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저자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겁니다.”
게임 속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가이크가 리차드를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워 인간들을 단합시키고 전쟁을 했다.
아무리 왕을 그리워하는 자가 거의 없다고 한들 왕은 어쩌면 지금의 인간들에겐 필요한 존재였으니깐.
지금 인간들이 믿을 건 오로지 자신의 무력뿐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받쳐 줄 왕이란 존재가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게다가 가이크도 리차드를 허수아비로 내세웠지만 리차드는 허수아비로 남지 않았다.
선대 왕은 선왕이라고 해도 무방할 인물이었다.
정말 그의 핏줄이 이어져 있는지, 리차드는 가이크를 비롯한 모든 인간이 헤매고 있을 때 해결책을 내주며 점점 그의 신임을 얻었고, 종국에는 정말 왕으로 추대받는다.
레벨이 낮아도, 나이가 적어도 상관없었다. 리차드는 마족과의 전쟁에서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 이상으로 큰 공적을 세운다.
물론 진짜 인간의 왕이 되진 못했다. 마족을 전부 몰아냈을 때는 인간은 왕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깐. 하지만 그를 따르는 용병과 기사, 마법사 등이 생겨나며 그는 최종적으로 용병의 왕이 된다.
각 성과 도시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플레이어가 없었다면 아마 이 세계의 주인공은 리차드였겠지.
“저 남자? 음… 꽤 생겼네. 내 스타일은 아니야.”
세라스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거라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외모만 평가하고 있었다.
김진석의 뜬금없는 말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닌 세라스였고, 그저 맞겠거니 하며 리차드를 바라봤다.
“…어? 쟤 걔 닮았네. 사자왕 리차드. 기사 중의 기사였는데… 아! 그가 누구냐면…….”
“알고 있습니다.”
선대 왕의 이름이다. 사자왕 리차드.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 악마들을 죽이고 죽은. 왕이면서도 기사인 자였다.
10만의 인간 군세. 그들은 전부 비장한 표정으로 비명의 숲을 넘어 마계로 건너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기가 들끓고 있었다.
“…옵니다.”
마계, 마족의 군대. 고작 몇천의 군세가 전부이겠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괴물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레벨 높은 마족을 김진석이 죽여서 저 정도였다.
“그래서, 어쩔 거야?”
하지만 김진석은 물론이고 세라스도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플뤼톤과 같은 레벨 높은 마족은 아직 보이지도 않았으니.
고작 이 정도는 세라스에게 시간만 준다면 혼자서도 막을 수준이었다.
“이 전쟁이 벌어진 근본을 없애러 갑니다.”
“…엉?”
아무리 세라스라도 이번 김진석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진석은 인간에게 호의적인 마족을 찾아야 했다. 아니, 그는 마족이 아니었다.
단탈리온. 그는 인간에게 호의적인 악마였다.
* * *
“전투 준비.”
“전투를 준비하라!”
가이크가 말하는 것과 거의 똑같이 리차드가 외쳤다. 가이크는 흥미 깊은 눈으로 리차드를 바라봤다. 적어도 외모만 왕을 닮은 쭉정이는 아닌 것 같았다.
눈앞의 죽은 자들의 성에는 우선은 아군인 마기를 다루는 자가 있다고 이미 말을 해 뒀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건, 죽은 자들의 성 뒤로 몰려오는 마기를 느꼈다는 거다.
물론 엄청난 마기가 몰려오고 있어서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잔뜩 긴장한 채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데도 리차드는 그렇게 외쳤다.
리차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가이크가 자신을 왕의 핏줄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순진하게 믿진 않았다.
자신이 허수아비 왕이란 걸. 그리고 인간의 10만 군세도 자기를 따르는 것이 아닌 가이크를 믿기에 따라온 것이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리차드는 그렇게 외쳤다.
“책임감인가…….”
“…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십시오. 지금 당신은 왕입니다.”
“아! 알겠… 알았다.”
용병도 마계와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그런 용병이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용병을 따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리차드가 이끄는 용병단. 무엇이 용병들이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리차드를 따르게 한 것일까.
“세라스 님.”
“가이크.”
10만을 전부 수용하기에는 아무리 마계에서 가장 큰 죽은 자들의 성이라도 무리였다. 애초에 숫자가 적은 마족들은 가장 큰 죽은 자들의 성이라고 한들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성인 말리 성보다도 작았다.
“…저게 마족의 군대입니까?”
“아니, 저건 그냥 너희들에게 이끌려온 마족의 무리일 뿐이야.”
사실이었다. 강한 마족들은 김진석이 대부분 죽였다고 한들 저 마족의 군세 안에는 흔히 네임드라고 불리는 마족이 없었다.
그렇다고 수천의 마족 군세는 무시할 순 없었다.
“좋은 기회야. 너희가 나서.”
“…예?”
세라스는 김진석의 뜻을 알고 있다. 인간들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희생이 없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희생을 최소화해야겠지.
지금 눈앞의 마족들은 세라스의 말처럼 그저 인간의 기운에 이끌려온 잡것들이다. 레벨이 높아 봤자 기껏해야 60레벨 언저리.
물론 최소가 45레벨은 넘으니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10만의 군세이지만 30레벨 수준이 80퍼센트는 차지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다른 말로는 성장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고작 저 정도 가지고 주춤거리면 아무것도 못해. 마족을 죽여. 그리고 강해져. 그게 그가 원하는 거니깐.”
“지금 그는 어딨죠?”
세라스는 가이크를 따라 죽은 자들의 성에 들어온, 얼굴에 커다란 자상의 흉터가 있는 적발의 여성과 은발의 엘프 여성을 바라봤다.
“너희가… 노라와 다이아라고 했었지.”
김진석의 교사이며 동료였던 그녀들. 노라와 다이아는 세라스를 바라봤다.
둘이, 김진석이 실망했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바로 비참함이었다.
1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던 둘은 반성했다. 정작 둘은 김진석을 몰아치면서 레벨 업을 시켰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레벨이 더 높은 몬스터를 잡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김진석은 자신들을 버리고 눈앞의 여성, 과거 악마의 습격을 겪고 버틴 세라스를 선택한 것 같았다. 레벨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높은 그녀를 말이다.
둘은 가이크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몬스터를 잡기 시작했다. 그 탓에 온몸에 상처가 생기고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둘은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김진석이 이곳에 있었다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노라. LV:50]
[다이아. LV:52]
고작 석 달 만에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이다. 그들의 변화를 알아차린 세라스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직 둘은 부족했다.
“너희들, 아니 우리들의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인간의 기운에 이끌려 온 마족의 잡것들은 죽은 자들의 성에 다가왔다. 분명 인간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해골들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뭔가 이상했지만 원래의 성주인 애드몬드가 워낙 괴팍한 성격이라 무서워 들어가진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돌고 있었다.
온갖 인간처럼, 하지만 기괴하게 생긴 마족들이 죽은 자들의 성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가 모든 걸 해결해 줄 때까지 나약한 그대로 남아서 죽을 것인가.”
그때 멀리서 마기가 느껴졌다. 분명 성 근처에 마족들이 몰려 있는데도 멀리서 느껴진다는 건, 최소 성주 격 마족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마족을 죽이고 성장해 전쟁에 이길 것인가. 선택지는 너희의 몫이야. 특히 선대의 왕을 닮은 너, 그 정도 무력으로는 99퍼센트 확률로 죽을 거야.”
허수아비 왕인 리차드는 가이크를 따라 이곳에 왔지만 발언권 따위는 없었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리차드는 세라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세라스는 그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리차드는 마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그를 지키는 용병단은 마기를 느끼지 못하였는데 리차드가 느꼈다.
“…감이 뛰어난 꼬맹이네.”
“저희 인간은, 최소 우리 용병단은 이겨 낼 것입니다.”
세라스는 그런 리차드를 흥미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 엘프들이 나타났고, 녹발의 장발인 엘프 남성이 앞으로 나서며 세라스에게 말했다.
“세라스 님, 강한 마족이 오고 있습니다.”
“저도 알아요. 이들도 알 겁니다.”
엘우드의 엘프들, 그들은 김진석의 말을 따라 죽은 자들의 성으로 다가오는 마족을 일일이 보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도 김진석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김진석의 은신 능력을 따라가지 못했기에 방해가 된다는 걸 이미 알았기에 그의 말을 따랐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인간들이여!”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가이크는 성 아래에 있는 마족이 외친 건 줄 알고 배틀 엑스를 급히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건 리차드였다.
“눈앞의 마족이 있는데 무얼 망설이는가?! 그대들의 동료, 친구, 연인과 가족을 죽인 마족이 있는데 무얼 망설이는가!”
어느새 리차드는 성벽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전력이 모인 이곳에서 고작 31레벨의 허수아비 왕의 말을 들을 자는 없었다.
그런데도 리차드는 성벽 위에 서서 인간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사실 틀렸다.
인간들은 지금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반대편에 모여 있는 마기를 못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성문이 열리고 마족이 보인다면 곧바로 달려들 기세였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수아비 왕이 아닌 다른 이를.
그걸 알고 있음에도 가이크는 목에 핏줄을 세워 가며 인간들에게 말하고 있는 리차드를 보고 피식 웃으며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만약 이곳에 가이크의 성격을 알고 있는 자가 있었다면 놀랐을 거다. 그 가이크가 웃음이라니. 그건 비웃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리차드가 돌발 행동을 했다. 갑자기 성벽 반대편으로 뛰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엔 마족들이 있었다.
가이크와 세라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알아차렸다.
“선대랑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비슷한가 본데? 말보단 행동이네.”
“…성문을 부숴도 됩니까?”
“어차피 내 거 아니야.”
가이크는 급히 인간이 모인 성문의 앞으로 달려갔다. 성이 꽤 컸기에 성문도 꽤나 컸다. 그걸 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이미 손에 든 배틀 엑스를 휘둘러 성문을 박살 내 버렸다. 애드몬드가 죽은 이후 마법적 장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일 약한 이가 가장 선두에 서는 건 기사의 불명예가 아닌가!”
로스트 월드는 중세 시대 배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가 있었고, 기사도를 중히 여기는 기사들도 있었다.
약한 이를 지키고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기사. 기사도, 가이크는 그걸 말하고 있었다.
성문이 부서지고 인간의 군세가 가장 먼저 본 건 성벽을 열고 있는 리차드의 모습이었다.
리차드는 가장 먼저 누가 행동에 나서면 그제야 따라나서는 인간의 군중심리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리차드와 그의 용병단 수준은 마족들에게 1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선 것이다.
엘리온은 그 상황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지팡이를 하늘로 들며 외쳤다. 어쩌면 장난스럽게, 어쩌면 과거를 회상하며.
“새로운 왕을 위하여!”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메테오가 떨어졌다. 엘리온의 궁극기였다. 성벽이 열림과 동시에 마족은 인간을 발견했고, 리차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위로 메테오가 떨어졌다.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음. 누가 봐도 리차드를 희생양으로 쓴 듯한 메테오였다. 하지만 흙먼지가 걷히고 보이는 건 황금색 보호막 안에서 멀쩡히 서 있는 리차드와 그의 용병단이었다.
“새로운 왕을 위하여!”
엘리온보다 조금 더 굵직한 목소리, 레온하르트였다. 그의 궁극기인 철벽으로 리차드와 용병단을 지킨 것이다.
순식간에 메테오에 휘말려 죽어 버린 선두의 마족들을 보고 마족의 군세는 주춤거렸다. 그 틈을 타 가이크는 마족들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우리의 왕을 위하여!”
“새로운 우리의 왕을 위하여!”
그에 동조한 몇몇이 외치며 그 뒤를 따랐다. 동조하지 못한 이들이 더욱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의 마족이 있었으니.
“마족을 섬멸하라!”
그렇게 인간과 마족의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