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82화 (82/201)

82화

* * *

가이크와 공격대는 가이크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각자 머무르고 있던 성으로 돌아가 전력을 모아 오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마족들을 죽이는 건 좋지만 최소한의 전력을 성에 남기고 가는 건 이상합니다. 한낱 범죄자의 말을 믿을 순 없습니다. 혹여나 최소한의 전력을 남기고 떠났다가 범죄자들이 습격하면 어떡합니까? 이게 전부 그들의 계략이라면?”

그 의견도 타당했다. 결국은 아디스에 떨어진 범죄자의 말이었다. 엘프들이 따르기까지 하는 이상한 범죄자이긴 했지만 어쨌든 범죄자.

그런 와중에 가이크는 이상함을 느꼈다.

“예? 마족이 온 적은 없습니다만.”

분명 흘려보낸 마족이 있었는데 가이크 성에 도착하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서든 뭘 하든 가이크 성을 넘어갈 방법은 없었다.

비명의 숲을 지나오면서도 마족은 없었다. 그러면 흘려보낸 마족은 어디로 갔을까.

“흠… 우선 알겠네.”

가이크 성은 문제가 없었다. 가이크의 무력에 매료되다시피 한 그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사지(死地)라도 웃으면서 뛰어들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가이크에게 있었다.

언제나 앞장서서 몬스터를 죽이고 행동한 가이크였지만 비명의 숲에서, 그리고 마족의 성, 죽은 자들의 성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무력했다.

“그래서… 언제 가면 됩니까?”

“인간의 모든 전력이 이곳에 모일 때. 그때 전쟁이 시작되겠지.”

가이크는 자신의 성, 성벽 위에 서서 비명의 숲 방향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가이크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은 의아했다.

“인간이 많이 모이는 곳에 마족도 모인다고 했는데, 그러면 전쟁은 이곳에서 시작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 마족이 우리에게 오려면 무조건 그 성 근처를 지나갈 거다.”

부기사단장은 그게 이해가 안 갔다.

“정말 범죄자 남자와 여자, 그 둘이 마족을 막아 낼 수 있는 거 맞습니까? 심지어 그 남자는 마족으로 의심되는 자였고, 여성은 마기까지 가지고 있었죠. 그들을 믿는 게 맞습니까?”

부기사단장은 근본적인 걸 물었다. 둘이 막을 수 있는지가 아닌, 그들이 믿을 만한 자인지. 가이크도 그 말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그들은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히포그리프 기사단, 더는 원혼이 없으니 비명의 숲을 감시해라. 히포그리프 기사단장, 자네는 최대한 깊숙이 들어가 그 남자가 있는 성을 확인해. 들키든 말든 상관없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비명의 숲은 더는 비명의 숲이 아니었으니 히포그리프 기사단은 얼마든지 활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석 달. 인간의 모든 전력이 모이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 * *

“그런데 당신, 그 작자들이 언제 올 줄 알고 여기에 있겠다는 거야?”

인간들이 김진석을 못 믿는 만큼 김진석도 그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들에겐 결국 자신은 한낱 범죄자 중 하나였으니깐.

“설령 안 오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쪽이 있으니까요.”

세라스보고 남으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중 가장 강하기도 했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거다.

레벨 82가 된 그녀는 설령 이 성의 주인이었던 학장 애드몬드가 살아 돌아와도 지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말이다.

“엘프분들에게 미리 말해 놨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 성을 지켜 주십시오.”

“…그럼 당신은?”

“아직 부족한 레벨을 올려야죠.”

마족과 전쟁이 시작된다면 분명 아몬이 등장할 것이다. 레벨 90의, 현재 이 세계의 최강자. 고작 레벨 60에 불과한 김진석은 미개한 수준이었다.

“만약 제가 이 성을 포기한다면요?”

“어쩔 수 없죠. 그만한 강자가 나타났다면 도망치셔도 좋습니다.”

“그게 아니라… 하…….”

세라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왜 김진석의 말을 따라 이곳을 지켜야 하는가였다.

하지만 김진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란 걸. 지옥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힘까지 준 김진석 자신을 배신할 수도 없고, 그녀가 그런 성격도 아니란 걸 말이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요?”

“제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여기까지 내다보겠습니까.”

세라스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김진석도 몰랐다. 고작해야 애드몬드의 두골을 줬을 뿐인데 레벨이 급격히 올랐다.

“할 수 있는 모든 건 사용해야죠. 당신에게도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마기가 가득한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르기만 해도 그녀는 레벨 업을 할지도 모른다.

그 어떤 마족도 가만히 있어서 강해지진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마기만 충분하면 강해졌다. 마치 악마처럼.

“음… 뭐, 알겠어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하지만 외모로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녀 둘에게 왜 그리 차갑게 대한 거예요? 그건 답을 안 해 주셨는데.”

세라스는 집요했다.

“그 아이 둘도 파릇파릇한 게 젊고 아름답던데… 설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김진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들에게 실망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성장을 제가 막은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더군요.”

노라는 게임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아는 게임 속에서도 꽤 유명한 NPC였다.

다이아의 게임 속 최종 레벨은 70. 그녀의 오빠인 엘리온과 레온하르트마저도 한참 뛰어넘은 레벨이다.

MMORPG 게임 특성상 여성 플레이어보다 남성 플레이어가 훨씬 많았기에 시커먼 남성 NPC보단 아름다운 여성 NPC가 더 홍보에 도움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레벨은 고작해야 50. 1년 동안 성장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기사 학교에서만 일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들 김진석은 이해가 안 갔다.

노라도 고작해야 레벨 1업을 더 했을 뿐, 그 이상은 없었다. 그녀는 게임 속에서도 없었던 NPC라 최고 레벨은 모르겠지만 마찬가지였다.

김진석은 그녀들에게 실망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 때문에 일어난 나비 효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있어선 안 될 인물이 이곳에 있으니 나비 효과가 어떤 방향이든 작용은 했을 테니깐. 그렇다고 한들 그녀들이 지금 약하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이번 전쟁에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녀들은 죽을 겁니다.”

“흐음… 당신의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녀들이 그걸 원하는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아남는 게 우선입니다.”

김진석은 세라스를 통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 말을 끝으로 김진석은 죽은 자들의 성에서 떠났다. 마족들의 세계인 이곳에서 마치 근처 들짐승 잡으러 가는 듯한 그의 뒷모습을 세라스는 빤히 쳐다봤다.

* * *

“죽여!”

김진석은 레벨이 높은 성주 격인 마족만을 암살하고 다녔다. 물론 레벨이 부족한 김진석이 그들을 한 번에 암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서 기습했지만 단번에 죽지 않은 성주 마족은 자신의 호위 기사 격 마족들을 불렀다.

“…쿨럭.”

하지만 죽지 않았다고 피해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피를 토하고 있지만 재빨리 수습하며 호위 기사 마족의 뒤로 물러났다.

급습. 대상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공격력이 증가하는 급습은 암살하기에 매우 적합한 스킬이었다.

“인간… 짐승의 도시의 성주를 죽인 놈이 너겠군.”

성주만을 암살한 김진석은 이미 마계 전부에 널리 퍼졌다. 그런데 암살했는데 어떻게 김진석이 죽인 걸 알았을까.

그건 간단했다. 말만 암살이지 김진석은 자신을 발견한 존재가 있다면 전부 죽여 버린 것이다.

마계의 도시 중 하나인 짐승의 도시.

그곳은 마족 중에서도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끝판왕에 속하는 도시다. 그래서 짐승의 도시.

김진석은 짐승의 도시를 포함한 여러 성주 격 마족을 죽였고 지금 이곳, 화산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현실의 폼페이를 참고해 만든 듯한 화산은 잿더미로 가득한 건축물이 대부분이었다. 진짜 용암이 분출되는 화산이 없는데도 이런 건축물이 만들어진 이유.

그건 눈앞의 마족 때문이다.

[플뤼톤. LV:86]

불을 다루는 악마 플뤼톤. 김진석은 가장 먼저 죽이고 싶었지만 워낙 경비가 삼엄하고 본인 또한 무력이 뛰어나 미뤘다.

마치 미노타우로스처럼 거대한 몸과 염소처럼 얼굴 위로 난 뿔. 바포메트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놈은 마법사란 거다.

아무리 마족이라도 마법사는 몸이 약하다, 라는 법칙은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진석은 사실 플뤼톤이 단번에 죽을 줄 알았지만 죽지 않았고 호위 기사까지 부른 것이다.

물론 그는 상관치 않았다.

죽은 자들의 성에서 나와 석 달이 지난 지금. 마계의 도시와 성에서 수많은 마족을 죽인 김진석의 레벨은 이렇다.

[김진석. LV:71]

고작 석 달 만에 71.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레벨 업이 하기 힘들어지는 건 당연했는데, 김진석에겐 적용되는 것 같지 않았다.

마계에도 마찬가지로 몬스터가 존재했다. 김진석은 마족을 죽이기 전에 먼저 레벨 업을 강행했다.

몬스터를 잡는 마족도 같이 죽였다. 물론 이름 하나하나 전부 확인해서 말이다.

마계에도 인간을 좋아하는 마족이 딱 한 명 있었다. 늑대 인간 샤칸처럼 동정이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마족은 숨어 살았고, 몬스터를 잡는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지만 혹시 몰랐으니 김진석은 마족을 죽일 때마다 전부 이름을 확인해 봤다.

그 마족의 비밀을 알고 있는 김진석은 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더는 미룰 수 없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인간들에게 큰 피해를 줄 마족들을 우선시해 먼저 찾아 죽여 나갔다.

짐승의 도시, 타락의 도시, 기이의 성 등등. 수많은 마족을 죽였고, 이내 아몬을 제외하고 가장 레벨이 높은 눈앞의 플뤼톤까지 다다른 것이다.

문제는 호위 기사 격 마족들의 레벨도 심상치 않다는 거다.

[LV:71]

[LV:74]

[LV:72]

하나하나가 가이크에 준하는, 혹은 뛰어넘는 레벨의 호위 기사들이 전부 열셋. 아무리 김진석이라도 쉽지 않았다.

“함부로 광기를 쓰기도 이젠 두려운데 말이지…….”

“사로잡아라. 하지만 무시하지 마라. 짐승의 왕을 죽인 자다.”

플뤼톤을 단번에 죽이지 못한 건 큰 실수였다. 호위 기사를 앞에 두고 놈은 온갖 스킬을 사용해 몸에 둘렀다.

게다가 광기. 그 스킬은 매우 위험했다. 짐승의 도시에서 김진석은 광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레벨 67 때 짐승의 도시에 도착한 김진석은 성주 격 마족, 루터를 죽이기 위해 찾아갔다. 루터의 레벨은 84. 고작해야 플뤼톤하고 두 계단밖에 차이 나지 않는 마족이었다.

거기서 김진석은 죽을 뻔했다. 플뤼톤과 달리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싸우는 루터는 김진석을 압도했다.

너무 방심한 것이다. 게임 속에서도 레벨 67 때 84 몬스터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앞의 마족들은 그림자 속에 숨어 기습하는 김진석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기에 생긴 방심이었다.

마치 호랑이가 인간이 된 듯한 모습의 루터는 그림자 속에서 스킬 급습을 사용하는 김진석을 감지했다.

순식간에 역공을 당한 김진석은 그대로 압도당해 죽음의 문턱 앞에 섰다.

그때 울며 겨자 먹기로 스킬 광기를 사용했다. 고작해야 1분의 지속 시간인 광기. 하지만 그 1분이 끝나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김진석은 엄청난 탈력감을 느꼈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고, 광기의 스킬 지속 시간 동안 루터는 기어이 살아남고 말았다. 놈도 몸이 멀쩡하진 않았지만 김진석과 달리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김진석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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