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광기의 스킬은 과연 대단했다. 레벨 차이가 20 가까이 나는 루터마저도 도륙 냈으니.
하지만 죽이지 못했다. 사지가 잘리지만 않으면 엄청난 속도로 재생하는 루터는 온몸에 자상이 남은 채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기어이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김진석을 죽였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목숨 1/3]
최초 플레이어에 한해 그 자리에서 되살아나는, 과거 사산에서 겪었던 죽음과 살아난 걸 다시 한번 겪은 것이다.
김진석은 루터의 발톱에 찢어발겨졌다. 그때의 고통은 아직도 생생했다. 고통에 익숙한 김진석이라도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났다. 온몸이 다시 붙은, 멀쩡한 채로.
루터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못했고, 결국 김진석에게 살해당했다.
그 이후로 광기를 죽기 직전이 아닌 이상 절대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거나.
그런데 왜 또 김진석은 플뤼톤에 앞에 있을까. 간단했다. 실패하더라도 도망칠 수 있으니깐.
“쉐도우 트랩.”
플뤼톤의 호위 기사가 달려드는 순간 스킬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땅에서 솟아 놈들의 온몸을 옭아매었다.
늑대 인간의 왕이었던 가룰조차도 단번에 죽인 쉐도우 트랩이었지만 호위 기사들의 발을 묶는 것에 멈췄다.
플뤼톤의 스킬이었다. 플뤼톤에게도 쉐도우 트랩이 적용되었지만 뭔가에 막힌 것처럼 그림자가 놈의 발 주위를 맴돌았다.
김진석은 그때를 노려 그림자에 숨어 도망가려 했는데, 정확히 그의 발밑에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내가 감지한 이상 더는 숨을 수 없다.”
플뤼톤은 정확히 그림자 속에 숨은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호위 기사도 쉐도우 트랩에서 벗어나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플뤼톤에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큽.”
그때 플뤼톤에 입에서 녹색 피가 흘렀다.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지만 기어이 흘러나온 것이다.
[이름 없는 독.
온갖 독이 모이고 섞여 만들어진 독. 짐승의 도시의 왕, 루터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독이다.]
게임 속에선 그냥 잡템 중 하나이다. 짐승의 도시가 왕조차도 독살할 수준인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걸 알려 주는 아이템이었다.
이 아이템이 진짜 루터를 독살할 수준의 아이템인진 모르겠지만 일반 독이 아닌 아이템으로 적용되는 걸 보면 절대 평범한 독은 아니라는 거다.
처음 플뤼톤에게 급습을 사용할 때 단검에 미리 발라두었다. 사실 김진석은 레벨이 70이 되면서 검은색 글씨를 통해 광기를 제외한 다른, 플뤼톤을 죽일 수단을 이미 얻은 상태였다.
하필 알 수 없는 독이 광기를 사용한 이후에 발견된 거라 루터에게도 통할지, 안 통할지도 모르는 독이어서 플뤼톤에게 통한다는 보장은 없었으니 그 수단만을 믿고 플뤼톤에게 찾아온 것이다.
독이 통한 지금 그걸 사용한다면 플뤼톤을 더더욱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러지 않았다.
발밑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불기둥을 제치고, 김진석은 불기둥으로 인해 사라진 잿더미 벽을 통해 바깥을 바라봤다.
멀리서 엄청난 마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몬.”
실제로 보니 플뤼톤은 비교하지도 못할 마기였다. 스토리상 최종 보스 아몬. 김진석마저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정녕 레벨이 90이 맞는가. 고작해야 플뤼톤과 레벨이 별로 차이도 나지 않는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다시 오지.”
“…그때는 네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김진석은 유유히 화산을 빠져나갔다.
* * *
“…왔어?”
“예.”
[세라스. LV:84]
김진석은 죽은 자들의 성에 도착했다. 세라스도 고작 석 달 사이에 레벨 업을 해 그녀의 레벨은 84이었다.
세라스를 잠시 바라본 김진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은 자들의 성은 이름 그대로 죽은 자들의 성이 되었다.
세라스의 아이들, 해골들이 성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애드몬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해골들이 절대 평범치 않았다. 제일 레벨이 낮은 해골이 50. 게다가 리치까지 있었다.
1인 군단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보다 심심했어. 마족들이 거의 안 오더라. 괜히 지켰어. 그냥 따라다닐걸.”
김진석이 성주 격 마족들을 계속해서 죽여 흉흉해진 탓에 비명의 숲에 원혼이 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이란 것까지 알았으니 고작해야 인간 하나에게 휘둘리는 마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김진석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플뤼톤이나 루터급 강자가 아니면 김진석의 그림자 밟기를 알아차리긴 어려웠다. 플뤼톤마저도 한 번 당하고서야 알았으니.
물론 세라스가 따라다녔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알아, 나도 알아. 딴지 걸 생각하지 마.”
“…….”
1년 동안 같이 지내니 김진석의 성격을 대부분 꿰찬 그녀였다. 처음에는 김진석을 깍듯이 대하더니 요즘엔 편해졌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무력을 아는 건지 이제는 편해진 세라스였다.
애초에 손자뻘 수준이었으니 김진석도 딱히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플뤼톤인가 뭔가 하는 마족은 죽였어?”
“…아뇨, 실패했습니다.”
원래 김진석은 죽은 자들의 성에 들를 생각이 없었다. 추적이 있을까 싶어 성이나 도시에서 빠져나올 때 죽은 자들의 성이 있는 방향으로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루터를 상대하고 죽음을 경험했을 때. 김진석은 잠시 죽은 자들의 성에 돌아와 하루, 딱 하루만 휴식 시간을 가졌다.
머리를 식힐 때였다. 자신의 몸에 박힌 자신감과 방심. 어쩌면 이 자신감과 방심이 목숨이 남아 있다는 거에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한참을 자책했다. 기고만장해서 노라와 다이아를 비롯한 공격대와 다른 인간들에게 왜 레벨 업을 하지 않냐고, 강해지지 않는 거냐고 뭐라 했었다.
정작 자신도 지금의 레벨이 될 때까지 두 번이나 죽었으면서 말이다.
처음 보는 김진석의 모습에 세라스는 그가 걱정돼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그때 김진석은 자신의 멍청함과 이후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물론 자신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빼고.
“솔직히 말리고 싶었어. 나도 이 성에 남아 있는 서류를 전부 뒤지면서 알아봤는데 플뤼톤이란 마족, 괴물이야. 솔직히 말해서 인간의 전력이 온다고 한들 그자 하나를 이길 수 있을까.”
세라스의 걱정은 타당했다. 인간의 전력이 모인다고 해도 화산 하나 헤쳐 나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플뤼톤 하나만이라면 어찌어찌 희생이 있어도 죽일 수 있겠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다. 고작해야 호위 기사가 인간 최고 전력인 가이크에 준했으니.
김진석이 숨어들어서 그렇지, 화산에는 수많은 마법사 마족이 가득했다. 리치와 같은 특수한 마족은 죽은 자들의 성에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마법사 마족은 화산에 있었다.
“당신 말대로 마족 몇 마리는 좀 흘렸어. 그쪽에서 마족이 발견돼야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잖아. 잘 먹힌 것 같네.”
자신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세라스에게 일부러 마족 중 약한 놈을 추슬러서 몇 마리 흘리라고 했고, 그녀는 그걸 정확히 들어주었다.
김진석은 생각보다 인간의 전력이 빠르게 모인다고 생각했다. 히포그리프 기사를 통해 지금 인간의 모든 전력이 고작 석 달 만에 이곳에 모이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깐.
그래서 플뤼톤을 급히 죽이러 가 본 것이지만 예상치 못한 아몬의 등장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김진석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 분명한데 왜 전쟁을 말리지 않고 오히려 장려했을까.
사실 그들은 미끼였다.
어차피 지금 김진석과 세라스가 없었다면 마족들은 비명의 숲을 넘어 인간 세계를 침공했을 것이다.
그럴 바에 인간의 전력을 모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김진석은 예상보다 훨씬 강한 마족들, 플뤼톤과 루터, 그리고 아몬을 보고 목표를 바꿨다.
인간들이 미끼인 건 똑같았지만 그를 도와줄 인물, 마족을 찾아야 했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그 마족을.
플뤼톤을 죽일 뻔하긴 했지만 마법사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번 들켰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 있을 만한 천금 같은 기회는 더는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독도 이젠 없었고, 다시 구하려고 짐승의 도시로 간다고 한들 경비가 삼엄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몬까지 나선 이상 더는 전처럼 마족의 성과 도시를 집 드나들 듯이 다닐 순 없을 것이다.
분명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플뤼톤을 기습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몬은 정확히 김진석을 찾아냈다.
아몬이 김진석을 노리고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본인 구역에서 나오지 않는 아몬이 화산까지 올 이유가 없었으니 김진석을 찾아온 게 확실했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쟤네 데리고 전쟁할 거야?”
세라스가 턱짓하며 가리킨 곳에는 비명의 숲을 막 건너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인간의 군세였다.
김진석의 말을 들은 것인지 대충 보기만 해도 엄청난 군세였다. 최소 레벨이 30으로 구성된, 그나마 정예로 된 군세.
노라와 다이아를 비롯한 공격대에 참가하지 않았던, 레온하르트와 다른 여러 중요 NPC들이 보였다.
마족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숫자로 보면 열 배는 족히 넘을 것이다. 적어도 10만의 군세. 강한 마족이라도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바퀴벌레 한 마리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10만 마리가 나오면 도망치기 마련이다.
사실 인간의 군세가 이렇게 모이는 게 자충수가 될 수도 있었다. 악마의 침공이 시작되면 여러 곳에 게이트가 열려 몬스터와 악마들이 뛰쳐나오는데, 인간의 군세가 이렇게 한군데에 모이면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각자 퍼져 있어도 대처가 불가능 한 건 똑같았다. 사실 김진석은 포기한 것이다. 레벨을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과 레벨이 낮은 인물들을 말이다.
허나 이들이 마족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고 레벨 업을 해 각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면, 그리고 악마의 침공이 시작된다면, 훨씬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뇨, 전쟁은 제 몫이 아닙니다.”
김진석은 인간의 군세의 선봉에 서서 당당히 걸어오고 있는 거구의 기사, 가이크를 바라봤다.
[가이크. LV:74]
레벨 업을 했다. 석 달 동안 그에게도 마음의 변화가 있던 거겠지. 레벨 높은 몬스터는 김진석 본인이 대부분 죽였는데 어떻게 레벨 업을 했는지 궁금했다.
“전 인간을 다루는 방법 따위는 모릅니다. 상대를 죽이는 방법만 알 뿐. 이 전쟁은 저자에게 맡기면 됩니다.”
가이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바로 뒤에서, 하지만 가이크에 꿀리지 않은 존재감을 내세우며 말을 타고 가는 자가 있었다.
[리차드. LV:31]
고작해야 레벨 31의 금발의 남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긴장해 입을 꽉 다문 그의 외모는 여러 여자를 울릴 법했다.
로스트 월드에도 왕은 존재했다. 하지만 악마의 침공으로 인해 왕은 물론이고 그 핏줄까지 전부 몰살당했다.
인간들은 왕이란 존재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고, 굳이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왕을 따르는 자들은 악마의 침공에서 전부 최전방에 서서 죽었으니 왕을 그리워하는 자도 거의 없었으니깐.
그런데 선대 왕과 똑 닮은 자가 용병으로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그가 진짜 핏줄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10만의 군세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각자 자신이 속한 성과 도시를 두고 온 것이다.
그들이 단합하려면 가이크 하나로는 부족했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걸 가이크는 눈앞의 리차드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과 비슷한, 아니 똑같은 생김새. 게다가 아직 레벨은 낮지만 그는 자신의 용병단도 있었다.
일말의 범죄도 일으키지 않고 몬스터만을 잡으며 체계적으로 생활하는, 듣도 보도 못한 용병단. 리차드보다도 레벨이 높은 용병도 있지만 리차드의 말이라면 죽음이라도 불사할 용병단이다.
그는 스킬이 아닌, 말 그대로 사람을 홀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