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제야 김진석은 오르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오르페는 전형적인 엘프의 모습이었다. 초록색 장발에 찰랑거리는 머릿결은 다이아와 비견될 만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얼굴은 엘리온과 다르게 꽤 나 사납게 생긴 인상이었지만 김진석과 비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미남이었다.
선남선녀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김진석은 딱히 그의 외모를 봐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그런데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오르페 님, 왜 이곳에 인간을 들였냐고 엘프들이 난리입니다. 그리고 엘리온 님이 찾아왔습니다.”
* * *
“…나를 환영하려고 나온 엘프들은 아닐 텐데 말이지.”
엘리온은 장로가 머무르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용해야 할 이곳이 엘프들로 북적북적했다.
그들은 엘리온을 힐끔 쳐다봤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장로 방 앞에 서서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포메트와 놈의 몬스터들이랑 최전방에서 싸운 엘프들이 그들을 막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인간이니깐요. 그래도 우선 다이아 님을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다이아도 결국 인간이 좋아 떠난 엘프 아닌가? 왜 너희들도 인간을 두둔하지? 설마……?”
엘리온은 엘우드에 자주 찾아오긴 했지만 환영받진 못했다. 엘우드에 사는 엘프들은 인간을 거의 혐오하다시피 한다.
악마 침공 이전에 인간들에게 당한 것이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지만 그걸 실행하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드물다는 건 결국 있다는 것. 엘우드에 사는 엘프들은 그 노예 제도의 피해자였다. 엘리온은 엘우드에 자주 찾아오며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 주었지만 당연히 피해자인 그들은 믿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엘리온은 그들을 딱히 중재할 생각이 없었는데 소리치는 쪽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다이아가 이곳에 왔다고?”
그때 방문이 열리며 오르페가 나왔다.
그를 본 엘리온은 엘프들을 해치며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아직도 장로나 사령관이 안 왔… 음?”
그런데 오르페 뒤로 이번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노라? 다이아? 카이 학생까지?”
* * *
김진석은 엘리온이 엘우드에 자주 오는 걸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선 그들과 함께 바포메트와 맞서서 결국엔 놈을 격파하는 스토리인데, 김진석이 다이아를 데려가 조금 엇갈린 것이다.
그리고 다이아는 엘우드에 있는 엘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엘리온이 그녀를 계속해서 설득해 엘우드에 갔는데, 하필 그날 바포메트가 엘우드를 침공한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이사장님.”
“어? 어… 그래요, 카이 학생. 그런데 여긴 어떻게?”
김진석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어쩌라고, 쓸모없는 놈년들아. 너희는 우리 아니었으면 진작에 다 뒤졌어. 알아? 감사 인사를 해 줘도 모자랄 판에 내쫓을 생각만 하니……. 아저씨, 아저씨하고 얘만 특별한 거예요? 엘프들이 원래 이렇게 멍청하고 무례해요?”
노라는 꽤나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대로 상황도 모르고 그저 인간이 들어왔다고 내쫓을 생각만 하는 엘프들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노라와 언쟁을 하는 엘프들을 보고 오르페와 그와 함께한 최전방의 엘프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자기들도 인간들을 혐오하다시피 했지만 눈앞에 있는 인간은 세계수의 인정을 받은 자의 일행이었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건 자들이다.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 그들이었다.
노라의 진실에 기반한 폭언에도 그들은 별말을 못했고, 엘프들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질 즘.
“그만!”
엘리온의 마나 섞인 외침에 다들 깜짝 놀랐다. 언제나 온화한 엘리온의 다른 모습에 엘프들마저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듣자 하니 카이 학생과 노라가 다이아와 함께 몬스터의 침공을 막아 주었는데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배척하는 겁니까?”
“누가 구해 달라고 했나?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그들의 인간 혐오가 극에 달했다.
엘리온조차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한숨을 쉬었다.
김진석도 이미 그들의 인간 혐오를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플레이어가 자신들을 구해 주었기에 혐오는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예외적인 시선으로 플레이어를 바라봤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극에 달한 혐오감은 고작 목숨을 구해 준 것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물론 김진석이 그걸 이해해 줄 이유는 없었다.
“노라, 그만 하세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입니다.”
김진석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이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 봤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매우 간단했다.
무시, 혹은 경찰을 부르는 것.
“저희가 떠나겠습니다. 어차피 대가를 받기 위해 도와준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김진석의 감정은 경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혐오하는 그들이 정작 자신들을 혐오하게 만들고 있었으니.
노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화를 내봤자 손해인 것을 알고 있기에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고 있었다.
“다이아 씨,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김진석은 그런 노라를 진정시켜 주다가 다이아를 보며 말했다.
“…아뇨, 있던 향수도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셋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우드를 떠났다.
* * *
엘리온은 떠나는 셋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무례한 인간. 잘 떠났네.”
정작 누가 무례한지도 모르는 엘프들을 보며 엘리온도 이제는 환멸까지 느끼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그들을 설득했고, 게다가 인간에게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느끼는 게 없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엘리온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당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바포메트와 최전방에서 싸웠던 오르페와 엘프 전사들이었다.
“저 인간 남자, 세계수님의 인정을 받은 자였습니다!”
“…뭐?”
이 중에서 그나마 김진석을 잘 아는 엘리온조차도 오르페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계수님의… 인정이라니?”
엘프들은 그 말을 거짓이라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모든 엘프는 세계수에 한해 절대 거짓말을 안 했다.
불경이나 다름없었기에.
“제가 직접 보고 만져 봤습니다. 그 인간 남자, 김진석 님은 세계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활은 마치 세계수님이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엘프들은 얼굴이 사색이 됐다.
* * *
“진짜 미친 놈년들 아니야? 이해할 수가 없어.”
노라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그나마 다이아와 친하게 지내니 이 정도지, 아니었다면 별의별 욕을 다 했을 거다.
“아니, 구해 줬으면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사 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저도 저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정작 사과해야 할 자들은 안 하고 다이아가 대신 사과하고 있었다. 김진석도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꽤나 실망한 상태였다.
오르페는 김진석이 정말 세계수의 인정을 받은 자라면 극진한 대접을 약속했다. 물론 김진석은 딱히 그런 걸 원하지 않았지만 오르페는 세계수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템을 가진 인간을 그냥 보낼 순 없다고 했다.
사실 그들은 김진석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아이템을 입수했을 경우 여차하면 뺏거나 죽일 생각이었을 거다.
마지막에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들 첫인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김진석은 다시 한번 느꼈다.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돌아가죠. 학교로.”
* * *
엘우드에서의 사건이 있었던 다음 날.
김진석과 노라, 다이아는 지식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50레벨을 달성한 다이아의 궁극기를 배우기 위해서.
“생각해 두신 것이 있나요?”
“제가 50레벨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해서요.”
이 세계에서는 게임처럼 레벨 업의 한계는 없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한계가 따로 있었다.
전에 김진석이 죽인 여성 용병에게서 들은 이야기였지만 당연히 몬스터들은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놈들도 악랄해지며 지능이 높아진다.
레벨 업의 벽은 없었지만 몬스터들에게 벽이 있던 것이다.
자기와 비슷하거나 낮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는다고 한들 위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몬스터들을 잡지 못한다면 결국 그게 한계인 것이다.
그래도 더 낮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으면 레벨 업은 가능했지만 경험치를 주는 게 극히 적었고, 한계를 맞이하는 거다.
지금의 다이아와 엘리온, 심지어 레온하르트조차도 결국 한계를 맞이해 오랫동안 그 레벨에 머무르고 있던 것이다.
“혹시 다들 어떤 궁극기를 선택하는지 알고 있나요?”
게임에서는 여러 궁극기가 있었지만 대부분 두 개의 궁극기 중 하나를 선택한다. 광역 궁극기와 단일 궁극기.
플레이어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레벨 50이 넘는 궁수가 별로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이 세계는 현실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선택한 통계와 자신의 취향에 따라 궁극기를 선택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알기 어려웠다.
게다가 스킬의 이름과 설명만 보고 배워야 했기에 정확히 어떤 스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궁극기가 어떤지 전부 알고 있었다.
“우선 마음에 드는 궁극기를 한번 찾아보죠.”
다이아가 궁극기를 배우는 거지만 노라와 김진석도 성심성의껏 찾아 주었고, 다이아도 열심히 찾아 최종적으로 두 개의 궁극기만이 남았다.
[펜리르의 환영: 펜리르의 환영을 소환한다.]
[저격: 대상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화살을 발사한다.]
게임 속에서도 두 궁극기 다 주력 궁극기였다. 레이드에서 자주 사용하는 저격과 PVP나 레벨 업을 이용할 때 사용하는 펜리르의 환영.
저격은 말 그대로 대상을 저격해 엄청난 피해를 준다.
펜리르의 환영은 영체 상태인 거대한 늑대를 소환해 일정 시간 동안 주변을 공격한다.
저격은 아마도 게임 속과 비슷하겠지만 펜리르의 환영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혹시 펜리르의 환영이 자아가 있다거나 합니까?”
“제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날뛰면 어떡하죠?”
“사용하고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셋은 고민하고 고민했다.
펜리르의 환영은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궁극기를 사용하고 또 다른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성이 있었다.
저격은 한 대상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범용성이 매우 떨어졌다. 왕딱정벌레처럼 수많은 무리가 한 개체인 경우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몬스터를 제외하고 하나의 대상에게는 최고의 궁극기였다.
각 궁극기마다 장점과 단점이 명확했다.
“사용해 보고 선택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아쉽네.”
마치 게임처럼 말이다.
노라의 말에 김진석은 흠칫했다. 다이아도 아쉬움을 토하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난 저격이 좋은 것 같은데? 어차피 왕딱정벌레 같은 몬스터들은 드물잖아? 피해 다니면 되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봐.”
“전 펜리르의 환영이 좋다고 봅니다. 통제할 수 없다면 안타깝지만 노라의 말대로 사용하고 도망칠 수도 있고, 지식의 도서관에서 그런 위험한 스킬을 아무 경고도 없이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노라와 김진석은 각자 의견을 냈다. 둘 다 타당한 의견이었고, 저격과 펜리르의 환영 1:1이었다.
다이아가 배울 궁극기였으니 결국 그녀가 선택하는 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