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김진석은 다이아와 뒤에 엘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제 욕심 부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군요.”
바포메트의 상처는 전부 회복됐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엘프들을 노리개로 삼겠다는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 죽여 버리겠다……!”
놈의 말에 부응하듯 잠깐 멈췄던 몬스터들의 공세가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엘프들은 여전히 다이아를 설득하고 있었고, 다이아는 기절한 노라를 안고 김진석을 보고 있었다.
“일대일로는 이제 질 기분이 안 드는데 말이야… 아쉽네.”
그렇게 말하며 김진석은 강철 궁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다이아는 김진석이 강철 궁을 집어넣는 것보다 그의 말에 더 의문이 생겼다.
“…저 괴물을요?”
다이아는 김진석의 레벨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몬스터를 레벨 38인 김진석이 잡는다는 건… 만용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그녀가 바포메트의 레벨을 알았다면 김진석을 말렸을 것이다. 레벨 20 차이. 아이와 어른의 차이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어쩔 수 없다! 다이아 님을 포기한다! 돌아간다!”
결국 엘프들이 다이아의 설득을 포기하고 도망치려 할 때. 김진석은 인벤토리에서 거의 묵혀 놨다시피 하는 무기를 꺼냈다.
김진석이 꺼낸 아이템을 보고 노라를 안고 있던 다이아가 그녀를 떨어뜨릴 뻔했다.
“당신……?! 그걸 어떻게?!”
보기 드문 다이아의 격해진 감정에 엘프들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고개를 돌리니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세계수님?”
하지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고, 어느새 바포메트가 눈앞까지 달려와 언월도를 휘두르려는 순간.
“차징 샷.”
[카이와의 동기화 2.5%]
어느새 카이와의 동기화가 2.5%까지 올라갔다.
[세계수의 인정. 공격력 55. 내구도 무한.
마기를 가진 대상을 공격하면 공격력 +50%
세계수의 인정을 받은 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원래 공격력도 5티어 수준인 데다가 마기를 가진 대상을 공격하면 공격력이 50퍼센트가 더 올라간다.
게다가 카이의 스킬까지 사용한 공격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뭣?!”
바포메트는 그 위력에 날아갔던 이성이 돌아왔지만 이미 늦었다. 수많은 몬스터를 갈아 버리며 나아간 김진석의 화살이 바포메트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그렇지만 바포메트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괴물이었고, 팔을 X 자로 펼치며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하지만 화살을 막은 두 팔이 날아갔고, 결국엔 놈의 가슴에 박혔다.
“크아아악!”
세계수의 인정과 카이의 스킬을 사용했는데도 놈은 죽지 않았다. 두 팔이 찢기고 가슴에 화살이 박혔지만 바포메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거기다 무릎을 꿇고 있는 바포메트의 팔이 슬금슬금 치유되려 하고 있었다.
“다이아 씨. 마무리하세요.”
“…예?”
그런데 예상외인 김진석의 말에 다이아는 당황했다.
“곧 레벨 50이 되지 않나요? 저놈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
다이아는 레벨 49에서 오랫동안 지내 왔다. 그 이유는 김진석을 키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장을 거의 포기하면서까지 레벨이 낮은 몬스터들을 잡아 왔다.
1레벨 업을 하긴 했지만 정말 수많은 몬스터를 잡았기에 가능했던 일. 김진석과 노라가 레벨 업을 훨씬 더 많이 했었다.
김진석은 그런 다이아를 배려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차피 바포메트가 저 상태라고 한들 차징 샷을 제외한 다른 공격으로는 놈을 죽이기는 어려워 보였다.
“…피어싱.”
궁수의 최고 주력 스킬 피어싱. 레벨 48에 배우고 관통 화살과 차징 샷을 섞은 상위 호환인 스킬이다. 기를 모아 화살을 쏘아 내고 화살이 관통되지만 첫 번째 대상인 경우 공격력이 더욱 증폭된다.
다이아가 쏘아 낸 피어싱은 바포메트의 가슴, 김진석의 화살이 박힌 곳에 정확히 적중했다.
팔이 날아가 공격을 막을 수 없었던 바포메트는 다이아의 피어싱에 맞아 단말마조차 내지 못하고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이아의 몸이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레벨 업의 증거. 다이아의 레벨이 50이 된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 * *
김진석은 기절한 노라를 등에 업고 다이아와 엘프들과 함께 엘우드의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 전투로 김진석과 노라, 다이아까지 전부 레벨 업을 했다.
김진석은 39, 노라는 46, 다이아는 50이 되었다. 셋 다 전부 상처는 치유됐지만 전투로 인한 피로도는 회복되지 않았기에 노라는 기절해 있었다.
정확히는 잠들어 있었다.
“헤헤…….”
“도대체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실없이 웃으며 자는 노라를 김진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그런 둘을 다이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카이 씨, 그건… 어디서 얻으신 거죠? 아니, 도대체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 거죠?”
다이아는 김진석이 들고 있는 세계수의 인정이 정확히 무슨 아이템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엘프들은 그저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지기에 김진석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는 김진석을 의심하기는커녕 더욱 신뢰 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라 성 뒷문 쪽에 관광 명소 있는 곳 아시죠? 엘프분들에게 유명한 곳.”
“산책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에 김진석이 흑호와 함께 여유롭게 걸었던 그 산책로다.
“예, 그중에 아름답게 마나가 모여 있는 나무가 있다는 건 잘 알고 계시겠죠.”
“…그 마나가 보이신 겁니까?”
다이아는 김진석에게 그 마나가 보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마나에 민감한 엘프들을 제외하곤 그걸 본 자는 레온하르트와 칼라 기사단원 정예 몇 명이 전부였다.
노라조차도 그 마나를 보지 못했다.
“나무에 모여 있던 마나는 세계수님의 의지였습니다. 그 나무 앞으로 가니 마나가 모였고, 이 아이템을 준 겁니다.”
김진석은 나무 부메랑 같은 세계수의 인정을 보여 주었다. 평범한 나뭇잎이 붙어 있는 나뭇가지같이 보였지만 김진석이 손으로 잡으면 활시위가 나왔다.
다이아가 세계수의 인정을 받아 들자 그 활시위는 다시 꿈틀꿈틀 나뭇가지 속으로 사라졌다.
활처럼 사용해 보기 위해 자세를 잡아 보아도 다이아의 손에선 활시위가 나오지 않았다.
“엘프라고 무조건 인정을 받는 게 아니군요…….”
다이아는 엘프인 자신이 세계수의 인정도 받지 못한 게 뭔가 씁쓸했다. 게다가 활시위를 당기려고 하니깐 빛으로 변해 사라지더니 김진석의 손에서 다시 나타났다.
“당신에게 귀속되어 있군요. 애초에 세계수님의 인정을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으니…….”
당연히 세계수의 인정을 받지 않은 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금방 엘프들의 마을, 엘우드에 도착했다.
비록 몬스터들이 침공해 과거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마을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지 않았으니 대부분의 아름다움은 유지되고 있었다.
초록색 바탕과 나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저택들. 하늘을 뒤덮는 나뭇잎이었지만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가히 장관이었다.
게다가 마을 중심에는 왜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게 의문일 정도로 나뭇잎을 뚫고 자라난 엄청난 크기의 나무까지.
세계수가 살아 있었다면 저것과 같을까 생각이 들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저 나무는 이미 죽어 버린 세계수의 육신이었다.
엘프들은 몬스터들의 침공 때문인지 엘우드 부사령관인 오르페가 왔음에도 본인 집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마치 동물원 속의 동물처럼 창문을 통해 김진석과 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좀 기분이 나쁜데?”
“죄송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어느새 잠에서 깬 노라는 김진석의 등에서 내려와 투덜대고 있었다. 김진석은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했고, 그녀를 진정시키며 세계수의 인정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물론 이미 오르페를 비롯한 전방에 있던 엘프들에게 들켰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엘우드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비록 사령관님과 장로님이 안 계시지만 제가 그들의 대행이니 대신 물어보겠습니다.”
오르페는 장로가 사용하는 방으로 셋을 안내했고, 엘우드 엘프들을 대표해 김진석에게 물었다.
“당신이 사용한 그 활. 혹시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부터 오르페는 김진석에게 극존칭을 하고 있었다. 김진석은 어차피 엘우드의 엘프들은 폐쇄적이기에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들의 앞에서 세계수의 인정을 사용한 것이다.
“여깄습니다.”
오르페는 김진석이 건네주는 세계수의 인정을 양손으로 조심히 받아 들었다. 그는 세계수의 인정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조심히 쓰다듬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세계수님…….”
오르페가 울음을 쏟아 내자 노라와 김진석은 물론이고 다이아마저도 당황했다.
엘프들에게 세계수는 부모나 다름없었다.
다이아와 엘리온은 세계수의 품에서 빨리 벗어나긴 했다. 그들은 세계수의 인정을 보고 부모의 유품을 본 듯한 그리움을 느꼈지만 오르페를 비롯한 다른 엘프들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온 것이다.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김진석은 다이아에게 말해 줬던 것 그대로 오르페에게 전해 주었다.
“…왜 인간이 만든 성 근처 나무에 자리 잡았을까요. 세계수님의 의지가.”
오르페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세계수를 생각하면 엘프가 생각나고, 엘프를 생각하면 세계수가 생각나는 게 기본이다.
그런 세계수의 의지 마나가 왜 인간이 만든 성 근처 나무에 머무르고 있었을까. 그건 김진석도, 엘프들도 모른다.
오로지 세계수만이 알 뿐.
“어쩌면 세계수님이 당신을 계속 기다리고 계셨던 거일 수도 있겠군요.”
오르페의 고민에 다이아는 답을 냈다. 그게 정확한 답일진 모르겠지만 오르페는 김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세계수님의 인정을 받으신 자.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김진석은 오르페의 말에 다이아를 쳐다봤다. 본명을 밝힐지, 아니면 가명을 말해야 할지 말이다.
세계수의 공인을 받은 자가 엘프들에게 거짓을 말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본명을 말하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몰랐다.
“이들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이아의 말에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김진석입니다.”
“김진석… 기억해 두겠습니다, 김진석 님.”
오히려 오르페의 존칭에 부담스러운 건 김진석이었다. 그런데 다이아가 오르페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인간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되도록 엘프들에게도 안 알려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미 알려진 건 어쩔 수 없지만 저는 딱히 제가 엘프들에게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김진석이 세계수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들 엘프들에게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번에 저희를 구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김진석이 오지 않았다면 엘우드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바포메트에게 붙잡혀 노리개가 됐을지 모를 노릇.
“감사합니다. 하지만 엘우드 엘프들에겐 이미 알려졌을 겁니다. 제 옆에 있던 녀석들은 입이 비교적 가벼워서 말이죠.”
희미하게 웃는 오르페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