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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52화 (52/201)

52화

“그런데 왜 가이크 성에서 도망쳤어? 공문에는 철창이 느슨해진 사이에 도망쳤다고 하던데?”

노라는 마족 도시에서 있는 일보다 가이크 성에서 도망친 이유를 물었다.

“절 다짜고짜 감옥에 집어넣더군요. 물론 제가 마땅한 신분증도 없으니 이해는 했습니다만, 이후에 갑자기 몬스터가 몰아치고 처음 보는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저를 잡으려고 나온 줄 알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가이크 성에서의 일은 이미 다 알려진 상태였다.

“실제로 널 잡으려고 나온 걸 수도 있겠네.”

“그렇다면 레온하르트 님에겐 알리지 않는 게 좋겠군요. 아니, 그냥 저희만 아는 사실로 남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한동안 가만히 있던 다이아가 말했다.

김진석은 그녀들에게 어쩔 수 없이 알렸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다이아가 먼저 앞서서 그렇게 말한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입니다. 실제로 가이크 성에서 사상자가 꽤나 있었습니다. 김진석, 당신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당신은 그 자리를 도망쳤고, 당신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난 겁니다.”

다이아의 말은 타당했다. 뭐가 어찌 됐건 김진석은 그 자리를 도망쳤다. 물론 남아 있었어도 좋은 꼴은 못 봤겠지만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자들은 김진석이 뭔가 걸리는 게 있어 도망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너무하건 아니건 벌어진 일입니다. 어쨌든 이 사실을 레온하르트 님이 아시면 크게 노할 겁니다. 엘리온에게 알려 봤자 어차피 레온하르트 님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이니 마찬가지이고요. 그냥… 저희 마음속에 묻는 게 좋겠습니다.”

다이아는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제야 김진석도, 노라도 다이아의 심정을 알아차렸다.

악마가 침공한 지 대략 40년이 흘렀다. 그리고 비명의 숲 원정대가 꾸려진 후 실종된 지 30년 정도가 흘렀다.

다이아는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소식을 40년 만에 들을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는 마족의 실험체로 이용되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종족의 실험체로.

살아 있다는 걸 안 다이아였지만 그녀를 구하러 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구하러 가고 싶지만 구하러 갈 수 없었다.

게다가 정의감 넘치는 레온하르트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들을 구조한다고 또 다른 원정대를 꾸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과거 엘리온이, 비명의 숲 원정대가 꾸려질 때 일부러 레온하르트에게 그 소문이 안 들어가게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혹시 다나가 제 얘기를 했습니까?”

“아… 시간이 부족했기에 잡담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저 자신에게 백은발의 아름다운 엘프 친구가 있다고… 그런 말씀만 하셨습니다.”

김진석은 늘어 가는 거짓말에 죄책감도 늘어났다. 실제로 다나, 그녀가 다이아를 그리워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임 속에서는 마족에게 세뇌돼 마족으로 변해 버린 다나만 존재했으니깐.

하지만 김진석은 거의 울먹이며 말하는 다이아에게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 *

기사 학교에서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거짓이긴 했지만 김진석의 과거를 안 순간부터 다이아와 노라는 성심성의껏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노라는 김진석의 과거를 안타까워했고, 다이아는 김진석의 재능을 보고 어떻게든 강하게 키우기 시작했다.

“당신의 지식이 있다면 비명의 숲을 넘어 마족 도시로 갈 수 있을 겁니다.”

다이아는 마족 도시로 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친구가 살아 있다는 걸 안 그녀는 오히려 김진석을 전보다 더 강하게 키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아이템까지 사 주려는 걸 김진석이 말릴 정도였다. 하지만 김진석의 말이 더욱 그녀의 마음을 지폈다.

“포션만 보장해 주시면 수업의 강도가 어떻든 받아들일 의향은 있습니다.”

그 이후로 칼라 성에서 멀더라도 김진석이 잡을 만한 몬스터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수업이 아니라 그냥 레벨 업 하러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정도였다.

김진석은 자신보다 레벨 높은 사람에게 게임 속 용어로 쩔 받는다는 느낌으로 그녀의 지원으로 몬스터를 잡으러 갔다.

김진석이 부탁해도 모자랄 판에 다이아가 적극적으로 나서니 김진석은 더욱 좋았다. 그녀가 있다면 변수도 최대한 줄어들 테니.

오히려 노라가 그 둘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더 지났다. 김진석이 기사 학교에 입학한 지 세 달이 되던 때 김진석의 레벨은 이미 32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노라마저도 레벨이 43이 되었고, 곧 다이아도 레벨 업을 할 것만 같았다.

엘리온과 레온하르트가 셋을 말릴 정도로 날이면 날마다 몬스터를 잡으러 나갔고, 외박을 할 때도 비일비재했다.

그렇지만 셋은 그만큼 강해졌고, 이제는 셋이 파티가 된 것 같았다.

셋의 합은 딱딱 맞았고, 이제는 다이아와 비슷한 레벨의 몬스터를 잡으려고 도전할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온이 그 위험한 행동을 간신히 막아냈다.

노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다이아와 김진석은 안타까움의 한숨을 쉬었다.

“진짜 뭐 강해지지 못해서 죽는 귀신에 쓰였어? 왜 그러는 거야, 너네.”

그렇게 그들의 폭주가 잠깐 멈칫했을 때. 학교에서 공식 행사가 있었다.

“대회요?”

“응, 대회.”

“…제가 굳이 참가할 이유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번 대회는 학생만 참가하는 게 아닌 교수까지 전원 참가하게 됩니다.”

정확히 8일 뒤 있는 학교 공식 대회. 그건 학교 내 최강을 가리는 대회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참가하고, 대진은 랜덤으로 진행된다.

즉, 학생과 교수가 싸울 수도 있다는 거다.

레벨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레벨에 관계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유흥거리다.

학교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일반인들도 불러들여서 하는 기사 학교 최대의 행사였다.

당연하지만 행사 참여는 강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참가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기사단에 입단하려고 하는 건데, 학교에 가장 큰 행사에서 그들이 눈에 띈다면 기사단에 들어가기 쉬워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김진석은 그런 건 관심 없었고, 그가 맘에 드는 건 따로 있었다.

“교사랑 정식으로 싸울 수 있다는 거죠?”

그의 눈에는 학생 수준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몇몇 교수도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이니.

그래도 강한 교수들은 노라보다도 레벨이 높은 교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도 더더욱 김진석은 싸워 보고 싶은 자가 있었으니.

“이번엔 레온하르트 님도, 엘리온 님도 참가한다던데.”

학교 이사장과 칼라 성의 성주인 둘까지도 참가한다고 한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이번 행사 대회는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다.

당연히 김진석은 엘리온과 레온하르트를 이길 수가 없었다. 물론 이길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저 경험이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와 아무 조건 없이 싸울 수 있는 경험.

“노라와 다이아 씨도 참가하시나요?”

“아니, 난 딱히.”

“저도 참가하진 않습니다. 얻을 게 없으니깐요.”

둘도 자신의 기사단이나 학생에게 잘 보일 마음 따위는 없으니 당연했다.

그렇게 김진석은 대회가 열릴 때까지 둘과 함께 더더욱 몬스터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 * *

일주일 후.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엘리온과 레온하르트도 참여하는 이 대회는 대회가 만들어진 이후 가장 크게 개최되고 있었다.

이 대회는 기사 학교가 만들어진 후 1년도 안 돼서 3년마다 개최되는 큰 행사였다.

일반인들도 참여하는 이 행사는 언제나 크게 개최됐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

일반인들이 참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남 싸움 구경이다.

게다가 재능 넘치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싸움까지.

강력하고도 유명한 기사들이 서로 싸우는 건 좋은 구경거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강력한 엘리온과 레온하르트마저 이 대회에 참가한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누가 놓치겠는가.

그래서 지금 칼라 성의 길거리는 매우 번잡스러웠다. 대회 하루 전이라 그런지 다들 분주하게 뭔갈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번잡스러운 칼라 성을 나와 바깥을 배회하고 있었다.

“다이아 교수도 오늘은 쉬래. 이걸 내가 왜 대신 전해 줘야 한담… 아무튼 내 수업도 이제는 딱히 의미가 없으니 푹 쉬어.”

노라의 수업이 의미가 없다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이아는 항상 김진석을 한계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김진석이 활을 제대로 다루는 걸 보고 싶어 활만을 사용하라고 했지만 이후에는 레벨 업에만 중점을 둬 얼마든지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 걸 허락했다.

그래서 김진석은 항상 첫 공격에 활을 사용하고 몬스터가 다가오면 단검을 휘두르는 방식을 사용했다.

김진석에겐 노라의 싸움 방식과 다이아의 싸움 방식이 녹아 있었다.

게다가 다이아와 노라도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노라는 다이아에게 단검을 알려 주었고, 다이아는 활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전부 갖춘 게 김진석이었다.

그런 김진석은 대회 전날 새벽에 칼라 성 근처에 있는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새벽과 대회가 겹쳐서 그런지 아무 사람도 없었고, 김진석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조그마한 흑호가 같이 걷고 있었다.

김진석은 이 세계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여유롭게 길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언제나 뭔가에 쫓기듯 몬스터를 죽여 왔지만 처음으로 여유를 가진 것이다.

물론 여유를 가지는 것도 좋지만 김진석이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브 퀘스트.”

게임 속에서 서브 퀘스트를 받는 곳 중 하나였다.

이곳이 산책로가 된 이후 많은 엘프가 이곳을 찾았다.

이곳이 산책로가 된 이유는 하나. 악마의 침공으로 인해 사라진 세계수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엄청난 크기의 나무가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마나를 볼 줄 아는 엘프들은 특이하게도 마나가 모여 있는 한 나무를 바라보곤 했다.

나무 크기는 조금 큰 편이었지만 마나가 모여 세계수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앞에 서면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퀘스트 이름이… 세계수의 인정이었나.”

세계수. 엘프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엘프는 세계수를 숭배하고 지키며 세계수도 마나를 정화해 엘프들에게 나눠 준다.

사실상 엘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 대부분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세계수였다.

악마들의 침공 때 악마의 눈에 거슬리던 세계수는 가장 먼저 없애야 할 대상이었고, 엘프들은 필사적으로 지켰지만 결국 그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세계수의 의지는 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 의지가 지금 김진석의 눈앞에 있는 이 나무에 서려 있는 것이었다.

서브 퀘스트긴 하지만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필수로 해야 하는 퀘스트였으므로 사실상 메인 퀘스트로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퀘스트의 내용은 고작 이 나무를 살펴보기가 전부인데 말이지.”

게임 속에서는 그냥 이 나무 앞에 서서 상호 작용을 하면 알아서 퀘스트가 받아지고 깨지는, 아주 간단한 형식이다.

상호 작용을 하면 나무의 푸르른 마나가 모여 퀘스트의 이름 그대로 세계수의 인정이란 걸 받는다.

문제는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흑호야.”

김진석은 평상시에 흑호를 방에서만 있게 했고, 그런 흑호는 오랜만에 밖을 나돌아 다니니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 흑호가 세계수의 푸른 마나가 모여 있는 나무 앞을 돌아다녔고, 김진석은 그런 흑호를 안으러 길을 벗어나 나무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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