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모의전을 하겠다고 정한 바로 다음 날.
노라의 학생 김진석과 살란의 수많은 학생이 모였다.
“…몇 명하고 해야 하는 겁니까?”
“네가 정해.”
살란의 학생은 자그마치 마흔두 명. 물론 학생이라 그런지 레벨이 그다지 높진 않았지만 워낙 많았다.
“어떤 방식으로 할 텐가?”
“방식은 모르겠고, 각자 자신의 학생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책임은 교수가 지기로.”
“…알겠네.”
살란의 표정은 찜찜했지만 우선 알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살란도 이 기회에 자신의 학생과 김진석의 잠재력을 시험할 수 있었다.
노라의 학생 김진석과 살란의 학생들이 하는 모의전 소식이 기사 학교 전체에 퍼져서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 모의전이 치러지는 학교 훈련장에 엄청난 인원수가 모였다. 특이하게도 훈련장이 콜로세움처럼 개조되었다.
“내가 힘 좀 썼네.”
소문은 이미 학교 전체에 퍼져서 엘리온도 와 있었다. 그는 엘프 사이에서도 유명한 마법사였다. 엘리온이 직접 나서서 훈련장을 바꾼 것이다.
“나쁘지 않은 구경거리겠군.”
심지어 레온하르트도 모의전을 구경하러 직접 나섰다. 게다가 그의 휘하에 있는 정예 칼라 기사단들까지 나타났다.
“레온하르트 님하고 엘리온 님도 있네…….”
“도대체 저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이지?”
김진석에게 무슨 일만 벌어졌다 하면 엘리온과 레온하르트가 나섰다.
레온하르트가 데려온 인재라곤 하지만 원래는 엘리온에게 소식만 전해 들었다. 이렇게 직접 레온하르트가 행차한 사건은 거의 없었다.
“관중이 생각보다 많네요?”
“일반인은 없어. 전부 학생 아니면 교수야.”
기사 학교의 훈련장은 당연히 아무나 이용할 수 없었다. 기사 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꽤나 많았다.
교수가 밖으로 나가 수업을 하기도 하고, 얼마든지 어디서든 수업을 할 수 있으니 만약 학교에 모이라고 하면 아마 이 정도 수준으로 모일 것 같았다.
“전부 532명. 정말 대부분 학생이 모인 것 같네.”
분명 532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도 훈련장 안은 고요했다. 교수들이 통제하고 있긴 하지만 학생들도 선별해서 받은 사람들이다.
아무리 노라와 김진석이 무시하고 있다곤 하지만 그들의 재능은 일반인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고작해야 훈련장에서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있는 건 그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모의전은 애초에 모의전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없게끔 이뤄진다.
엘리온도 그걸 알고 학생들이 모이는 걸 허락한 거다.
그리고 그 학생 중에서도 상위권에 있는 자들이 모인 곳이 살란 교수의 학생들이다.
“화이팅~”
노라는 어느새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아서 로스트 월드에서도 팝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팝콘같이 보이는 걸 먹고 있었다.
김진석은 훈련장의 가운데로 나섰고, 살란 교수는 잠시 자신의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한 명의 학생을 지목했다.
그 학생은 평범하게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고, 김진석보다 작지만 꽤 큰 몸집을 소유한 자였다.
“시지다.”
[시지. LV:20.]
전형적인 전사, 그것도 탱커. 방어력이 높은 직업군인 것 같았다. 학생 중에서는 레벨이 높긴 했지만 김진석보다 10이나 더 낮았다.
하지만 훈련장에서 주는, 일반적인 나무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살란이 제안했고, 노라가 허락했기에 지금 둘이 든 무기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 거구에 단검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대놓고 도발하는 시지였다. 물론 김진석이 몸의 1/3도 안 되는, 아니 거의 1/4에 해당하는 단검을 들고 있는 게 없어 보이긴 했다.
“원한다면 빼 주지.”
김진석은 단검을 보란 듯이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때 자진해서 심판으로 나선 칼라 기사단의 정예 기사가 휘슬을 부르며 외쳤다.
“시작!”
그와 동시에 김진석은 일부러 발 앞에 떨어뜨린 나무 단검을 발로 차 버렸다. 시지는 당황했지만 그도 뛰어난 학생이었고, 반응 속도 하나만으로 방패를 사용해 단검을 튕겨 냈다.
하지만 단검을 발로 참과 동시에 거의 단검과 비슷한 속도로 달려간 김진석은 시지가 방패로 단검을 튕겨 냈을 때 바로 그 방패를 손으로 잡아서 힘으로 내려 버렸다.
동시에 바로 오른발에 힘을 주어 제자리에서 뛰어 왼쪽 무릎을 얼굴에 처박아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시지는 일어나지 못했다.
단말마조차 내지 못한 시지는 기절해 버렸고, 김진석은 방패를 맞고 떨어진 단검을 주워 다시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갔다.
“승자! 카이!”
심판인 정예 기사는 흐뭇한 얼굴로 김진석을 바라보며 외쳤다. 레온하르트가 눈여겨본 인물들은 대부분 칼라 기사단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강력한 막내가 들어올 거로 생각한 것이다.
애초에 조용했던 훈련장이었지만 지금은 숨소리조차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살란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 학생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학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진다면 김진석의 평가가 올라가겠지만 자신의 평가는 내려갈 거다.
“얌마!”
그때 뒤에서 노라가 팝콘을 의자 옆에 두고 일어났다.
“그래, 살기 지우는 건 꽤 잘했어. 그런데 단검 없이 지우면 어떡해?! 그래도 처음 단검 던지…는 게 아니라 찰 때 살기가 거의 없는 건 좋았어.”
노라는 실시간으로 피드백하고 있었다. 수업이라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살기를 지우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요?”
“그래도 내 수업 듣는데 단검은 들어야지. 단검 들고 애들 제압해 봐.”
둘은 모의전을 하는 것이 아닌, 그냥 길거리를 산책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때 살란 교수가 한 학생을 지목했고, 그 학생은 김진석의 앞까지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디안이라고 합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디안. LV:24]
디안이라는 남자는 김진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중히 악수를 권했고, 김진석은 그 손을 바라보다가 악수하며 말했다.
“카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오히려 김진석의 존댓말에 디안이 더 놀랐다.
전에 편의점에서 일할 때 상대에 맞춰서 말했었다.
기본적으로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 존대했지만 상대가 반말하면 굳이 존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기사 학교에 퍼진 소문하고 노라의 학생이라는 것 때문에 이상한 편견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생각 외로 친절하시네요?”
“시작!”
그때 바로 심판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진석이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디안도, 김진석도 서로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디안은 1미터가 넘어가는 장검 하나를 든 학생이었다. 벨런스가 제대로 잡힌 것 같았다.
장검을 뽑은 채 서 있는 디안에게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석에겐 조금 달랐다.
김진석은 자세도 잡지 않고 팔을 늘인 채 천천히 디안에게 다가갔다. 디안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팔이 흔들리고 있는데, 뭐가 그리 두렵지.”
눈앞에서 자세히 보면 디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 전에, 김진석에게 말을 걸 때부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김진석의 소문을 전부 알고 있고, 고작해야 10초 만에 학생 하나를 묵사발 내 버리는 모습을 직접 봐 버리면 고작해야 존대만으로 그 공포를 이길 순 없었다.
“실전 경험이 없습니까?”
“몬스터를 잡은 경험은 있습니다.”
“교수 없이요?”
“…학교 입학 전에는 있었습니다.”
당연히 학교 입학 전에는 몬스터와 싸운 경험이 있겠지. 어떻게 보면 오히려 학교가 학생의 실전 경험을 없애고 있었다.
김진석은 천천히 다가가 기습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김진석에게 두려움을 느낀 만큼 긴장하고 있던 디안은 가볍게 장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하지만 김진석에게 단검은 양손에 하나씩 총 두 개였다. 반대쪽 손으로 디안의 어깨를 향해 단검을 내리꽂았다.
디안은 움찔거리며 어떻게든 어깨를 뒤로 젖히며 김진석의 단검을 피했다. 하지만 김진석이 노린 어깨는 장검을 든 반대 어깨.
반대쪽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장검을 든 손이 앞으로 나오며 무방비해졌다. 김진석은 장검에 막힌 단검을 든 손으로 디안의 장검을 든 손을 노렸다.
그런데 과연 살란의 학생이었는지 엄청난 반응 속도로 검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기사가 검을 놓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얘기였지만 디안은 달랐다.
하지만 검을 놓으면 맨손으로 김진석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김진석은 떨어뜨린 장검을 발로 차 디안에게 보냈다.
디안은 갑자기 날아오는 자신의 장검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크윽.”
하지만 곧바로 떨어뜨렸다.
“…너.”
노라는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디안은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김진석의 단검은 디안의 손목을 스쳤다.
디안은 김진석이 노라에게 당했던, 동맥을 절단당한 것처럼 손목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디안은 반대쪽 손으로 그 출혈을 막아 보려 했지만 손을 뚫고 나올 정도였다.
“…항복입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김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 노라를 바라봤다.
“승자! 카이!”
똑같이 심판이 외쳤고, 노라는 김진석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마지막은 괜찮았어. 살기가 거의 없었어. 확실히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상대해야 느네.”
“감사합니다.”
살란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하지만 김진석의 훈련과 노라의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승자! 카이!”
“…후.”
김진석은 벌써 스물한 명의 학생을 상대했다. 그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았고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
[상카. LV:26]
마지막에 상대했던 학생은 지금껏 보았던 모든 학생보다 강력했다. 그는 보기 드문 쌍검을 사용하는 학생이었다.
쌍검은 전문가가 사용하더라도 제대로 다루기 불가능하다고 말들 하지만 이곳은 게임 속 세계. 일반인이 아닌 초인적인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가능했다.
그렇다고 한들 공격에 모든 걸 쏟아붓는 쌍검이었지만 그걸 전부 눈으로 보고 피하는 김진석에겐 당해 낼 수 없었다.
“많이 나아졌네. 음… 다른 수업은 뭘 해야 한담.”
노라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김진석이라도 연속으로 스물한 명의 학생을 상대하는 건 체력이 조금 부쳤다.
그냥 죽이는 거였으면 스물한 명이든 100명이든 체력 보존이 쉬웠겠지만 제압은 김진석에게 너무 어려웠다.
살란의 표정은 붉어지다 못해 까매지고 있었다.
그때 살란이 뭔가 비장한 표정으로 한 명의 학생을 가리켰고, 그 학생은 김진석의 앞으로 나왔다.
김진석은 숨을 고르며 앞에 나온 학생을 바라봤는데, 그녀는 김진석이 이미 알고 있는 자였다.
앞에 나온 학생은 아름다운 은발의 여학생이었고, 특이하게 귀가 길었다.
“반가워요. 루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다이아. LV:48]
그녀의 말에 김진석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말과 김진석이 본 상태창이 달랐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엘프, 그것도 엘리온의 여동생이었다.
학생의 레벨이 아니었다. 노라보다도 레벨이 훨씬 높았다. 엘리온이 기사 학교의 정보를 대부분 알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녀 덕분이었다.
학생으로 잠복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왜 살란의 밑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리온도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말이지.”
레온하르트도 눈치챈 것 같았다. 노라는 팝콘 다 먹고 뭔가 더 먹을 게 있나 찾고 있는 거로 보아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시작!”
처음으로 김진석이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