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훈련장 안은 적막으로 휩싸였다.
들이받힌 사시 교수의 얼굴이 함몰돼 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김진석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깨에 박힌 레이피어를 무시하고 시시 교수의 손을, 거구를 이용해 들어 올린 다음 그대로 꺾어 버렸다.
“끄아아악!”
팔의 관절이 사람이라면 꺾일 수가 없는 방향으로 꺾인 시시 교수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승자! 카이!”
김진석은 심판이 대진의 끝을 알리자 어깨에 박힌 레이피어를 뽑았다. 박히다 못해 뒤로 뚫리기까지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도 안 쓰고 그대로 뒤로 돌아 훈련장을 떠나갔다.
* * *
시시 교수가 들것에 실려 나가기 전까지 훈련장은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뼈가 아예 꺾인 상태라 포션을 먹는다고 한들 바로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학생이 교수를 이긴 적은 오랜만이군.”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은 모습을 숨긴 채 김진석의 대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둘이 싸웠다는 소문이 난 이후 원래 쏠리던 이목이 더더욱 쏠려서 부담스러웠다.
“상대의 무기를 몸으로 받다니. 적어도 난 생각지도 못할 텐데 말이지.”
엘리온은 김진석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건 엘리온의 생각만은 아니었는지 대진이 끝나고 시시 교수가 들것에 실려 나가니 그제야 훈련장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지만… 도대체 뭐 하는 남자지?”
“같은 학생을 무기도 없이 제압하더니 이제는 교수까지……. 게다가 저 교수, 꽤 강하지 않나?”
“내가 알기로 까마귀 기사단에서 제일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던데…….”
“허…….”
관중들에겐 김진석의 경기는 가뭄의 단비였다.
학생과 교수의 경기, 학생과 학생의 경기는 볼거리가 없었다.
그나마 학생과 학생의 경기는 서로 진심을 다해 싸워서 볼 만했지만 그래도 학생. 교수와 교수의 싸움을 기대한 관중들에겐 부족했다.
그렇게 학생과 학생의 싸움을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진석이 나타난 것이다.
김진석이 처음 등장했을 때 엄청난 거구를 보고 기대했다. 그리고 김진석은 그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처음에 그가 무기도 없이 가볍게 학생을 제압했을 땐 사람들이 그를 무투가로 오해했었다.
무투가란 이 세계에 얼마 없는, 무기가 건틀렛인 직업으로, 주먹을 사용한 김진석을 보고 오해하기 딱 좋은 직업이었다.
게다가 무투가는 게임이 아닌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 중 하나였으니 아는 사람도 얼마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계속해서 이어지다가 지금 시시 교수와의 경기에서 깨졌다.
비록 단검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무기를 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들이었으니깐.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결국 마지막에 시시 교수를 쓰러뜨린 방식이 관절을 꺾었으니 무투가의 방식이다.
단검을 들었으니 도적이다 등등.
살란 교수와 엘리온의 경기 이후 차게 식었던 훈련장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 * *
“괜찮아?”
“예, 뭐…….”
노라는 김진석의 어깨를 보며 말했다. 레이피어가 두껍지도 않고 얇았기에 어깨에 생긴 구멍도 비교적 작았다.
김진석은 최하급 포션을 상처에 뿌렸고, 노라와 다이아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이 딱히 긴급 상황도 아닌데 왜 뿌리는 거야?”
“아무리 아낀다고 하지만 이건…….”
하지만 김진석은 항상 이래 왔으니 왜 그런 눈으로 보냐는 얼굴로 말했다.
“최하급 포션으로는 쉽게 치유가 안 되는 상처니깐요.”
관통상은 큰 상처였으니 고작 최하급 포션으로 치유가 안 됐다. 마시는 거로만 따지자면 하급 포션 하나로도 치유가 안 될 정도였으니.
하지만 최하급 포션을 상처에 뿌리면 적어도 두 개 이내에 전부 치유가 됐다. 당연히 그만한 고통은 동반되지만.
오로지 김진석만이 생각할 방법이었다.
* * *
대회가 계속 진행되고, 관중들이 기다리고 기다린 날이 다가왔다.
“재밌겠지? 레온하르트.”
“…재미는 잘 모르겠다만.”
바로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의 대진이었다.
엘리온은 온몸을 녹색 로브로 감싸고 있었고, 손에는 밋밋하지만 그 위에 큰 보석이 박혀 있는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도 마찬가지로 칼라 성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은색의 기사 갑옷으로 피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몸을 감싸고 한 손에는 성자의 해머, 한 손에는 레온하르트의 거구를 감쌀 수 있는 수준의 대형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심판이 없었다.
“어차피 둘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없으니.”
그래서 훈련장 전체를 감싸는 칼라 기사단의 인원과 수많은 마법사가 배치되었다. 혹여나 둘의 싸움의 여파에 휘말릴 수 있으니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원래 교수들은 훈련장의 무기만 사용하게 했었지만 하필 김진석이 교수와 싸울 때 둘 다 자신의 무기를 들었으니, 엘리온은 그 모습을 보고 레온하르트에게도 제안한 것이다.
김진석이 둘을 부추기게 된 꼴이었다.
하지만 노라와 다이아, 그리고 김진석은 칼라 기사단의 기사들보다 앞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정예 기사보다도 강력한 이들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딱히 심판이 없으니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고, 시작은 엘리온이었다.
“마력 증폭. 마력 갑옷.”
50레벨 이상의 마법사가 배울 수 있는 마력 증폭. 마법 공격력을 높이는 스킬이다. 마력 갑옷. 마찬가지로 50레벨 이상의 마법사가 배울 수 있는, 방어력을 높이는 스킬이다.
“블리자드.”
엘리온이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가리켰더니 허공에서 수많은 얼음의 송곳들이 생성돼 레온하르트를 향해 떨어졌다.
“수호.”
그걸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던 레온하르트도 자신의 스킬로 대응했다. 레온하르트를 중심으로 금색 보호막이 퍼지더니 엘리온의 스킬, 블리자드를 막아냈다.
수호. 스킬을 사용한 대상자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 주는 스킬이다.
수많은 얼음의 송곳은 금색 보호막에 허무하게 막혔다.
하지만 엘리온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화염 보주.”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는 화염구. 그것의 상위 호환인 스킬이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한 가지 속성의 마법만을 배운다. 게임 속에서는 특정 속성 공격력을 올리는 아이템들이 존재했기에 최고의 효율을 위해서 한 가지 속성의 스킬만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온은 달랐다. 이곳에서는 공격력이 전부가 아니다. 더욱 많은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만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구에 그 위로 화염이 한 번 더 덧대어진 모습의 위협적인 화염 보주는 한 개가 아니었다.
총 세 개의 화염 보주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날아갔지만 레온하르트는 성자의 해머로 하나를 쳐 내고 나머지 두 개의 화염 보주는 방패로 가볍게 막아냈다.
“우리가 서로 간 볼 사이는 아니지 않나.”
너무나도 가볍게 엘리온의 공격을 막은 레온하르트는 도발 아닌 도발을 했다. 실제로 엘리온은 고작 이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화염 보주와 블리자드는 최소 30레벨 이상의 마법사가 배울 수 있는 스킬이다.
“이거 미안하군. 간만에 해 보는 싸움이라.”
“거짓말하지 말게. 살란과 경기도 그렇고, 뒤에서 몰래몰래 훈련하고 있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이런… 들켰나?”
엘리온이 살란과 경기를 할 때 제대로 된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싸운 이유는 간단했다.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굳이 숨기지도 않았지만 엘리온이 정예 칼라 기사단이랑 뒤에서 대련하기도 했었다.
레온하르트가 직접 키운 최정예 칼라 기사단과의 싸움은 레온하르트와의 싸움을 대비하기에 제일 좋은 상대였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하늘을 향해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징벌.”
“메테오.”
하늘에서 거대한 푸른 해머와 하늘을 뒤덮는 붉은 운석이 서로에게 떨어졌다.
“막아야 한다! 칼라 기사단!”
갑작스럽게 둘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킬을 사용하니 관중석에서 난리가 났다. 칼라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장벽을 펼쳐 싸움의 여파를 막아내야 했다.
그나마 레온하르트가 사용한 징벌은 공격 범위가 훈련장 안으로 한정되었지만 엘리온의 메테오는 훈련장을 뒤덮을 수준이었다.
게임 속에서 메테오란 스킬은 궁극기였다. 궁극기란 레이드에서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모든 직업이 배울 수 있는 최후의 수단 같은 스킬이다.
레벨 50 이상부터 배울 수 있는 궁극기는 각 직업에 맞는 여러 궁극기가 있었고, 엘리온은 메테오란 궁극기를 선택한 것이다.
게임 속에서는 스킬을 따로 바꾸지 않는 이상 한번 선택한 궁극기는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인 이곳에서 어떻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궁극기는 엘리온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철벽.”
“마력 장벽.”
엘리온은 일반 스킬인 마력 장벽으로 자신의 몸에 마나로 된 장벽을 둘러 징벌을 막아내려 했다.
레온하르트는 팔라딘이라 직업 스킬의 공격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 무기의 힘을 빌려 스킬을 사용했지만 그 또한 그리 강한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온은 궁극기를 사용했고, 레온하르트도 궁극기로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철벽. 게임 속에서 팔라딘은 아군을 지키는 직업이었고 궁극기도 마찬가지. 아군에게 자신의 생명력에 비례한 보호막을 씌우는 스킬이다.
분명 둘의 거리는 레온하르트의 스킬인 철벽이 닿는 위치였지만 엘리온에게는 철벽이 쓰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황금색 방어막을. 엘리온은 푸른색 마력 장벽을.
그리고 메테오와 징벌은 서로에게 떨어졌다.
* * *
“멋지군.”
김진석은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엄청난 집중력으로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메테오와 징벌이 떨어질 때만 해도 관중석의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비명과 고성이 난무하며 도망가려 했지만 칼라 기사단과 배치된 마법사들이 잘 대처해 주었고, 엘리온도 최대한 그들에게 영향이 안 가게 레온하르트에게만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온의 메테오는 레온하르트의 철벽으로. 레온하르트의 징벌은 엘리온의 마력 장벽으로 생각보다 쉽게 서로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이후에는 스킬의 향연이었다.
엘리온은 수많은 스킬로 레온하르트를 압박했고,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그 모든 공격을 받아 냈다.
레온하르트가 엘리온에게 다가가려 하면 엘리온은 붉은 화염의 용과 푸른 얼음 독수리를 소환해 그를 견제하며 물러났다.
“이거… 이사장님이 이기는 거 아니야?”
주변 관중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레온하르트는 엘리온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고, 한 번의 공격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성이 너무 안 좋군. 엘리온 님도 분전하긴 했지만… 결국엔 레온하르트 님의 승리인가.”
레온하르트의 직업 팔라딘. 방어에 치중된 직업이었고, 물리 방어력보다 마법 방어력이 매우 높은 직업이다.
게임 속 이야기긴 했지만 그건 현실에서도 적용되는지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엘리온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자그마치 2시간이 지난 후.
“항복이다. 레온하르트, 자네가 이겼어.”
엘리온은 후련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적셔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만족했다.
2시간이나 스킬을 계속해서 사용한 엘리온은 마나가 바닥났고, 항복을 선언했다.
“후…….”
과연 레온하르트도 만만치 않았는지 투구를 벗으니 그의 얼굴도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게 이번 대회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이유인 대진이 레온하르트의 승리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