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 *
“너희는 안 가?”
“…아직 저희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세라스는 성벽 위에 서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아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라와 다이아는 세라스의 옆에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는… 어디 갔죠?”
“사실 나도 몰라. 이 전쟁이 벌어진 근본을 없애러 간다고 했는데 그게 뭔데, 도대체. 도망칠 핑계를 대고 도망친 것일 수도 있겠지.”
물론 노라와 다이아도, 그리고 세라스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다. 김진석이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걸. 근본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걸 해결하러 갔다고 했으면 갔을 것이다.
“그를 돕고 싶다면, 우선 강해져. 그가 먼저 너희에게 도움을 요청할 만큼. 돕고 말고를 그때 가서 정해.”
그 말을 끝으로 세라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라와 다이아도 세라스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곧바로 인간과 마족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세라스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김진석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가 가려는 곳은 플레이어만이 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현실인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혼자서 인간에게 호의적인 악마, 단탈리온에게 향한 것이다.
* * *
지금 김진석은 마계에 끝에 다다랐다. 게임 속에선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곳. 이름은 없었지만 게임 로스트 월드를 하는 플레이어가 지어 준 이름, 지평선이다.
석 달 동안 몬스터와 성주 격 마족을 잡으면서 단탈리온을 찾았지만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딱 하나, 가 보지 않은 곳을 찾으면 되겠지.
그곳이 바로 지평선이다. 하지만 김진석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다. 지평선은 스토리를 다 깨고도 레벨 99가 되지 못한 플레이어들을 위한 곳이다.
즉, 지평선은 높은 레벨의 몬스터들이 득시글한 곳이다. 최소 90레벨 이상의 몬스터들이 말이다.
마족들조차도 들어오지 않는 지평선. 이곳에 단탈리온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몬스터들이 나를 감지할 텐데…….”
그림자 밟기를 사용한다고 한들 90레벨이 넘는 괴물 같은 몬스터들을 피해 지평선을 뒤지긴 쉽지 않았다.
주변만 둘러봐도 그렇다. 처음에 보았던 드레이크나 키메라 등등은 잡몹이나 다름없었다.
[블러드 골렘. LV:90]
[탄탄. LV:90]
[케르베로스. LV:92]
…등등 평생 보지도 못할 괴물들이 득시글거렸다. 하지만 그나마 지금 김진석이 조심히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는 놈들끼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워낙 레벨이 높은 터라 싸움이 쉽게 끝이 나진 않고 있었고, 김진석은 조심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무모하고 할 만해 보이더라도 저 싸움에 끼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모든 힘을 다 쓰면 한 마리 또는 두 마리는 잡을 수 있겠지만 그런 몬스터들이 너무나 많았다.
“괜히 왔나? 단탈리온이 여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김진석은 후회하고 있었다. 마계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기에는 시간도 부족했으니 혹시 빼먹은 곳에, 하필 그곳에 단탈리온이 있는 거 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해졌다.
2시간을 넘게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른 채 들키지 않게 조심히 지평선을 걷는데 심신미약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평선이란 말답게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 대지만이 있으니 엄폐물도 없이 오로지 스킬과 자신의 감에 의존해 있다 보니 점점 지쳐 갔다.
그런데 그때, 평범히 걷고 있던 와중에 뭔가 구름 같은 걸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김진석이 보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음?”
분명 삭막한 검은 대지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갑자기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변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숲에는 아무런 생명체도 없는 것 같았다.
김진석은 게임 로스트 월드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런 숲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지평선에서 숲이라니, 말도 안 된다.
혹시 몰라 스킬 그림자 밟기를 그대로 On인 상태로 두고 천천히 걸어갔는데, 멀리서 건축물 같은 게 보였다.
다가가 보니 그건 나무로 된 오두막이었다. 조촐하게 몇 평 안 되어 보이는 그 오두막은 이 숲만큼이나 기이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김진석은 조심히 오두막의 나무로 된 문을 열었다.
끼익.
조용한 이곳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는 김진석의 심장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 채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정말 평범하게 거실이 있었고, 주방 같아 보이는 곳도 있었고, 침실로 보이는 곳도 있었다.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 이런 이벤트는 없었기에 김진석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거실의 방향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김진석은 그 방향으로 돌아보니 어느새 거실에는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무색, 무취의 아무 특징도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니,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얼굴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에서 할아버지, 잘생긴 남자에서 할머니, 아이까지 계속해서 바뀌었다.
계속해서 바뀌는 얼굴 속에서 김진석은 현대에서 보았던 얼굴이 잠깐 보였다. 그에 김진석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단탈리온.”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인가.”
단탈리온, 그는 이미 김진석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악마라고 소개됐다.
자애로운 악마로 인간은 물론이고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중히 여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 어떤 상황이나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악마였다.
[단탈리온. LV:99]
인간의 세계. 마계에 있다곤 하지만 그의 힘은 전혀 준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말한 다른 세계, 즉 현대를 알고 있다는 건 김진석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물론 그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혹시 제 질문을 알고 계십니까?”
“게이트를 열어 달란 거겠지. 당연히 알고 있어요.”
말하고 있음에도 단탈리온의 말투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게이트, 어떻게 보면 김진석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이유.
“악마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원래 단탈리온은 일반 스토리에 나오는 악마가 아니다. 스토리가 전부 끝나고 본격적으로 악마 레이드가 패치될 때.
비네와 같은 특수한 악마가 아닌 경우 대부분 레이드는 단탈리온이 열어 주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게 된다.
이 전쟁이 벌어진 근본. 김진석은 악마를 죽이기 위해 단탈리온을 찾아온 것이다.
“그대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래도 할 건가요?”
“예, 부족한 건 그곳에서 채울 수 있을 테니깐요.”
모든 레이드 몬스터를 잡기 전에 일반 잡몹을 먼저 잡는다. 게임 속에선 단탈리온이 바로 그 레이드 몬스터에게 직접 게이트로 데려다준다.
하지만 현실인 지금 악마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생태계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하위 악마, 마족보다도 약한 놈들을 잡으면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겠지.
물론 문제가 있다. 게임 속에선 그저 NPC였기에 플레이어를 도와줬다. 그런데 과연 아무 조건도 없이 단탈리온이 김진석을 도와줄 이유가 있을까.
만약 단탈리온이 김진석을 죽일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게임 속에선 한낱 레이드 몬스터에게 보내 주는 NPC였을 뿐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단탈리온의 레벨은 99.
죽여야 할 악마의 레벨과 똑같았다.
최고 레벨이 99이기에 같은 99레벨이라 하더라도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한들 70레벨인 김진석에겐 99레벨은 형용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괴물이다.
김진석은 그저 단탈리온이 인간에게 호의적인 설정이라는 그거 하나만을 믿고 도박성 수를 둔 것이다.
어차피 김진석이 마족과 인간의 전쟁에 참여한다고 하더라고 크게 변하는 건 없다. 설령 도와줘서 이기더라도 악마가 침공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김진석을 제외한 인간들이 그들을 죽이며 성장해야 했고, 그래야 후에 있을 악마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겠지.
김진석도 악마의 세계, 지옥에 간다고 한들 모든 악마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하나라도 죽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
그래도 해 봐야 한다. 해 봐야 했다.
“그대의 선택을 존중할게요. 게이트를 열겠다.”
단탈리온이 말하자마자 곧바로 김진석의 눈앞에 게이트가 생겨났다. 붉은색으로 일렁거리는 게이트.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진석은 게이트로 들어가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게임 속 세계, 로스트 월드에 들어오면서 가장 궁금했던 걸 단탈리온에게 물었다.
“제가 이전에 있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때가 되면 알아서 알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단탈리온이 말을 하는 걸 망설였다. 그는 방법이 없다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즉, 있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진석은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 시험의 탑 】
“…피해가 큽니다.”
첫 번째 마족과 인간의 전쟁은 인간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10만의 군세 중 적어도 2만 이상이 죽은 것이다.
가이크를 비롯한 남은 인간들은 착잡한 기분으로 동료인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고작 마족의 잡것들에게 이렇게 죽으면 실망인데?”
그때 세라스가 그들의 앞에 서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성주 격 마족은 아직 그들에게 과분하다고 판단해 세라스 그녀가 먼저 나서서 막아냈다. 죽이진 않았다. 지금 그녀에겐 성장은 필요 없었으니.
세라스와 친분이 있는 알카가 나서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
“말을 조심하시는 게…….”
“그래도 전력은 줄지 않았어. 어떻게 보면 더 늘어났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세라스의 이어진 말을 듣고 있던 알카와 가이크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죽었는데 전력이 늘었다니.
세라스는 말없이 시선을 옮겼고, 그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엔 리차드와 그의 용병단이 있었다.
잡것들이라곤 하지만 마족과의 전쟁에서 그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리차드의 명령을 따라 느리게, 하지만 차근차근 마족들을 죽였다.
그 결과, 그들 대부분이 레벨 업을 했다. 용병단의 평균 레벨이 대폭 상승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인간이 죽었지만 그만큼 레벨 업을 했다. 2만의 인간을 희생해 8만의 인간이 레벨 업을 한 것이다.
“너희의 과제는 간단해. 죽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 성장할 수 있어. 전쟁에 패배하더라도 상관없지. 죽지만 않는다면. 희생을 줄여. 그리고 성장해. 그게 너희의 몫이야.”
세라스는 그들에게 충고하고 난 뒤 다시 자신의 성인 죽은 자들의 성으로 돌아갔다. 비록 마족과 인간의 전쟁에 성벽 곳곳이 파괴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간 기사 중 가장 강한 기사 가이크와 인간 마법사 중 가장 강한 알카는 세라스의 말을 생각했다.
희생을 줄이고 성장해라. 간단한 말이지만 가장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기사와 마법사의 수장 격인 그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그 둘의 근처엔 그걸 누구보다도 완벽히 해결한 자가 있었다. 그들은 설령 자신들보다 약하더라도 배울 게 있다면 얼마든지 저자세로 나갈 수 있었다.
둘은 조언을 얻기 위해 리차드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