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밀리는 한 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몬스터인지도 잘 모르겠다. 인간과 완전히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놈이 몬스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전장의 가운데에 서서 다른 몬스터들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놈만 죽이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겠지?”
밀론의 손녀 밀리. 그녀의 레벨은 42. 다른 곳이었다면 레벨이 높은 거였겠지만 아디스에선 다르다.
아디스는 다른 성이나 도시보다도 레벨이 높은 자들이 많았다.
이유는 당연히 하나. 범죄자들이기 때문이다.
온갖 방법을 이용해 레벨 업을 했지만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레벨이 높은 인간을 죽이는 것. 즉, 살인이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는 인간보다도 악랄하고 지능이 높았으니 비교적 약하고 속이기 쉬운 인간을 선택한 것이다.
착하게 살수록 레벨 업이 힘들고, 악하게 살수록 레벨 업이 쉬운 구조였다.
하지만 밀리는 달랐다. 범죄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범죄자들과 함께 몬스터를 착실히 잡으며 성장했다.
물론 그것도 밀론의 손녀이기에 범죄자들이 따라 준 것이었고, 그녀가 위험하다면 범죄자들이 몸을 던져 그녀를 구해 준 것이다.
그렇게 범죄자들의 희생으로 안전하게 레벨을 올린 밀리. 그녀는 온실 속의 화초였다.
“밀리 님! 도망가셔야 합니다!”
“닥쳐! 저놈만 잡으면 이 사태가 해결돼! 따라와! 내가 죽인다!”
하지만 밀리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철없는 그녀는 멋도 모르고 몬스터들 한가운데에 있는, 몬스터로 보이는 인간에게 달려들려고 하고 있었다.
아디스의 전력만 보자면 충족과 몬스터들이 몰려와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들은 범죄자다.
전혀 담합이 되지 않은 채 따로따로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었으며 오히려 충족들이 더 담합이 잘돼 게릴라로 범죄자들을 없애 나가고 있었다.
그때 밀리가 허공을 박차며 몬스터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밀리 님!”
“어차피 놈들은 내 속도를 못 따라와!”
범죄자들이 말릴 새도 없이 밀리가 몬스터들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당연히 그 어떤 속임수도 없이 정직하게 달려드는 밀리를 충족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막으려고 했지만 인간으로 보이는 자가 손짓을 해 말렸다.
밀리는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인간의 앞에 섰다.
“고작해야 몬스터 따위가 여기 아디스를 침공해 와? 아니, 넌 몬스터가 맞아?”
밀리의 말에 놈은 정말 인간같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입장에선 너희들이 몬스터인데 말이지.”
눈앞의 인간, 충족의 왕의 목적은 간단했다.
“우리도 하나의 종족으로 인정받길 원한다. 엘프나 다른 종족처럼.”
그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밀리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걸 노린 충족의 왕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밀리를 제압했다.
“이거… 놔!”
인간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엄청난 완력에 밀리는 꼼짝도 못하고 잡혀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넌 이곳 지도자의 손녀였지, 아마?”
“…어떻게?!”
충족의 왕은 자기들이 침공하는 아디스를 조사하고 또 조사했다. 인간들의 다른 마을과 도시, 성 근처에 충족들을 파견해 주변에서 아디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전부.
밀리가 달려들 때부터 이미 밀론의 손녀란 걸 알고 있던 것이다.
그때 범죄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밀론이 나타났다.
“…무얼 원하지?”
밀론은 가타부타 묻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밀리처럼 충족을 한낱 몬스터로 대한 것이 아닌 지성체로 대한 것이다.
“이곳을 떠나라. 여긴 이제부터 우리 충족이 지배하겠다.”
“그건 불가능하다. 차선책을 제시하게.”
충족의 왕은 아디스를 버리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밀론은 즉답이었다. 이렇게 말하기도 뭐하지만 아디스는 범죄자들의 희망이었다.
다른 성이나 도시에서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들은 당연히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없었지만 아디스는 달랐다.
그 어떤 범죄를 일으켜도 아디스에선 허용됐다. 밀론의 말만 잘 듣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충족의 왕이 그걸 배려해 줄 이유는 없었다.
“차선책은 없다. 아니면 이 아이를 포기할 텐가?”
“꺄아악!”
“밀리!”
충족의 왕은 단호했다. 밀론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밀리의 팔을 꺾어 버린 것이다.
“아디스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밀론 님!”
이때다 싶어 범죄자들은 골칫거리인 밀리를 포기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밀론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밀리냐, 아디스냐.
밀리를 선택하면 아디스를 포기해야 하고, 아디스를 선택하면 밀리를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아디스를 선택한다고 한들 수많은 몬스터를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고, 밀리를 선택한다고 한들 놈들이 순순히 보내 줄지도 몰랐다.
그 어떤 선택을 해도 최선도, 차선도 없었다.
“…할아버지?”
정을 주기 싫지만 권력을 이용해 레벨 업을 한, 철없는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할아버지인 밀론을 불렀다.
밀론은 충족의 왕의 밑에 깔린 밀리를 바라보고 결국 결정을 내렸다.
“아디스를…….”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충족의 왕을 꿰뚫었다.
“…어?”
그대로 충족의 왕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거구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 김진석은 충족의 왕에게 밟혀 있던 밀리를 기생충 보듯이 바라봤다.
“게임 속에서도 멍청한 년은 현실에서도 똑같군.”
【 세라스 】
김진석이 아디스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본 건 몬스터들과 범죄자들의 거친 싸움이었다.
사방이 싸움이었고, 전장이었다. 바퀴벌레같이 몰려드는 몬스터들과 범죄자들의 싸움은 언뜻 보면 백중세였지만 충족들이 몬스터들의 사이에 숨어서 범죄자들을 하나둘 죽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저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목적은 밀론, 그리고 그의 손녀인 밀리다.
게임 속에서 밀론은 충족의 왕의 협상에 응했고, 아디스를 포기했다. 하지만 충족의 왕은 애초에 협상할 마음 따위는 없었고, 밀리를 그대로 계속 인질로 잡고 범죄자들만 아디스 밖으로 몰아내 버렸다.
그때 플레이어가 아디스에 도착해 그들을 돕고 밀리까지 구해 내게 된다.
그때까지도 밀리는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 게임 속에서 흔히 나오는 민폐 캐릭터인 것이다.
김진석은 흑호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제압당한 밀리와 충족의 왕을 찾아냈다.
[충족의 왕. LV:5]
그런데 충족의 왕의 레벨이 5밖에 되지 않았다.
충족의 왕, 놈의 정체는 기생충이다. 기생충이 몬스터로 변한 것이지만 본인의 레벨은 매우 낮았으니 똑같이 숙주에게 기생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놈은 우연히도 레벨이 높은 인간의 몸에 들어가 오랫동안 기생했고, 결국엔 인간의 몸을 빼앗은 것이다.
하지만 원래 게임 속에서 충족의 왕의 레벨은 54로 표시된다. 그런데 김진석의 감정에는 레벨이 5로 표시되고 있었다.
아마도 게임 속에선 놈이 기생한 인간의 레벨로 표시된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몸속에 있는 기생충의 레벨로 표시되는 것 같았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충족의 왕 주변에는 온갖 벌레들이 즐비했다. 딱정벌레, 지네,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전갈 등등. 하지만 놈들은 인간의 모습과 거의 똑같았다.
충족은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충족의 왕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저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김진석은 내키지 않지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으니 밀리를 구하기 위해 활을 들었다.
“흑호야, 저기를 향해 최대한 높이 뛰자.”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바로 충족의 왕의 방향. 흑호는 김진석의 말에 따라 놈의 위로 하늘 높이 뛰었다.
“관통 샷.”
김진석의 손에는 세계수의 인정이 들려 있었다. 비록 놈이 마족이 아니라 공격력이 증폭되진 않겠지만 기본 공격력이 강철 궁보다 강했으니 세계수의 인정을 들고 스킬을 사용했다.
김진석은 이미 기생충이 어디에 기생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뇌. 모든 기관을 지배하는 그곳에 놈은 기생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흑호를 타고 화살을 쏘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충족의 왕 머리에 적중했다.
그와 동시에 전투태세로 확인돼 흑호가 하늘에서 사라졌지만 김진석은 곧바로 중심을 잡고 충족의 왕 위로 착지했다.
그리고 놈에게 제압당해 있던 밀리를 벌레 보듯이 바라봤다.
게임 속 민폐 캐릭터답게 김진석도 딱히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에 정신을 차리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똑같았다.
자기 할아버지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과 외모가 아름다운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녀였다.
그나마 그것도 게임이라서 큰 감정은 없었지만 실제로 민폐 끼치는 걸 눈으로 보니 혐오감이 솟구쳤다.
김진석과 같이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어깨까지 오는 단발. 노라와 비슷한 사나운 인상이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해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김진석의 눈엔 아니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빨리 일어나!”
그 말과 동시에 김진석은 쓰러져 있는 충족의 왕을 발로 찼다. 인간의 몸이라고 한들 기생충의 숙주로 변해 죽는다면 몬스터와 같이 먼지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쓰러진 충족의 왕의 몸은 사라지지 않았다.
즉,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전력을 숨겨 놨었나. 역시 인간들은…….”
충족의 왕은 한쪽 눈구멍이 뚫린 기이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를 피했나.”
김진석의 화살은 정확했지만 뇌에 기생하고 있는 기생충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눈에 생긴 구멍이 눈에 띄게 낫고 있었다.
그때 범죄자들이 몬스터들을 밀고 나갔다.
밀론은 김진석이 난입한 것을 보고 누군지 의문이 생겼지만 그걸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바로 범죄자들을 투입한 것이다.
하지만 멍청하게 밀리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물론 김진석은 다른 범죄자들만큼 무르지 않았다.
“꺄아악!”
김진석은 밀리의 손을 단검으로 찍어 버렸다. 멍청하게 누워 있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어허둥둥 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빨리 저쪽에 합류해라.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깐.”
단검을 뽑으며 말했다. 손에 구멍이 뚫려 다른 손으로 그 구멍을 막고 있는 밀리는 공포감이 섞인 눈으로 김진석을 바라봤다.
“빨리 안 가?!”
그제야 흠칫 놀라 밀리는 범죄자들에게 달려갔다.
김진석은 또 괜히 쓸데없이 몬스터들과 싸우려고 달려들 것을 염려해 그냥 단검으로 손을 찍어 버린 것이다.
과격한 방법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
게임에서, 아니 게임보다도 멍청한 그녀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지도자의 손녀를 그렇게 멋대로 다뤄도 되나?”
“내 지도자 아니니 알 바 아니야.”
물론 김진석은 밀론을 구하러 온 것이긴 했다. 게임 속에서도 밀리를 구해 준 것에 밀론은 플레이어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자기 손녀를 오냐오냐 키웠다는 걸 아는 밀론이니 이 정도는 봐줄 것이다.
…아마도.
“안 쫓아가나?”
“굳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약해서 말이지.”
충족의 왕은 여유로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김진석은 그걸 이해하고 있었다. 레벨이 많이 차이 나긴 했지만 저렇게 쉽게 제압당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네 레벨은 몇이지?”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충족의 왕은 레벨이란 시스템을 알고 있었다. 놈이 인간에 기생해서 얻은 정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좋은 사실을 알았다.
“39인데.”
그런데 김진석의 말에 충족의 왕은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39 따위가 내 앞을 가로막는 건가?”
그러자 주변에 인간의 모습을 한 충족들이 마찬가지로 웃음을 흘렸다. 놈들도 전부 높은 레벨을 가진 충족이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여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