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 *
“하… 또라이 새끼.”
노라는 격분했다. 그녀가 욕하는 걸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다이아조차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쪽은 그 은인이란 작자를 혼자서 몬스터 소굴에 처박아 넣습니까?”
보기 드문 다이아의 분노였지만 밀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은인이 원해서 한 일인데 말이지…….”
밀론의 비웃음은 노라의 머리에 십자 마크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밀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은인은 아디스에서 새로운 신분증을 얻었다. 어차피 그쪽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은 이미 범죄자 취급일 테니 그게 더 낫겠지.”
셋은 밀론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카이라는 신분은 범죄자나 다름없었으니.
“물론 자세히 보면 티 나겠지만 어차피 은인은 아디스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죽이고 나갈 것만 같으니.”
실제로 김진석은 밀론에게 얘기를 전한 뒤 바로 몬스터를 잡으러 갔다. 밀론과 대화하며 쉬었으니 1분 1초가 아까워 바로 몬스터를 잡으러 간 것이다.
“정말 레벨 업에 미친 것 같더군. 아디스에 오래 있었지만 그렇게 미친 자도 오랜만에 봤어.”
밀론의 말에 노라와 다이아도 무심결에 공감해 버렸다. 그는 다른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속도로 레벨 업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반년 사이에 레벨 20에서 39까지 올리긴커녕 그동안 레벨이 1에서 2라도 올리면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준이었다.
김진석처럼 하루의 절반을 몬스터 잡고 그다음 날에 똑같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라와 다이아조차도 지쳐 쓰러질 때쯤 레벨 업을 해서 버틸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다.
“뭐, 어찌 됐든 알아서 돌아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더군. 물론 신분은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야.”
“혼자선 위험……!”
“다가라.”
그때 성벽 아래에 있던 한 남자가 점프해 성벽 위로 올라왔다. 몬스터를 막는 게 아닌 사람을 막는 위주로 설계되어 있어 그리 높진 않았지만 적어도 3미터는 넘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오로지 단 한 번의 점프로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다.
밀론을 경계하고 감시하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검을 뽑아 성벽 위로 뛰어오른 남자에게 검을 겨눴지만 그 남자는 여유로웠다.
“…다가라?”
“오랜만이네? 노라. 그 사나운 인상만 아니었다면 내 취향이었을 텐데 여전하네, 그 얼굴은.”
노라와 다가라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아는 사이는 한 명뿐이 아니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엘리온 님.”
과거, 다가라는 동료 기사의 아내를 탐해 범죄자로 전락, 결국 아디스까지 흘러들어 간 범죄자 기사. 그는 칼라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레온하르트가 왔다면 난리 났겠군.”
당연히 칼라 기사단의 일원이면서 범죄자로 전락한 다가라는 레온하르트에겐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죽이진 않겠지만 죽기 직전까지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저도 놀랐습니다. 은인이 설마 칼라 성, 기사 학교의 학생일 줄은.”
물론 다가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김진석의 정체였다. 그는 김진석의 무력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깐.
“게다가 엘리온 님까지 나선 걸 보면… 꽤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각별히 다루시지 그러셨어요.”
껄렁거리며 말하는 다가라였다. 하지만 밀론이 그의 등을 때리며 말렸다.
“은인의 일행이다. 말을 삼가라.”
“알겠습니다.”
다가라도 도발할 생각이 아니었으니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크흠, 미안하군. 이 녀석이 생각보다 은인에게 빠져 있어서 말이야.”
“…무슨 말씀이시죠?”
다이아는 혼자서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게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가라를 부르고 이어지는 뜬금없는 말에 이해할 수 없었다.
“노라, 네 레벨이 몇이지?”
다가라는 다이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노라에게 물었다.
“46인데.”
“…벌써?”
노라의 레벨에 깜짝 놀란 다가라였지만 은인의 일행이었고, 지금 은인의 행보를 알고 있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멋지네. 너랑 은인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
“…내가 이기겠지.”
“확실해? 난 못 이기겠던데.”
“……?”
다가라의 말에 노라는 물론이고 다이아와 엘리온마저도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었다.
* * *
“혼자서 괜찮으십니까?”
몬스터를 혼자 잡지 않는 건 아디스에서도 당연했다. 범죄자들이라 자기 몸이 제일 중요했으니 죽지 않기 위해서는 몬스터를 잡을 땐 동료가 있어야 했다.
그건 레벨이 48인 다가라도 예외는 아니었고, 김진석에게 혼자는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완고했다.
“혼자서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뭘 믿고 혼자서 잡으러 가는 겁니까?”
다가라는 김진석이 충족의 왕을 혼자서 가지고 놀다시피 하는 것을 이미 보았지만 결국엔 자기보다 강하거나 비슷한 몬스터를 잡아야 레벨 업을 할 수 있다.
아디스의 은인인 김진석은 어차피 혼자서 가도 말릴 자는 없었지만 다가라와 밀론은 그가 허무하게 몬스터에게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김진석이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밀론이 다가라를 자기에게 붙였기에 귀찮았다.
그렇다면 증명할 방법은 단 하나.
“다가라.”
“몬스터는 위험… 예?”
계속해서 시끄럽게 굴던 다가라는 무시로 일관하던 김진석이 말을 걸자 의문을 띄었다.
“제가 당신을 이기면 그만둘 겁니까?”
“…그러죠.”
다가라는 아무리 범죄 기사라고 한들 자신을 무시하는 게 기분이 좋지 못했다. 사실 충족의 왕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상대했던 김진석밖에 몰랐다.
밀리가 그를 상대했고 순식간에 제압당하긴 했지만 이미 그녀의 무력은 레벨만 높고 별것 없는 건 아디스 전체에 퍼져 있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세라스가 충족의 왕을 허무하게 죽여 버렸으니 왕이 얼마나 강한지는 김진석만이 알고 있었다.
“은인께선 레벨이 39라고 들었는데, 제 레벨이 몇인지 아십니까?”
다가라는 김진석이 자신의 레벨을 정확히 모르니 저렇게 말하는 거로 생각했다. 물론 그건 다가라의 착각이다.
“48.”
“…하긴, 제 이름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깐. 그런데도 저를 이길 수 있다고요?”
그런데도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지금 김진석은 자신의 힘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설령 다이아라도 궁극기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니 정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한다면 궁극기를 사용해도 다이아를 이길 수도 있다.
물론 레벨만 따지면 다이아가 다가라보다 높긴 했지만 정작 김진석 자신도 레벨에 구애되지 않으니 다이아가 다가라보다 강하다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안 봐줍니다?”
다가라는 손을 툭툭 털며 여유로움을 뽐냈다. 레벨이 39인 김진석이 충족의 왕을 가지고 놀았으니 48인 본인도 왕을 가지고 놀 수 있었을 거라는 마음이 이미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고, 그의 말대로 봐주지 않았다.
“그 말, 지키길 바랍니다.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시고.”
김진석에겐 그게 더 좋았다.
다가라는 어떻게 보면 레온하르트의 아래 단계인 방어력이 높은 자다.
극도로 공격에 치우쳐져 있는 김진석 자신의 공격이 얼마나 통할지 궁금했다.
아디스에는 경기장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둘은 정말 길바닥에서 싸울 준비를 했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남의 싸움 구경이다. 게다가 아디스에서 가장 강한 다가라까지 있었으니 삽시간에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다가라는 검과 방패를, 김진석은 강철 궁을 들었다. 그도 아디스에 정확히 뭐가 누가 있는지 모르기에, 혹시 모를 범죄자 엘프가 있을 수 있으니 세계수의 인정이 아닌 강철 궁을 들었다.
둘은 일정 거리 떨어져 있었다. 제 딴에는 다가라가 김진석을 배려한 거였고, 김진석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처음은 활로 하죠.”
“…처음?”
* * *
“별의별 짓을 해도 못 이기겠더라. 단검은 너에게 배운 거겠고, 활은 거기 엘프 아가씨에게 배운 거겠지?”
노라의 외모는 다가라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다이아의 외모는 다가라의 취향 적중이었다. 물론 다이아는 자기를 보며 윙크를 하는 그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처음엔 활을 사용했고, 내가 졌다. 두 번째는 단검, 마지막은 맨손이었다. 물론 마지막은 나도 맨손이긴 했지만 그냥 못 이기겠더라. 스킬을 쓰든 말든 뭘 해도 안 됐어. 정말 레벨 39 맞아?”
다이아는 그의 레벨을 몰랐지만 엘리온과 노라는 다가라의 레벨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세계는 현실이었고, 레벨이 절대적인 수치를 나타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그마치 레벨이 9나 차이 나는 자를 우연으로 이길 순 있어도 완벽히, 아예 이길 생각도 들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밀론 님은 일반인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여. 그자는 괴물이다. 한계가 없는 괴물. 정말 은인이 아디스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혼자서 잡는다면 엘리온 님, 당신도 뛰어넘을 겁니다.”
엘리온은 그의 후한 평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누군가를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범죄자이기 전에 방탕한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의 재능은 진짜였다.
칼라 기사단에서도 레벨이 높은 다가라였다. 자기보다 레벨이 낮은 자는 인정은커녕 사람 취급도 안 해 줬었다.
“기사 학교가 그의 재능을 개화시켜 준 겁니까? 아니면… 막고 있던 겁니까?”
오히려 다가라가 셋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이 김진석의 재능을 막고 있던 것이 아닐까.
“뭐가 어찌 됐든 그를 억누를 생각 하지 마. 엘리온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라와 다이아는 그의 말에 짚이는 게 있었다. 언제나 김진석의 무모함을 막아서는 게 바로 둘이었다.
물론 그건 그를 살리기 위함이었지만 과연 그걸 김진석이 원하던 것이었나. 둘이 질려서 김진석이 떠난 게 아닐까.
그때 밀론이 다가라의 등을 치며 말했다.
“돌아가지.”
다가라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리온은 정작 둘의 반응에 머리를 삐걱거렸다.
“고작 그 말 하려고 이렇게 범죄자들을 끌고 온 겁니까?”
엘리온은 턱짓으로 성벽 밖에 모여 있는 범죄자들을 가리켰다. 밀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다가라와만 오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따라왔을 뿐일세.”
사실이었다. 밀론이 자기들을 가둔 성벽에 볼일이 있다고 하는데 범죄자들은 알아서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민폐 끼쳐서 미안하군. 내 입방정이 심해서 말이야. 한두 놈에게만 말했는데 어느새 다 퍼졌네?”
물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유는 다가라의 입방정이었다.
다가라는 여유롭게 손짓하며 밀론에게 걸어갔다. 밀론은 그런 다가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직 전하지 않은 김진석의 말을 마저 전했다.
“찾지 말라고 하더군. 언젠가 알아서 다시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 * *
지금 김진석은 매우 익숙한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홉 고블린. LV:45]
홉 고블린. 일반 고블린이 레벨 20인데 그것보다 두 배는 더 높은 레벨이었다. 물론 고블린 족장보다도 레벨이 더 높은데다가 거대 고블린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놈들이다.
캬악! 칵! 컥.
하지만 지금 김진석은 그때보다 두 배, 세 배, 혹은 수십 배는 더 강해졌다. 레벨만이 아닌 모든 면에서 말이다.
홉 고블린은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죽었고, 빛으로 변해 사라지며 금화와 아이템을 남겼다.
“약해.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가 있나?”
“예? 예… 있어요.”
밀론은 김진석에게 안내자를 붙여 주었다. 그 범죄자는 레벨이 높진 않았지만 지도를 만드는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과거, 그가 만든 지도를 악마의 꼬드김에 악마에게 팔아 버렸고, 악마들이 그 지도를 이용해 인간의 성에 쳐들어왔으니.
그는 지도를 만들 두 손을 잃고 아디스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남아 있었으니, 아디스의 모든 지리를 머릿속에 담아 둔 그는 김진석이 원하는 몬스터들이 있는 곳을 찾아 주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