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엘리온과 레온하르트 】
“그래서 뭐… 마족은 아니지? 이름이 특이하긴 하네.”
노라는 김진석보고 마족이 아니냐고 물어봤지만 정작 그녀는 딱히 마족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아니, 진짜 마족 아니야? 사기에도, 그 이상한 인간 같은 몬스터 굴에 들어갔을 때도 넌 멀쩡했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런데 다이아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지금껏 차가운 표정이지만 김진석을 두둔한 모습과는 다른,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라와 김진석을 바라봤다.
“너… 누구 죽일 눈빛이다?”
“당신이 직접 말하세요. 김진석. 왜 그녀가 당신을 마족이라 생각하는지.”
김진석은 갑자기 바뀐 그녀의 태도에 당황했다. 그때 김진석의 머리 구석에서 게임 속 다이아의 배경이 생각났다.
* * *
다이아와 엘리온은 엘프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엘프였으니.
하지만 악마가 이 세계를 침공해 왔고, 그들은 인간을 비롯한 여러 종족과 합세해 결국엔 악마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엘프 마을로 돌아가는 걸 선택하는 게 아닌 인간들과 공존하는 생활을 선택했다.
특히 다이아와 그녀의 오빠인 엘리온은 레온하르트를 비롯한 여러 인간과 친해졌으니 당연한 이유였다.
하지만 악마를 몰아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으니, 그들이 남기고 잔 잔재인 몬스터들이 세계를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필두로 마족이 있었으니.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그들은 대부분 악마 쪽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니, 가장 많이 인간들에게 피해를 입힌 자들이 바로 마족이다.
과거에 마족이 한 차례 인간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과는 특정 부분만 다른 외견을 마법으로 가려 인간으로 변장하고 인간들을 선동해 비명의 숲으로 원정대를 꾸리게 했다.
지금 당신들이라면 비명의 숲을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강한 인간들을 꼬드겨 비명의 숲으로 들어가게 했고, 그들은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 실종되었다.
레벨 높은 인간들은 대부분 악마의 침공에서 버텨 낸,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었고, 그들은 매우 귀했다.
그런 인간들이 대거 비명의 숲으로 들어가 실종된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다이아의 유일한 인간 친구, 다나가 있었다.
다나의 레벨은 45였고, 그 당시 다이아보다도 높은 레벨이었다. 그녀는 다이아와 마찬가지로 같은 궁수였고, 어떻게 보면 다이아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도 인간으로 변장한 마족의 꼬드김에 넘어가 비명의 숲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인간들에겐 변장한 마족을 판별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하지만 엘프는 달랐다. 기운에 민감한 엘프들은 비명의 숲 원정대를 꾸리게 한 장본인이 마족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고, 다이아는 그렇게 눈 뜨고 자신의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바로 마족에게.
그 이후로 다이아는 물론이고 다른 인간 친구를 뒀던 엘프들은 마족을 극히 혐오하게 된 것이다.
* * *
다이아는 물론이고 엘리온도 마족을 싫어했다.
하지만 엘리온은 마족으로 추정되는 김진석에게 다른 감정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가 느끼기에는 마족의 마기가 김진석에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깐.
그건 다이아도 마찬가지였고, 김진석이 비명의 숲 너머에서 왔다고 하니 혹시 실종된 자신의 친구인 다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마족의 수법은 천차만별이었고, 비명의 숲 원정대 사건 이후에도 온갖 수법을 이용해 인간들에게 해를 끼쳐 왔다.
다이아는 지금 김진석이 마기를 완벽히 숨길 줄 아는 마족임을 의심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김진석!”
그녀는 지금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노라도 다이아의 모습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다이아는 전처럼 활을 겨누고 있진 않았다.
그저 부들거릴 정도로 손으로 활을 꽉 쥐고 있을 뿐.
물론 김진석은 다이아의 친구인 다나뿐만 아니라 원정대가 어떻게 됐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당신의 친구는 살아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김진석의 뺨에 상처가 났다. 다이아가 순식간에 화살을 쏘아 낸 것이다. 노라도 순간적으로 반응했지만 김진석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당신이… 제 친구를 어떻게 알죠?”
다이아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금방이라도 실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당사자인 그녀에게 직접 들었으니깐요.”
후에 나올 게임 속 스토리지만 다나는 마족들에게 잡혀 있었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대부분 원정대원이 마족들에게 잡혀 있었고, 그들을 실험에 쓰고 있었다.
그 실험은 바로 인간을 마족으로 만드는 것.
마기를 살아 있는 인간에게 강제로 주입해 살아남으면 마족이 되는, 매우 단순무식한 실험이었다.
플레이어가 레벨이 60이 다 됐을 시점에 퀘스트가 나오고, 비명의 숲을 공략하고 그 너머에 있는 마족의 도시로 향한다.
그때 서브 퀘스트 중 하나인 다이아의 부탁을 받으면 그녀의 친구인 다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족의 실험이 성공해 마족으로 변해 있었고, 결국 플레이어는 다이아와 함께 직접 다나를 죽이게 된다.
그때 다나의 나이가 자그마치 60살이었지만 마족으로 변한 그녀는 전성기 시절 그녀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다나, 그녀는 마족의 실험체로 잡혀 있습니다.”
그 말에 다이아는 활에서 손을 놔 버리며 고개를 숙였다.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흐느끼는 목소리가 김진석의 귓가에 들려왔다.
“살아 있었구나…….”
처음으로 친구의 소식을 듣고 차갑디 차가운 그녀의 가면이 깨진 순간이었다.
주변에는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리고 있을 그때 노라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너무 오래 있었어. 주변 분위기가 이상해. 빨리 나가자.”
그녀의 말대로 주변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왕딱정벌레가 모든 걸 먹어 치운다고 한들 새 소리와 바람 소리는 들렸는데 지금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이아도 흐느낌을 멈추고 그녀의 말에 동의했고, 셋은 숲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갔다.
* * *
셋은 아무 말도 없이 칼라 성으로 돌아왔다.
노라도, 김진석도, 다이아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칼라 성으로 돌아왔다.
다이아는 칼라 성까지 오면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고, 셋은 자연스럽게 김진석의 방으로 향했다.
기숙사장은 노라와 더불어 다이아의 정체를 대충 아는데, 그녀도 함께 김진석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셋은 신경도 안 썼다.
“그래서… 다나가 마족에게 잡혀 있다는 말은 뭐죠?”
다이아는 칼라 성까지 오면서 그거 하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김진석도 필사적으로 스토리를 생각해야 했다.
“제가 비명의 숲 너머에서 온 건 대충 알고 계시겠죠. 그곳은 이곳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성이 있지만 그곳의 주인은 마족입니다. 사는 종족만 다를 뿐 이곳과 별반 다를 건 없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간에게 우호적인 마족들만 모여 사는 곳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마족은 아니었다.
“마족의 실험체란 말 그대로입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계속해서 사람의 몸에 뭔가를 주입하더군요. 하지만 그걸 주입 당한 인간들은 대부분, 아니 전부가 죽었습니다만 단 한 명, 다나 님 그분만이 살아남으셨습니다.”
이 말 또한 거짓은 없었다. 마족의 실험체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다나였으니.
하지만 노라도, 다이아도 김진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작자는 아니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물론 김진석은 이 질문을 예상했다.
“저도 실험체 중 하나였으니깐요.”
“…뭐?”
노라는 김진석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다이아는 아니었다.
“실험체 중 하나만 살아남았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하지만 다이아의 말에 김진석은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말해야만 했다.
“몇몇 큰 마족의 도시에서는 인간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마족에 의해 사육당한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입니다.”
실제로 대부분 마족 도시에서는 인간들을 사육했다.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없었다.
인간들은 마족들의 철저한 감시 아래 살아가며 그 어떠한 행동도 용납받지 못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철창에 갇혀 마족의 실험체로 살다가 죽는 날만을 기다린다.
왠지 모르겠지만 비명의 숲에서 인간들이 자꾸 넘어와 붙잡히니 마족들에게 인간들이 마를 날은 없었으니.
어차피 김진석의 얘기는 증명도 할 수 없을뿐더러 비명의 숲 너머로 가는 일은 아직 한참 남았다.
게다가 간다고 한들 인간들이 침공하는 순간 마족들이 잡은 인간들을 인질로 협박하거나 죽여 버리기 때문에 김진석의 거짓말은 들통날 수가 없었다.
“…….”
김진석은 연기를 해 본 적도 없고, 애초에 감정을 숨기는 법도 잘 모르니 그저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노라와 다이아의 눈에는 김진석이 마치 슬픔을 참고 최대한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진석은 어차피 증명조차 하지 못하는 말이었으니 뭔가 더 추궁할 거 같아 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말은 없었다.
다이아는 잠시 눈을 감으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노라는 마치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너… 괜찮은 거 맞니?”
“예? 네, 어차피 그곳에서 탈출했으니 문제는 없습니다.”
“잠시만요.”
노라는 김진석을 걱정해 주었고, 김진석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다이아가 김진석의 말에 반응했다.
“어떻게 마족의 도시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거죠?”
김진석이 다나라는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됐다. 비명의 숲 원정대가 꾸려졌을 때는 김진석이 태어나기도 전이었고, 그 이후 다들 그 사실을 쉬쉬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거론됐을 때부터 김진석의 말에는 신용이 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는 끝까지 신중했고, 김진석을 의심했다.
하지만 김진석에겐 치트키가 있었다.
“다나 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그분은 마족의 실험에서 살아남았고, 실제로 이리저리 마족들에게 끌려다녔습니다. 그때마다 다나 님은 그곳의 지리를 파악했고, 파악한 모든 지리를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나가…….”
다이아는 다나를 회상하고 있었다. 레벨이 자그마치 45나 되는 다나는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었으니. 하지만 그녀의 의심은 끝나지 않았다.
“철창에 갇혀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탈출한 거죠?”
“다나 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처음 그녀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59살이라고 하더군요.”
게임 속에서 스토리상 그녀의 나이가 60일 때 마족이 된 다나를 만난다. 현실이 된 지금은 그때보다 1년 전인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다이아 씨와 다를 것 없이 보였습니다. 매우 젊어 보였죠. 마족의 실험으로 그렇게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힘은 마족들의 생각보다 강해진 것인지 철창을 뚫고 나와 소란을 피웠습니다. 전 그사이에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철창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거죠?”
“우연입니다. 그저 바로 옆 철창에 다나 님이 계셨을 뿐이죠. 제가 마족들에게 끌려가 실험에 사용되기 직전에 다나 님이 도와주신 겁니다.”
마지막 말까지 듣고 나서야 다이아는 김진석에 대한 의심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