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 *
김진석은 훈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훈련장은 열기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진 운이 워낙 재미가 없었다.
그들이 기대하던 교수와 교수의 싸움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교수와 학생과의 싸움이 전부였다.
당연하지만 교수보다 학생이 훨씬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대진은 거르고 걸러져 둘째 날 혹은 셋째 날에나 있을 거다.
그래도 학생과 학생의 싸움은 서로 실력이 비등비등한 경우가 다반사니 그나마 이번 대진에 꺼진 열기가 다시 붙으려고 하고 있었다.
원래 훈련장보다 배는 더 커진 것 같은 기사 학교 훈련장 안은 콜로세움처럼 가운데만 비워 두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저번 일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길 비네.”
이번 대회에도 당연히 심판은 있었고, 전에 김진석이 살란 교수의 학생들과 모의전을 진행했을 때의 심판과 같은 자였다.
[리안. LV:45]
칼라 기사단의 정예 기사단원인 그는 노라보다도 레벨이 높은 자였다.
김진석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상대, 여학생을 바라봤다. 그런데 김진석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상대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김진석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여학생은 김진석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기숙사장이 낸 시험. 그 시험의 최대 피해자인 여학생이었다. 가장 먼저 김진석에게 단검으로 찔린 여학생 말이다.
금방이라도 기권할 거 같았지만 역대 최고로 많은 관중이 모인 곳에서 기권한다면 그 어떤 교수가 그녀를 자기 기사단에 데려가려고 하겠는가.
그녀는 한 손에 자신의 무기인 직경 1미터 길이의 검, 한 손엔 조그마한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당연히 김진석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상대의 상태를 눈치채고 한숨을 쉬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양해를 구하고 쉬시죠.”
“…아뇨,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여학생은 생각보다 친절한 김진석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심판도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이내 점점 줄어드는 떨림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외쳤다.
“152회 대진! 시작!”
벌써 152회 대진이었다. 이 대회는 행사나 다름없었고, 일반인들도 불러왔다. 모의전의 그 쥐 죽은 듯했던 고요함과 달리 관중석에서 큰 환호성이 들렸다.
그것도 몇 시간째 이어지는 대진에 지쳐서 그나마 조용한 게 이 정도였다.
김진석은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기숙사 앞에서 단검으로 배를 찔린 경험이 있는 여학생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김진석은 일부러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폭발적인 속도를 내며 달려갔다.
여학생은 검과 방패를 들고 긴장하며 걸어오는 김진석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로 달려드는 김진석을 보고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휘두른 칼에 맞을 김진석이 아니었으니, 여유롭게 피하며 동시에 손바닥으로 검 손잡이를 쳤다.
꽉 쥐고 있었지만 김진석의 신체 능력과 역방향으로 가해진 힘으로 인해 그 칼은 하늘로 높게 솟구쳤다.
김진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발로 그녀를 차 버렸다.
당황한 여학생은 방패로 김진석의 발을 막아냈지만 엄청난 힘으로 인해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걸 잠깐 바라보다가 김진석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여학생의 검을 받아 단검 던지듯 여학생에게 던져 버렸다.
땅바닥을 뒹굴며 나가떨어진 여학생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정확히 그녀의 얼굴 옆 땅바닥에 날이 선 채로 박혔다.
“기권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상처 없이 제압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항복할게요.”
“승자! 카이!”
김진석은 심판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훈련장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훈련장은 고요했다.
김진석이 훈련장에서 안 보일 때쯤 그제야 환호성이 들려왔다.
* * *
“금방 끝났네? 2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고생하셨어요.”
훈련장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라와 다이아는 김진석을 반겼다.
뒤에서 카운터 직원이 구경하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실전처럼 해도 되는 겁니까? 상대는 철로 된 검과 방패를 들고 있던데요.”
“너… 룰도 안 봤니? 학생은 자기 무기를 사용해도 되고, 교사들은 훈련장에서 주는 무기를 사용해야 해.”
“심판이 있긴 하지만 교사들까지 막기에는 벅차니깐요.”
정작 대회에 참가하지도 않는 노라와 다이아가 규칙을 더 잘 알았다.
“상처를 줘도 됩니까?”
“영구 신체 훼손만 아니면 상관없어.”
“그래도 당신은 힘을 조절해야 할 겁니다. 연약한 학생들은 당신의 공격을 막기 힘들 겁니다.”
셋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카운터 직원은 멍하니 그들을 보고 있었고, 셋은 또 어디론가 놀러 가고 있었다.
* * *
“고작 두 달 사이에 기술이 많이 는 것 같네.”
“노라와 다이아가 잘 가르쳤군.”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은 훈련장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이미 둘의 대진은 끝이 났고, 둘 다 학생을 만나 대충 상대해 주고 끝냈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권력을 이용해 관중석 예약도 안 했지만 앉아서 김진석의 대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맨손으로 여학생을 제압하는 걸 보고 이야기했지만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노라와 다이아는 딱히 김진석에게 기술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숨 쉬는 걸 따로 배우지 않는 것처럼 그는 기술을 본능적으로 알아내고 습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번 대회에 참가했나? 난 내가 데려온 학생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을 뿐인데.”
레온하르트는 자기가 데려온 김진석의 재능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엘리온은 마땅히 이 대회에 참가할 이유가 없었다.
이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이나 교수들 90퍼센트가 자신의 힘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기사단에 입단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기사단을 홍보하기 위해서가 대부분이다.
나머지 10퍼센트는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의 힘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 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엘리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싸워 본 적이 언제지?”
“…몇십 년 되지 않았나. 악마 침공 때 의견이 엇갈린 거 제외하고는 생각나는 게 없군.”
“그렇지. 그때도 딱히 진심으로 싸운 건 아니었잖은가.”
“…그래서 나와 싸우겠다고? 대회의 힘을 빌려? 굳이 이런 짓을 안 해도 원한다면 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온을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만약 엘리온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는 레온하르트였다.
하지만 엘리온은 그런 가벼운 걸 원하지 않았다.
“수많은 관중 앞에 서면 제대로 된 실력이 나오겠지. 그래야 나중에 말도 탈도 없을 테니.”
“마법사가 팔라딘인 나랑 일대일을 하겠단 말인가?”
게임 속에서는 몸이 약한 마법사는 PVP, 플레이어 간의 싸움에는 약하다는 평이 많았다. 그건 현실인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팔라딘은 PVP 랭킹 최상위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자네도 제일 잘 알지 않은가. 난 절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자네가 그리 전투광인진 오늘 처음 알았다만.”
레온하르트는 엘리온의 열기 서린 눈빛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엘리온은 악마의 침공 이후 몬스터들이 남았다지만 평화로운 이 세계가 조금은 지루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온갖 서류에 파묻혀 생활하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좋은 핑계 거리가 생긴 것이다.
대회라는 아주 좋은 핑계 거리가.
“적당히 하지 말게. 나도 진심으로 할 생각이니.”
“…알겠네.”
* * *
“승자! 카이!”
대회는 금방금방 진행됐다. 둘째 날은 사람이 줄어든 만큼 하루에 두 번 경기를 치렀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상대가 둘 다 학생이었던 김진석은 시간 끌 거 없이 순식간에 그들을 압살했다. 두 경기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레벨도 레벨이지만 경험의 차이로 김진석은 무기도 들지 않고 학생들을 상대한 것이다.
“저 사람 누구지? 교수야? 겉으로 보기에는 교수 같긴 한데.”
“너 몰라? 이번에 레온하르트 님이 데려온 학생이야. 안 좋은 소문이 많긴 하고 실제로 기숙사장이 낸 시험에서 같은 학생을 찔렀다던데.”
“뭐? 그냥 범죄자 아니야? 겉보기에도 그렇게 생겼구만.”
“기숙사장이 공인했고 레온하르트 님도, 엘리온 님도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어. 어쨌든 그도 학생이고 괴물이야. 애들 가지고 노는 거 보이지? 저 남자랑 웬만하면 엮이지 마.”
김진석은 어떻게든 학생을 배려한 거지만 본의 아니게 학생들을 가지고 논 게 되었다. 물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김진석은 상관하지 않았다.
노라와 다이아, 그리고 김진석 셋은 김진석의 대진이 끝났는데도 훈련장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관중석을 예약하고 시간에 맞춰 들어갔다.
특히 오늘 같은 대진은 예약하기 쉽지 않았지만 교수 둘, 그것도 엘리온과 레온하르트의 총애를 받는 둘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셋이 시간을 내면서까지 구경할 가치가 있는 대진이었다.
“이사장님과 맞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바로 이사장인 엘리온의 대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대진을 구경하지 않았던 셋이 무슨 바람이 생겨서 보러 온 것일까.
그건 상대에게도 있었다.
“나도 벌써 살란 교수와 대진이 붙을 줄은 몰랐네.”
바로 살란 교수. 전에 김진석이 그의 학생과 모의전을 벌였었다. 그는 기사 학교에서 세 번째로 강한 자였다.
[살란. LV:45]
관중들이 염원했던 교수와 교수의 싸움보다 더한, 이사장과 학교에서 세 번째로 강한 교수와의 대진이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이사장은 특히 관중들에게 더더욱 볼거리였다.
살란은 김진석과 비견될 만한 거구답게 자신의 몸만 한 거대한 창을 들고 있었고, 엘리온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교수들은 훈련장에서 주는 나무로 된 무기를 사용해야 했지만 엘리온은 자신은 괜찮으니 살란은 본인의 무기를 들게 허락해 주었다.
레벨이 45인 심판 리안은 언제나 완전 무장한 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고, 같은 레벨인 살란의 경기에는 더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온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대진에 한해선 심판인 그가 엘리온보다도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리온은 만약의 상황조차 안 낼 정도의 레벨이었다.
[엘리온. LV:57]
“대진! 시작!”
기다릴 것도 없이 대진은 바로 시작됐다.
살란은 엘리온이 스킬을 사용하기 전에 붙으려고 달려 나갔다. 그 거대한 창을 들고 있는데도 그의 속도는 관중의 절반 이상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력탄.”
모든 마법사가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는 스킬 마력탄. 기본적인 스킬이고 위력이 강하지 않지만 그건 엘리온에게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구의 형태인 마력탄은 고작 골프공만 한 크기가 일반적이지만 엘리온의 마력탄은 거의 1미터에 다다랐다.
“너무 얕보시지 마시죠, 이사장님.”
하지만 살란은 아무리 엘리온이라도 마력탄에 당할 자는 아니었고, 거대한 창을 단검 휘두르듯 휘둘러 마력탄을 쳐 냈다.
물론 엘리온의 스킬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