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때 갑자기 푸른 마나가 나무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김진석은 날뛰는 흑호를 안고 어딘가 익숙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푸른 마나가 계속해서 모여 사라지더니 나무로 된 활이 생겨났다.
김진석은 그 활을 잠시 바라보다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받아도 되겠습니까?”
퀘스트의 이름과 저 활의 이름이 세계수의 인정인 이유가 있었다. 세계수의 의지는 후에 쳐들어올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서 플레이어를 도와주는 거였다.
이 세계에 세계수는 사라졌지만 그 의지는 남아 있었고, 김진석은 세계수에게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돌아올 리 없는 그 대답이 푸른색 글씨를 빌려 말했다.
[세계수는 당신을 인정했습니다.]
갑자기 나온 푸른색 글씨였지만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로 된 활을 집었다.
“감사합니다.”
[세계수의 인정. 공격력 50. 내구도 무한.
마기를 가진 대상을 공격하면 공격력 +50%
세계수의 인정을 받은 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그마치 레벨 제한이 없는 아이템이었다. 공격력만 보자면 40레벨 후반대에서 60 사이의 레벨이 사용할 만한 아이템이었다.
게임 속에서 50레벨쯤에 퀘스트를 받을 수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세계수의 인정의 생김새는 기이했다. 평범한 나뭇가지 같은 모양새에 나뭇잎이 살아 있는 것처럼 파릇파릇하게 달려 있었다.
실제로 세계수의 인정은 살아 있었다. 내구도가 무한인 것 또한 이 이유와 같았다.
관리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하루에 한 번 식물에 물 주듯 물만 주면 되었다.
게다가 활시위가 없었으니 마치 부메랑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김진석이 세계수의 인정을 잡자 나무줄기가 나와 활시위를 만들어 주었다.
세계수의 인정이란 퀘스트는 무조건 활을 주는 퀘스트다. 물론 그러면 불공평하니 세계수의 인정을 들고 엘프의 마을을 찾아가면 본인의 직업이 쓸 수 있는 아이템으로 바꿔 준다.
“당연히 내가 써야겠지.”
김진석은 활을 사용하니 굳이 바꿀 이유는 없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활을 사용하면 무조건 엘프들이 알아차릴 텐데 말이지…….”
엘프들이 세계수의 기운을 모를 리가 없으니 인벤토리가 아닌, 그냥 들고만 있어도 눈치챌 것이다.
그래도 세계수의 인정을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으니 엘프들이 그를 적대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더 문제였다.
엘프들은 세계수가 사라진 이후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었다.
실제로 수많은 엘프가 엘프의 마을에 들어가 은거했고, 아닌 엘프들은 새로 사귄 인간들과 같이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 냈다.
그런데 갑자기 세계수의 흔적을 가진 인간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세계에 퍼져 있는 엘프들이 전부 몰려들 것이다.
김진석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죄송합니다만 필요할 때만 사용하겠습니다.”
* * *
대회 당일.
칼라 성의 사람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다른 성과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냥 길거리만 해도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대회는 훈련장에서 진행됐다. 훈련장은 엘리온이 직접 개조하고 단단한 소재로 공사를 진행했고, 웬만한 힘으로는 절대 부술 수 없게 만들어졌다.
물론 레온하르트가 참전하는 순간부터 의미가 없어졌지만 말이다.
“준비는 다 되셨나요?”
다이아는 김진석을 보며 말했다. 김진석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긴가민가했었다. 게임 속에서 보던 모습과 다르게 평범한 학생이 입을 법한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게임 속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전투 복장은 자주 봤었다.
왕딱정벌레를 잡을 당시에 그녀는 기사 학교에서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산책 나온 것처럼 몬스터를 잡았다.
하지만 점차 레벨이 높은 몬스터를 잡으러 갈 때는 그녀도 마실 나온 것처럼 할 순 없었다.
그녀의 전투 복장은 전형적인 엘프의 복장과 같았다.
초록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죽 갑옷과 갈색 긴 바지로 하체를 전부 가리고 있었고, 종아리를 절반 정도 뒤덮는 부츠까지. 노출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성격을 보여 주는 옷이었다.
“너… 만날 남자 있니? 뭐 이리 꾸미고 왔어?”
그런 다이아가 노라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차피 노라와 다이아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꾸미고 왔다.
노라는 배꼽과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바지도 허벅지를 간신히 덮을 만한, 노출도가 매우 높은 옷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는 마치 무도회 같은 데서나 볼 법한 드레스를 입고 왔다. 노출도가 전혀 없던 전투 복장과 달리 원피스는 가슴 윗부분 살짝하고 어깨를 드러냈다.
팔 부분은 옷이 아예 없는 다이아에게는 매우 노출도가 높은 복장이었다.
“나름대로 꾸며 본 거입니다. 그래도 이 복장은 아이템이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어… 어. 그래.”
다이아답다면 답달까. 꾸미긴 했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김진석은 언제나 같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에게는 기사 갑옷도 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는 김진석에겐 독이 되었고, 과감히 팔아 버렸다.
아이템인 만큼 무게도 거의 없었고 입는 데 불편함도 거의 없었지만 아예 없는 게 아니었으니 노라와 다이아에게 자문했고, 팔아 버린 것이다.
물론 김진석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굳이 꾸밀 이유가 있습니까?”
“여자들의 자기만족 같은 거야.”
“…다이아 씨도요?”
“네… 뭐.”
그런 거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다이아도 그리 말하니 김진석은 충격받았다. 물론 그것도 잠시. 김진석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너 대진표는 봤어?”
“예, 학생인 것 같더군요. 별로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마세요. 당신만큼 재능을 가진 학생은 없지만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재능이 있다는 거니.”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싸울 생각입니다.”
대회에 참가한 자들의 대진표는 당일에 발표된다. 참가한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하루에 한 대진씩 진행됐다.
김진석의 대진은 오후. 아직 오전밖에 안 돼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같이 다닐래?”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다이아 씨는 따로 볼일이 있으신가요?”
“아뇨, 정해 둔 건 없습니다.”
다이아의 말에 노라는 혀를 찼다. 그렇게 셋은 함께 사람이 너무 많아 혼잡스러운 칼라 성을 돌아다녔다.
셋은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보기 드문 거구의 김진석과 서로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 둘의 조합은 누가 봐도 특이했다.
물론 셋은 신경도 안 쓴 채 행사를 즐겼다.
“이거 맛있다. 넌 어때?”
“맛있군요.”
“저한텐 너무 다네요.”
“그럼 이건?”
“맛있군요.”
“나쁘지 않네요.”
“…이건.”
“맛있군요.”
“심심하니 맛있네요.”
“…….”
행사의 기본은 당연히 음식. 김진석도, 다이아도 이런 거엔 젬병이었으니 노라가 둘을 이끌고 돌아다녔다.
그나마 다이아는 곧잘 맛 표현을 해 줬지만 김진석은 모든 음식에 맛있다는 표현이 전부였다. 그 어떤 음식을 줘도 맛있다고 하니 노라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제는 오기가 생겨 온갖 음식을 먹여 봤지만 김진석은 전부 맛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뭘 먹고 살았니?”
“뭐라도 먹을 수 있으면 감사했죠.”
이름 모를 시골 마을에서, 김진석은 음식물 쓰레기 수준의 음식을 먹고 버텨 왔었다.
생고기도 먹을 만하다고 말할 정도이니 음식의 형태만 유지한다면 전부 먹는 김진석이었다.
“에휴… 내가 너한테 뭘 바라니.”
결국 노라도 포기하고 알아서 즐기기로 했다. 노라가 주는 걸 아기 새처럼 받아먹는 다이아와 김진석은 신선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주위의 온갖 시선을 다 끌며 돌아다니다가 생각보다 일찍 김진석의 대진이 찾아왔다.
* * *
“어떻게 된 겁니까?”
“다들 대진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들 일찍 끝나서 카이 님의 차례가 빨리 오게 됐습니다.”
셋은 같이 훈련장으로 찾아왔다. 이곳은 어느새 콜로세움처럼 변해 있었고, 카운터처럼 보이는 곳의 안내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알고 보니 하필 교사와 학생끼리 대진이 붙어 싱겁게 끝나 버린 것이다. 대진이 완벽히 랜덤으로 정해졌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선수 대기실은 따로 있습니다만, 지금 상대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참여하셔야 합니다. 노라 교수님과 에메랄드 교수님, 두 분께서는 따로 예약을 안 해 두셨기 때문에 훈련장으로 들어가시긴 어려울 겁니다.”
“알고 있어요. 첫날엔 딱히 볼 것도 없을 테니 일부러 안 했어요.”
“마찬가지입니다.”
카운터의 여성 직원은 그녀들이 실수했겠거니 해서 말한 거지만 그녀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황한 그녀는 둘의 제자인 김진석을 바라봤지만 정작 대회 나가는 당사자인 김진석은 무덤덤했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한 직원이었지만 자기 학생이 대회에 나가는데 보지도 않는 교수는 처음이었다.
“서운하지 않으세요?”
“아뇨, 전혀.”
즉답이었다. 직원은 귀찮음을 감수하고 말했지만 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당황했다. 그런 직원을 본 노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뻔히 보이는 결과는 재미가 없어. 레온하르트 님과 엘리온 님의 경기도 마찬가지지.”
첫날 모든 대회가 있다는 건 당연히 엘리온과 레온하르트의 경기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노라도 다이아도 둘의 힘을 알고 있으니 딱히 구경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힘이 비등한 자들끼리 싸워야 힘을 보여 주기라도 할 텐데 하필 둘의 대진은 둘 다 학생이었다.
“기다리고 있다니 가 보겠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빨리 끝낼 거지? 할 것도 없는데 기다리지, 뭐. 너… 에메랄드 교수님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셋을 보고 직원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직원은 김진석을 알고 있었다.
칼라 성, 기사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김진석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얼굴은 잘 모르지만 둘의 곁에 있는 아름다운 교수 둘과 그의 거구는 모를 리가 없었다.
“상대도 당신과 같은 학생인데 너무 방심하시는 거 아닌가요?”
직원은 두 번째 귀찮음을 감수하고 물었다.
“같은 학생이라…….”
김진석과 노라는 무시하고 김진석은 훈련장으로, 노라는 근처를 서성이며 돌아다녔는데 오히려 다이아가 직원에게 말했다.
“그를 같은 학생으로 보는 건 당신이 그거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독설을 맞은 직원은 다시 한번 당황했다. 언제나 온화하고 웃음을 짓는 다이아였지만 그건 그녀의 가면 에메랄드 교수였다.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의 경기를 한 번 보세요. 시간은 별로 안 걸릴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다이아는 그 자리를 떠났다.
* * *
“에메랄드 교수님… 저런 성격인 줄 몰랐는데.”
카운터의 여성 직원은 황당했다. 그녀는 기사 학교의 학생이었다. 제대로 졸업까지 한 그녀는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왔지만 모든 게 베일에 싸인 에메랄드 교수가 갑자기 그녀에게 독설을 한 것이다.
“실제로 같은 학생을 상대로 모의전을 하면서 20연승을 했으니 그럴 수 있지.”
그런 학생을 자기가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으니 그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에메랄드 교수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거의 30분 간격으로 손님들이 왔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들키면 고작 한 소리 듣고 말 것이다.
“나보다 약하기만 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