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간다, 인간 꼬맹아. 열심히 막아 봐라.”
마족 바포메트는 마치 언월도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 언월도는 바포메트만 한 창대와 그 1/3만 한 도신이 있었다.
바포메트의 거대한 덩치보다도 긴 언월도를 김진석을 향해 내려쳤다.
가볍게 휘두르는 공격이라 김진석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뒤의 노라와 다이아는 이미 탈진 상태라 피할 수 없었다.
김진석을 노린 공격이었지만 땅바닥에 내려친 충격파로 둘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프들이 몬스터들을 막고 있던 방향으로 날아간 것이다.
노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이아를 구해 내긴 할 거다.
김진석은 그녀들을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눈앞에 바포메트가 그를 놓아줄 리가 없었다.
“안타깝군. 내 신부가 되기 딱 좋은 외모들이었는데 말이지.”
김진석은 그제야 진작에 죽었어도 모자를 엘프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왜 놈이 이곳을 침공한 것까지.
“그러고 보니 엘프 중에서 살아남은 이 중 대부분이 여성이었지.”
“남자 따위는 필요 없으니깐 말이야…….”
그와 동시에 바포메트의 언월도가 불을 뿜었다.
“카운터…….”
김진석은 바포메트의 말이 늘어지는 것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스킬을 사용했지만 바포메트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날아간 김진석은 땅바닥을 구르고 구르다가 뭔가에 부딪히며 멈췄다.
고개를 위로 올려 바라보니 그건 고블린이었다. 놈은 특유의 썩소로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날아가면서까지 놓지 않았던 단검으로 고블린의 목을 그어 버렸다.
고블린은 그대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김진석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속에서 피가 올라왔고 그는 그걸 뱉어 냈다. 그리고 바로 포션을 삼키며 바포메트를 바라봤다.
놈은 노라와 다이아처럼 김진석을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괴물 같은 힘과 능력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인간 주제에 잘 막았군.”
바포메트의 표정에 더는 여유로움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만이 있었다. 마치 김진석 자신처럼 말이다.
노라가 수업 처음에 항상 말한 것이 있었다. 김진석 자신은 살기 때문에 공격이 뻔히 보인다고.
당연히 노라가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김진석에겐 상관이 없었다. 지금 김진석의 눈에선 바포메트의 다음 공격이 어디로 향할지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인다고 손쉽게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카운터를 사용해도 김진석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공격과 바포메트의 레벨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벨에 관여되지 않고 자기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공격조차도 단 1의 대미지도 안 입는 스킬이 있었다.
바포메트의 언월도가 김진석의 눈앞까지 온 순간.
“패링.”
전부터 사용했던 그의 무기, 패링 대거로 바포메트의 언월도를 막았다. 그대로 반으로 잘려 죽을 것만 같았는데, 언월도의 1/10 만한 단검으로 막아 낸 것이다.
게임 속에서는 기껏해야 특정 공격만을 막을 수 있었고, 그것도 50레벨 몬스터 이상의 공격을 스킬로 막아내면 무기가 부서지기에 별 쓸모가 없는 기술이었다.
게임에서도 그런 설명이 없었지만 플레이어들이 직접 알아낸 것이다.
“뭣……?”
김진석이 공격을 막자 바포메트의 언월도가 하늘로 솟구쳤고, 그와 동시에 패링 대거가 부서졌다.
“일제 사격.”
노라와 다이아의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본 김진석은 어차피 자신의 공격도 먹히지 않을 게 뻔했기에 화살 여러 개를 놈의 시선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쏘아 냈다.
당연히 그 공격은 놈의 단단한 가죽에 먹히지 않았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인 바포메트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화가 난 표정으로 날아간 언월도를 다시 잡고 김진석에게 휘둘렀다.
“회피 사격.”
김진석은 스킬을 사용하며 피해 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처럼 정말 1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순 없었다.
그 잠깐의 틈 사이에 바포메트의 언월도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이미 김진석은 예상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바포메트의 다리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에 바포메트도 움찔거렸다. 그 잠깐 사이에 김진석은 회피 사격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 와중에 화살은 정확히 바포메트의 눈으로 향했는데, 놈은 눈을 감아서 눈꺼풀 가죽으로 화살을 막아냈다.
김진석은 폭발 덫을 미리 사용해 두었고, 밀어내는 효과로 바포메트를 밀어낸 것이다.
“…인간 따위가.”
* * *
“노라! 그를 혼자 내버려 둘 겁니까?!”
“나도 도우러 가고 싶은데 어떡하라고!”
노라와 다이아는 몬스터들 사이로 날아갔지만 둘은 바로 일어서서 서로의 등을 맞댄 채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떨리고 발이 부들거리는 그녀들은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도 벅찼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녀들도 처음이었지만 그들이 가진 경험을 살려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화살이 쏟아지더니 그녀들 근처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박혔고, 이내 대부분 몬스터가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다이아 님!”
“…오르페?”
엘우드 부사령관 오르페와 그를 따라온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다이아 옆에 있는 인간 노라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노라는 자신을 꺼리는 엘프들의 모습에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고, 그녀가 엘프들에게 말했다.
“김… 카이를 도와야 해!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레벨 높은 애들인 것 같으니 바로 가자!”
하지만 엘프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바포메트와 싸우고 있는 자는 인간 김진석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희생이 있었지만 그건 다이아를 구하기 위해서다. 인간을 구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아니, 씨발! 니네들이 지금 그딴 거 따질 때야?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할 거 아니야?!”
다이아도 노라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프들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인간 남자가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다이아 님의 일행인 것 같은데 포기하는 게 신상에 더 좋을 거다. 다이아 님도 우선 엘우드 보호 체계에 들어오시죠. 이상한 일이지만 놈들은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지 않습니다.”
최대한 여성 엘프를 죽이지 말라는 바포메트의 명령을 받은 몬스터들은 엘우드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엘프들이라고 전부 강한 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엘우드의 깊숙한 곳에 있었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능이 그리 높지 않았던 몬스터들은 바포메트의 명령을 완벽히 알아듣지 못했고, 조금씩 중앙 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여러 엘프가 죽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걸 모르는 엘프들은 몬스터들의 공세가 잠깐 멈칫한 순간 다이아를 구하러 왔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령관님은 어딨죠?”
“…사령관님이 계셨다면 저희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다이아는 그제야 사령관의 부재를 깨달았다. 그녀만 있었다면 바포메트도 무섭지 않았을 거다.
“꺼져. 필요 없어, 너희들.”
노라는 신물이 난다는 듯 몸을 파르르 떨며 김진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희가 인간을 버린 게 아니라 인간이 너희를 버린 거네.”
이미 다이아에게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엘프들이 그 말에 침묵했고, 다이아 또한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노라는 그 말을 끝으로 몬스터들을 뚫으며 김진석을 향해 달려갔다.
* * *
“…쿨럭.”
김진석은 이미 한계였다.
패링 대거의 스킬을 실험해 보고 싶었던 김진석은 노라와 다이아의 도움을 받았었다.
패링을 제대로 사용하니 그녀들의 공격을 완벽히 막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도 50레벨 이상의 몬스터에게 패링을 사용하면 무기가 파괴되는지 확인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해 실험할 수 없었지만 파괴될 것을 우려해 패링 대거를 여러 개 사 놨다.
원래는 활을 사려고 했지만 노라와 다이아가 강철 궁을 선물해 주어서 금화가 남아 여러 패링 대거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포메트에게 패링을 사용하는 건 정말 확실할 때만 사용할 수 있었고, 그나마 그것도 패링 대거가 대부분 동났다.
“그 같잖은 무기도 거의 다 사라진 것 같군.”
게다가 바포메트도 패링 대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패링 대거를 든 김진석에겐 제대로 공격하지 않고 일부러 빗나가게 하는 등 패링 대거를 경계하고 있었다.
“쿨럭. 그래도 확신할 수 있었다.”
“뭐지? 너의 죽음?”
“정확해. 너의 죽음이다.”
게임 속에서 수백 번을 죽인 악마 바포메트와 지금 눈앞에 있는 마족 바포메트와 하는 행동이 똑같다는 것을.
바포메트는 김진석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놈을 끝내기 위해 다가가려는 그 순간, 김진석은 화살을 쏘아 냈다.
“결국엔 또 이건가.”
놈은 파리를 내쫓듯 팔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물론 김진석의 공격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강철 궁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석은 바포메트에게 달려갔다. 그걸 본 바포메트는 어이가 없다는 식의 웃음을 지으며 언월도를 휘둘렀다.
그런데 그 언월도를 김진석은 깻잎 한 장 차이로 피했다.
바포메트는 우연일 거로 생각해 언월도를 회수하는 척하면서 김진석을 노렸지만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땅바닥으로 달라붙으며 언월도를 피했다.
어느새 바포메트의 코앞까지 다가온 김진석이었지만 놈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발로 차 김진석을 날려 보내려 했지만 그 또한 이미 김진석은 예상하여 먼저 발로 달려갔고, 그 발을 디딤대 삼아 하늘로 날아올라 놈의 눈을 향해 화살을 쏘아 냈다.
“관통 샷.”
“크아악!”
처음으로 제대로 된 유효타가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을 뚫고 날아들 듯이 달려드는 노라가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한 것처럼 바포메트의 발목을 노렸다.
“슬라이서.”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노라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았고, 눈에 박힌 화살을 뽑고 이성을 잃은 바포메트가 이리저리 휘두르는 언월도의 창대에 받혀 뒤로 날아갔다.
“노라!”
이건 예상하지 못한 김진석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날아가는 노라를 잡았다. 급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지만 다행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노라는 끝없는 전투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믿고 기다렸는데 이렇게 기절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때 다이아가 몬스터들을 뚫고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흔치 않은, 후회에 가득 찬 얼굴을 보이고 있었고, 그 뒤로 엘프들이 그녀를 말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김진석은 기절한 노라를 끌어안고 다이아에게 건네주었다.
다이아는 그녀를 받으며 말했다.
“…방법이 있습니까?”
그녀는 노라를 받으며 말했지만 시선은 김진석의 뒤를 향했다. 김진석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고, 그곳엔 어느새 눈의 상처까지 회복된 바포메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김진석을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반드시 네놈만큼은… 죽여 버리겠다.”
그 뒤로 엘프들이 화살과 방패를 들고 김진석을 밀어내며 다이아를 끌어들였다.
“도망쳐야 합니다! 어차피 놈의 목적은 저 남자입니다!”
하지만 다이아는 그들을 제치고 김진석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는 김진석은 무모하지만 언제나 계획이 있는 자였다. 무모하지만 언제나 해결책은 있었고, 그걸 전부 실현한 자가 김진석이다.
그와 함께 수많은 몬스터를 잡았으니 다이아는 알고 있었다. 김진석만큼 몬스터에 대해 잘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