도 칠흑 같은 어둠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로 알아낸 것이 있었다.
“…땅도 쇠다.”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쇠로 된 무언가에 빛도 안 들어올 만큼 갇혀 있다는 거다.
김진석은 쇠로 된 벽으로 추정되는 것에서 살짝 멀어진 다음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냈다.
[녹슨 날개. 공격력 81. 레벨 제한 81]
성주 격 마족을 잡고 얻은 활, 녹슨 날개. 왜 이런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과 같이 활의 양쪽 끝에는 날개 같은 게 달려 있는데, 정말 녹슨 것처럼 갈색이었다.
하지만 활이 녹슨 건 아니었고, 레벨 제한이 81인 만큼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했다.
“관통 샷.”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쏜살같이 날아가 쇠로 된 벽에 조그마한 구멍을 냈다.
그와 동시에 조그마한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빛이 밖에서 들어왔다.
빛을 발견했지만 고작 손가락만 한 구멍으로는 턱도 없었다.
카이의 스킬을 사용하면 충분한 구멍을 뚫을 수 있겠지만 쿨타임이 길고 강한 스킬을 벌써 사용한다면 밖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데 대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김진석은 녹슨 활을 집어넣고 츠바이핸더를 꺼냈다. 수많은 마족과 몬스터를 잡았지만 아쉽게도 츠바이핸더를 뛰어넘는 대검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대검은 많이 얻었으니, 단단해 보이는 이 벽을 부수다가 츠바이핸더가 부서진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흡!”
김진석은 기합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츠바이핸더를 휘둘렀다. 후폭풍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회복될 테니깐.
그런데 그 쇠의 벽은 두부 자르듯 너무 쉽게 잘려 나갔고, 너무 힘을 준 김진석은 살짝 휘청거렸다.
사실 김진석은 몰랐겠지만 쇠로 된 벽에 적용되어 있던 마법적 장치가 처음 쏘아 낸 관통 샷에 부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각막으로 들어왔지만 김진석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어?”
그곳엔 흰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멍하니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의 옷 등 뒤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조그마한 날개가 있다는 점이다.
같은 마기를 다루지만 마족과 악마가 다르다는 걸 구분할 수 있는 명백한 차이점은 바로 날개다.
날개가 있는 마족도 있지만 짐승 형태의 모습인 상태에서 날개가 있지, 눈앞의 남자처럼 완벽한 인간의 모습인데도 날개가 있진 않았다.
즉, 눈앞의 남자는 악마다.
“일제 사격.”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쏘아 내는 스킬. 전에는 세 발밖에 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두 배인 여섯 발을 쏘아 냈다.
여섯 발의 화살은 눈앞의 날개 달린 악마의 사지와 배 쪽을 향해 날아갔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그 악마는 날개로 화살을 막아냈다.
하지만 튕겨 내진 못하고 화살이 날개에 박혔다.
“크악!”
고통이 큰지 비명을 질렀지만 그제야 상황 판단이 선 것이지 곧바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김진석은 곧바로 그 악마를 쫓았다.
악마가 달려간 곳에는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버튼이 있었고, 악마는 그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쉐도우 트랩.”
어쩔 수 없이 김진석은 카이의 스킬, 궁극기를 사용했고 악마의 손은 버튼의 코앞에서 그림자에 묶여 버렸다.
“[email protected]#$.”
쉐도우 트랩에 잡힌 악마는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림자에 묶여 잘 들리지 않았다. 한시름 놓은 김진석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또 실험실인가.”
유독 이 세계에 와서 실험실을 자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김진석이었다.
악마가 있던 곳은 실험실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과 차별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완벽한 현대 시설이었다.
현미경부터 시작해서 이상한 물체가 담겨 있는 유리병과 스포이트, 그리고 익숙한 컴퓨터까지.
다행히 잡은 악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김진석은 우선 자신이 갇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쇠로 된 박스에 다가갔다.
그 앞에는 웬 금화가 떨어져 있었다. 아마 관통 샷을 사용했을 때 들려온, 숨을 삼키는 소리에 빗대어 보면 운 없게 그 화살을 맞고 죽은 것이겠지.
그런데 이 박스는 왜 있던 것일까. 그리고 단탈리온은 왜 이곳으로 그를 보냈을까. 아니, 어떻게 보면 이 박스 안이 제일 안전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게임의 지식이 있다고 한들 악마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으니. 게다가 실험실 같은 연구소가 테마인 레이드 보스도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곳이었다.
우선 김진석은 2년 동안 보지 못했지만 익숙한 컴퓨터를 확인했다. 그런데 익숙한 단어도 볼 수 있었다.
“마엔……?”
마엔. 김진석이 로스트 월드에서 키웠던 캐릭터의 이름이다. 레벨이 높은 단검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캐릭터이다.
도적.
김진석은 의문과 혼란을 품에 안고 컴퓨터의 글씨를 마저 읽어 내렸다.
“비교적 쉬웠다고?”
그때 실험실의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큰 소리가 나던데, 무슨 일이지?”
하지만 김진석의 관심은 오로지 컴퓨터 속 글씨로 가득했다.
“두 개의 단검을 다룬다. 강하긴 하지만 원거리 저격에 약하다. 다른 자보다 훨씬 상대하기 쉽다…….”
도적의 특징이었다. 원거리 공격에 약하긴 했지만 붙으면 원거리 캐릭터들은 꼼짝도 못한다. 그래서 원거리 저격으로 적은 거겠지.
두 개의 단검은 도적의 특징이다. 하지만 다른 자보다 비교적 상대하기 쉽다는 무슨 뜻이지?
그때 실험실의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그리고 한 악마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악마는 김진석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악마였다.
[비네. LV:99]
세라스. 그녀의 원래 이름인 비네.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이게… 무슨?”
“…넌?”
김진석도, 눈앞의 악마 비네도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 찼다. 하지만 비네의 레벨은 99. 지금 김진석이 절대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곧바로 뒤로 돌아 실험실의 벽을 부수고 나가려고 했다. 벽을 부수니 건물 안이 아닌 밖이 나왔고, 그대로 뛰어들어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투명 벽에 막혀서 다시 튕겨 나왔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요.”
비네의 말을 듣고 김진석은 곧바로 일어나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았는데, 비네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은 체념이 가득했다.
“…무슨 뜻이죠.”
김진석은 우선 그녀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물었고, 비네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 탑의 꼭대기로 가는 것만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탑?”
뜬금없이 탑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잠깐만. 탑……? 시험의 탑?”
생각나는 게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는 시험의 탑이란 시스템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단탈리온을 통해 입장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몬스터와 마지막에 나오는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1층 클리어다.
한 층을 클리어할 때마다 보상을 주는데, 그걸 모아서 단탈리온에게 가져다주면 직업 장비, 아이템으로 바꿔 준다.
맨 처음 김진석이 카이와 동기화했을 때 손에 든 무기, 고요한 카인의 활도 이곳에서 얻는 것이다.
즉, 최종 컨텐츠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단탈리온에게 악마가 있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했지…….”
그곳이 악마의 세계인 지옥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단탈리온이라면 알고 있겠지, 라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을 뿐.
당연히 시험의 탑에는 악마도 나오니 이곳도 악마가 나오는 곳은 맞다.
“내가 부족하다는 말이 그 뜻이었군.”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컨텐츠로 레벨 99인 플레이어들이 도전하는 곳이었으니깐.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앞의 악마, 비네. 세라스와 똑같은 생김새였지만 악마 같은 날개만 달려 있을 뿐인 악마 비네는 김진석에게 적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쭈뼛쭈뼛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 알고 계십니까?”
“알 수밖에 없죠. 당신을 모르는 악마는 없습니다.”
“……?”
악마가 자신을 모를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비네의 모습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김진석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
김진석의 말에 비네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김진석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