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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65화 (65/201)

65화

“…뭐가 웃기지?”

정작 본인들은 웃고 있었으면서 김진석이 마주 웃으니 충족들은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하지만 김진석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너희들이 저 여자랑 다를 게 뭐지?”

김진석의 눈에는 밀리와 이들이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눈앞의 충족들이 밀리보다 더 멍청했다.

“적어도 저 여자는 몬스터를 무시할지언정 방심하지는 않는다.”

이상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녀를 위해 수많은 범죄자가 몬스터에 당하는 걸 그녀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자신이 그렇게 당하지 않기 위해 방심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성격 때문에 몬스터를 무시하는 건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충족은 두 가지 전부 다 하고 있었다. 김진석이 이 세상에 와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두 가지를.

“일전에 엘리온 님의 싸움을 보고 느낀 게 있지.”

김진석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충족의 왕이 김진석을 가리켰다. 그리고 본인은 도망쳤던 지도자의 손녀, 밀리를 잡으러 뒤를 돌았다.

그와 동시에 왕의 호위 기사처럼 당당히 서 있던 충족들이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레벨이 높은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김진석의 말은 단 한 호흡도 끊기지 않았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김진석의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충족의 왕은 이상함을 느꼈다.

“뭐 하자는 거지? 빨리 죽여!”

그의 말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충족의 왕은 충족들이 반항하나 싶어 다시 뒤를 돌았는데, 그곳에는 김진석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지?”

김진석은 그저 뭔가가 묻은 단검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손수건이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걸 본 충족의 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희는 단순하다. 그리고 멍청하다.”

충족의 왕은 천천히 말하며 다가오는 김진석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레벨이 39밖에 안 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54인 본인이 눈앞의 인간에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너희들도 너희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겠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썼지.”

충족들도 결국엔 벌레다. 지네든 기생충이든 전갈이든 뭐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충족들은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썼다. 오로지 인간의 강함만 보고 말이다.

같은 인간인 김진석은 인간이 그리 강하지만은 않은 걸 알고 있었다.

“자기들이 정예라고 생각했었겠지. 하지만 너희는 충족 중에서 가장 약한 놈들이다.”

김진석이 순식간에 죽여 버렸던 충족들. 자기들 딴에는 정예라고 생각했고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썼겠지만 아니었다.

“너희들이 나를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인간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싸우는 것. 하지만 넌 불가능하겠지.”

김진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기생충인 충족의 왕은 인간의 껍질을 벗어 던질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일부러 다른 충족들을 먼저 죽여 버린 것이다.

“웃기지 마라! 고작 레벨 39 인간 따위가!”

하지만 충족의 왕은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저 운 좋게 레벨이 높은 인간에게 기생한 게 전부인 놈은 그거로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충족들과 같이 멍청하고 단순하게, 충족의 왕이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김진석은 여유롭지만 방심하지 않았고,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몬스터들 상대하듯이 똑같이 단검을 던질 뿐이었다.

“…잔재주를!”

충족의 왕은 가볍게 단검을 쳐 냈지만 그 뒤로 날아오는 화살을 보지 못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충족의 왕은 깜짝 놀랐고, 화살은 어깨에 적중했다.

“네가 죽으면 충족들이 날뛸 게 뻔하니 조금 놀아 주지.”

“이런 개자식이……!”

김진석이 처음부터 말이 많았던 이유. 리치처럼 충족의 왕을 중심으로 모인 충족들이다. 당연히 충족의 왕이 사라지면 날뛸 게 눈에 보였다.

게다가 놈들이 사라지면 놈들이 이끌고 온 몬스터들까지도 난리를 칠 게 뻔하니 김진석은 충족의 왕을 붙잡아 둬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충족과 몬스터들은 아디스의 전력에 맡겨야 했다.

“격을 알려 주마, 벌레야.”

그렇게 김진석은 계속해서 충족의 왕을 도발했다.

* * *

“할아버지!”

“…밀리야!”

밀리는 충족들이 김진석에게 시선이 끌린 사이에 할아버지인 밀론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눈물겨운 상봉이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밀론 님! 여긴 위험합니다! 도망가십시오!”

범죄자들이 잘 막아내고 있긴 했지만 이곳은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그것도 한 남자가 충족의 왕의 시선을 끌고 있어서 충족들이 단합이 안 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밀론이 전장에 나타나자 중구난방으로 싸우고 있던 범죄자들이 하나둘 그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일반인인 그가, 최근에 활동도 거의 안 하던 그가 최전방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모이는데 내가 도망칠 순 없지.”

하지만 일반인인 그가 전장 한복판에 있다는 건 표적이 된다는 것. 방해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도 밀론은 자기를 중심으로 범죄자들이 모이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밀론은 그걸 가능케 한 남자를 바라봤다.

“저자는 누구지? 내 아이 중에서 저런 애는 본 적이 없는데.”

“…저희도 처음 봅니다.”

그 남자는 몬스터들의 우두머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몬스터들의 우두머리를 상대하고 있음에도 여유로웠다.

그런데 그 남자를 본 밀리가 손을 움켜쥐었다. 밀론은 그제야 밀리의 손에 구멍이 뚫린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밀리……? 그 상처는.”

“저 남자가 도망치라고 제 손을 찔렀어요.”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을 만한 말이었지만 밀론은 고작 그 한마디로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너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구나.”

손녀이긴 했지만, 손녀이기 때문에 밀론은 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철없는 그녀의 모습을 말이다. 손에 구멍이 뚫린 이상 허튼짓하지 못하고 바로 도망쳤겠지.

그래도 손녀가 손에 구멍이 뚫리니 기분이 좋지 못했다.

밀론은 밀리에게 포션을 주며 몬스터의 우두머리를 상대하고 있는 자, 김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태가 해결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

* * *

김진석은 충족의 왕을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분명 레벨이 54나 되는 충족의 왕이었지만 김진석은 너무 쉽게 상대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됐다.

“레벨이 54나 되는 몬스터가 이렇게 쉽다고 느껴지면 안 되는데 말이야.”

39레벨인 김진석 본인이 54레벨인 충족의 왕을 가지고 놀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방심을 할 것만 같았다.

“너희 같은 몬스터만 많았다면 다른 사람들도 레벨이 높았겠지.”

여전히 도발하려고 하는 말이었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레벨 39도 충족의 왕을 이렇게 가지고 놀 순 없을 것이다.

충족의 왕은 마법사가 아닌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인간에게 기생했기 때문에 놈의 몸은 온전히 레벨 54의 몸이다.

게다가 엄청난 재생 능력도 보유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김진석이 불리해질 게 뻔했다.

하지만 김진석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안타깝군.”

인간에게 응당 있어야 할 학습 능력이 놈에겐 없는 것 같았다. 30분 가까이 놈의 시선을 끌었는데도 처음과 같이 멍청하고 단순하게 김진석을 공격하고 있었다.

김진석은 정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깻잎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하니 충족의 왕은 미칠 노릇이었다.

“대충 모였나.”

범죄자들이 밀론을 중심으로 모인 것을 확인한 김진석은 충족의 왕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놈의 머리를 밟고 뛰어오르며 말했다.

“흑호!”

김진석의 그림자에서 나타난 흑호는 순식간에 김진석을 받아 몬스터들의 머리를 밟아 가며 범죄자들이 모이는 중심, 밀론에게 향했다.

처음에는 김진석이 일부러 충족의 왕의 팔을 단검으로 베어 내며 공격했지만 엄청난 재생 능력에 통하지 않는 걸 깨달은 김진석은 아예 공격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공격도 맞지 않은 김진석은 전투태세로 변하지 않은 것이다. 게임 속 시스템의 빈틈이었다.

흑호 또한 자기에게 휘두르는 몬스터의 공격을 단 한 번도 맞지 않으며 이내 밀론에게 도착했다.

“자네는… 누구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군요.”

밀론은 설령 자신들을 구해 줬다고 한들 손녀의 손에 구멍을 뚫은 김진석을 경계했지만 그걸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

충족의 왕이 이성을 잃은 채 말 그대로 몬스터들의 몸을 뚫어 버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김진석은 자신의 몸 하나 지키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문제는 밀론이었다. 일반인인 그는 이성을 잃은 채 충족과 몬스터를 상관 않고 전부 죽이며 다가오는 충족의 왕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다가라. 당신이 밀론 님을 데리고 대피하세요.”

“…음? 어떻게 내 이름을?”

밀론의 친위대 중 한 명, 다가라는 아디스에 있는 범죄자 중 두 번째로 강한 남자였다. 김진석보다 키는 작지만 몸이 단단했고, 검과 방패를 사용하는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는 기사였지만 다른 동료 기사의 아내와 불륜 관계가 들켜 범죄자로 전락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레벨은 48. 믿음직한 레벨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성, 아디스에서 가장 강력한 자이자 마법사인 여성을 불렀다.

“세라스.”

세라스. 이 세계에서 유일한 마녀인 그녀는 회색의 허리까지 오는 장발. 제대로 정돈되지 않는 산발이었지만 그것도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를 감출 순 없었다.

처진 눈초리와 오른쪽 눈 아래에 있는 점은 김진석에게도 퇴폐미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던 김진석은 그 외모가 오히려 두려웠다.

“당신의 아이들을 푸십시오. 범죄자들이 죽는다면 당신도 아이들을 쉽게 못 얻을 겁니다.”

“…신기하구만. 어떻게 내 정체를 알았지?”

세라스는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아름다운 미소였겠지만 김진석에겐 그 미소가 자신에게 오는 호기심이란 걸 알았기에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곧이곧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아이라고 부르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재밌는 남자구만.”

그녀의 겉모습은 절세미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나이 지긋이 먹은 할머니 같았다.

그때 몬스터들이 범죄자들을 비집고 들어와 세라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손끝만큼도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갑자기 땅에서 솟은 뼈다귀가 몬스터의 손을 잡은 것이다.

“아이들아, 마음껏 날뛰렴.”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수의 뼈다귀들. 그들은 순식간에 몬스터들과 충족들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그 밀론조차도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세라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악마의 힘을 받고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흑마법사였다.

만약 그녀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면 리치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레벨은 자그마치 61. 레온하르트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레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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