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 *
김진석은 가이크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 혼자 갈 줄 알았는데 뒤에는 세라스를 비롯해 수많은 범죄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왜 따라오는 겁니까? 다가라 씨도 그렇고…….”
“은인이 가는데 저희도 따라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밀론의 작품이었다. 물론 밀론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범죄자라고 한들 미심쩍은 비명의 숲을 공략할 방법을 찾았다는 말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김진석을 따른 범죄자 중에 김진석의 덕을 받지 않은 자는 없었다.
모든 아디스에 들어온 범죄자는 아디스를 지킬 의무를 받는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아디스를 제외하곤 살 공간 따위는 없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엔 범죄자는 범죄자. 그들은 밀론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합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밀론의 귀에 들어가 먼저 척살당한다. 그렇게 아디스는 균형 아닌 균형이 강제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그 의무와 균형을 김진석이 박살 내 버렸다.
수많은 몬스터를 죽이고 그 누구보다도 강해진 김진석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디스의 균형을 깨트린 것이다.
아디스에는 두 개의 파벌이 생겼다. 범죄자의 대부인 밀론을 섬기는 자와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김진석을 따르는 자.
김진석을 따르면 콩고물이 떨어질까, 어디든 따라가려 하는 자들이었지만 김진석은 몬스터를 잡을 때 누가 붙으면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
어차피 대부분 죽어도 싼 중범죄자 놈들이었으니 김진석 자신에게 거슬리면 곧바로 죽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범죄자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숭배하다시피 했다. 김진석은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범죄자들은 죽긴 싫었으니깐 그저 눈치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아디스를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세라스가 따라가도 된다는 확답까지 받았고, 합법적으로 아디스 밖 양지로 나갈 수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여차하면 도망칠 수도 있으니 김진석을 따르는 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죄다 따라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걸 두고 볼 밀론이 아니었으니,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다가라와 범죄자들을 붙여 준 것이다.
지금 김진석 옆에는 그를 따르는 자들과 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수장 세라스와 섬기는 자들의 대장 다가라. 이렇게 두 개의 파벌이 있었다.
“은인은 개뿔. 도망칠 생각 가득하더구만.”
다가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김진석을 따라 나와 상황을 보다가 바로 도망친 범죄자가 있었다. 물론 김진석은 그저 그를 쳐다만 봤고, 이후에 놈이 가지고 있던 금화와 아이템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흑호의 작품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범죄자들은 무슨 수법, 수단인지 몰라 김진석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증폭되었다.
“…저희의 충심을 무시하지 마십쇼! 누님! 저자를 내버려 둘 겁니까?”
따르는 자가 말한 누님, 세라스는 나이만 먹을 뿐 그 힘이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잠식되고 있는지 그녀의 몸에는 마기가 한가득이었다.
세라스도 자기가 왜 누님이 됐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본인의 힘이 다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너보다 저자가 더 그에게 도움이 될 거니 그만 꺼져라.”
물론 그렇다고 세라스가 한낱 범죄자한테 잘 대해 줄 이유는 없었다. 자발적으로 아디스에 들어온 그녀였으니깐.
다가라와 김진석을 따르는 자, 세라스는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김진석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오랜만의 가이크 성이군요.”
“…와 본 적이 있으시군요?”
다가라는 가이크 성에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김진석도 마찬가지로 가이크 성을 바라봤다.
별 감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감흥이 새로웠다. 1년 반 만에, 처음 왔을 때보다 과장 없이 수백 배는 강해져서 돌아왔다.
그때 본 광경과 지금 보는 광경은 달랐다. 그땐 기사들이 마치 괴물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그 괴물이 돼 버렸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야, 이 개자식아!”
그 익숙한 목소리와 욕을 듣고 김진석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도 그녀의 옆에 한 은발의 엘프 여성까지 보였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은인의 일행이 노라와 엘리온 님의 아름다운 여동생일 줄은 몰랐습니다.”
노라와 다이아. 1년 만에 보는 그녀들이었다.
* * *
“이제 다 모였으니 브리핑하겠네.”
가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다렌을 불렀다. 김진석은 주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다렌을 쳐다보았다.
김진석은 딱히 변장도 하지 않고 그저 이름만 달라졌으니 둘은 김진석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둘만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가이크가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모든 시선이 김진석을 비롯한 범죄자들에게 꽂혀 있었다.
물론 범죄자들의 가장 선두에서 걸어오고 누가 봐도 중심인 김진석에게 많은 시선이 모였다.
그렇지만 김진석은 물론이고 범죄자들도 이런 시선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 중에는 범죄자랑 엮여 있는 인물도 있을 거다.
하지만 아디스의 범죄자들이랑 엮이면 좋을 것도 없으니 그저 주변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범죄자의 수장은 대부가 아니었나? 저리 젊다고는 못 들었는데…….”
“다가라가 있는 걸 보면… 죽였나?”
“조용.”
수군거리는 소리는 바로 가이크의 조용한 경고에 곧바로 멈췄다. 그리고 그에 맞춰 다렌은 헛기침하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비명의 숲을 건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비명의 숲의 원혼을 성불시켜 주는 것.”
다렌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뭔가 거창하고 그런 건 없었다. 가이크는 그런 고지식한 다렌을 보며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비명의 숲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은 다 알고 있겠지. 그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 근처로 순찰을 자주 다니던 여기 다렌과 찰스 기사가 귀신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지. 그리고 내가 직접 비명의 숲까지 가서 확인했다. 귀신과 대화를 할 수 있더군. 귀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면 그 귀신은 성불해 사라진다. 내가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명의 숲에서 1시간은 있었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사실이다.”
다렌과 찰스의 말을 믿고 가이크가 몸소 나서서 비명의 숲까지 가 확인한 것이다. 그 말이 사실임이 알고 있는 김진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 가이크의 레벨이라면 비명의 숲을 멀쩡하진 않겠지만 건널 수 있다.
레벨이 깡패인 이 세계에선 원혼들도 가이크를 함부로 할 순 없었기에. 물론 원혼을 성불시켜 준다면 1시간 정도는 멀쩡할지 모른다.
하지만 금방 다른 원혼이 자기도 성불시켜 달라고 붙으면 말짱 꽝이다. 그게 1시간일지, 30분일지, 1분일지는 아무도 결국엔 아무도 모른다.
가이크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고 있지 않았기에 김진석은 손을 들었다.
다렌이 그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가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하게.”
“그러면 여기 있는 전부가 원혼을 성불시켜 줘야 한다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래서 레벨이 높은 자들만 우선 소수 정예로 부르려고 했는데…….”
가이크의 눈은 김진석의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범죄자가 몰려 있었다. 당연히 레벨 그딴 것도 상관 않고 그냥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희망에 따라나선 범죄자가 대다수였다.
김진석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고기 방패로 쓰시죠.”
“…동료 아닌가?”
“범죄자들에게 동료 의식을 기대하지 마세요.”
김진석은 겉으로 보기엔 같은 범죄자. 그것도 수장으로 보였다. 물론 실제로 범죄자로 처리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때 노라가 그에게 외쳤다.
“야……! 그… 이름이 뭐야?”
노라는 김진석이 새로운 신분증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김진석의 이름을 물었다.
“키잔입니다.”
“키잔… 정말 좋아하네.”
김진석은 신분증을 노라에게 주었고, 노라는 신분증을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벨… 40?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말에 김진석은 한숨을 쉬었다. 가이크 성에 몰래 참가해 그냥 일개 원정대원으로 있으려고 했는데 세라스 때문에 모든 게 망쳐졌다.
김진석은 구석에 박혀 뭔가 감상에 빠져 가이크 성을 구경하고 있는 세라스를 괜히 힐끗 쳐다봤다.
“아디스에 있는 범죄잔데 위조했을 게 뻔하지. 뭐… 됐고. 노라라고 했나. 저자에게 무슨 볼일이지?”
노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범죄자들은 뭘 얻기 위해 이곳에 온 거… 겁니까?”
자연스럽게 김진석에게 말하려던 걸 고치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 듯 기사와 마법사들은 혐오스러운 눈으로 범죄자들을 바라봤다.
아디스까지 떨어진 범죄자들은 기사와 마법사가 꽤나 많았고, 아디스에서 제일 강한 다가라부터가 기사였으니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서 범죄자가 된 그들을 혐오했다.
김진석은 원하는 게 따로 있었지만 범죄자들은 잘 몰랐다. 공문에 뭐가 적혀 있는지도 몰랐으니깐.
그런데 김진석이 아닌 가이크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내가 그들에게 전했다. 참가자의 범죄 기록을 없애 주겠다고.”
그 폭탄과도 같은 말에 주변 기사와 마법사들이 들고일어날 기세였다.
“그게 무슨……!”
“가이크 님! 말도 안 되는……!”
“하지만!”
하지만. 가이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명의 숲에서 일어난 일은 책임지지 않겠다고 전했다.”
그 말에 주변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가이크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비명의 숲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에게는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런데 범죄자들한테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즉, 그 말은 비명의 숲에서 일어난 일은 암묵적으로 묵인하겠다는 뜻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말이다.
김진석은 주변에서 살기가 일어나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피부가 저릿저릿한 게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엔 기사와 마법사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한탕 하려는 용병들도 꽤나 많았다.
범죄자들의 수장인 김진석에게도 살기가 오는 걸 보면 그들은 범죄자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목을 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김진석은 이런 살기가 익숙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찾아와.”
아니, 환영이었다. 김진석의 선전 포고는 불난 집에 불 지피는 것이었다. 그는 다가라를 비롯한 범죄자들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밀론이 살리기 위해 아디스로 향했고, 범죄자들을 구해 냈다만 어차피 범죄자. 그들을 희생해 비명의 숲을 지금 인원이 온전히 넘어가면 그걸로 그들은 의무를 다한 것이다.
아직 아디스에는 범죄자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라스. 그녀만 지켜 낸다면 아무 상관 없었다.
어쩌면 게임 속 세계관의 최강자 중 하나가 될 인물이었으니.
나이에 맞지 않게 천진난만하게 가이크 성을 둘러보는 세라스를 김진석은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다렌이 세라스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가이크가 지켜보는 이 와중에도 등에 멘 거대한 대검을 뽑아 순식간에 달려갔다.
[다렌. LV:61]
그의 레벨은 61. 게다가 신체 능력이 뛰어난 엘프답게 엄청난 속도로 세라스에게 달려갔다. 이곳에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면 다렌이 달려가는 것에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진석은 아니었다.
어느새 세라스의 앞에 선 김진석은 다가오는 다렌의 대검을 츠바이핸더로 쳐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