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 *
김진석과 노라는 의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가는 방향은 김진석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이 방향은 고급… 의류점으로 알고 있는데요?”
“엉, 뭐 문제 있어?”
“…문제는 많은데요.”
김진석은 지금 금화가 딱히 없었다. 대부분 금화를 스킬북 사는 데 다 썼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실, 바늘 같은 생활에 필요한 걸 사는 데 썼으니.
[253 금화.]
“253금화밖에 없는데요?”
“…밥 먹을 돈은 있니?”
노라는 잘 모르겠지만 김진석에겐 아직 수많은 생고기가 있었다. 고블린을 잡을 때는 생고기가 드랍되진 않았지만 임프를 잡을 때는 생고기가 나왔다.
고블린은 인간형이라 그런지 생고기에 거부감이 들겠지만 임프는 조금 달랐다. 이족 보행이긴 했지만 겉모습은 괴물이나 다름없었으니 생고기는 거부감이 덜했다.
…라는 게 게임을 만들 때 게임사가 생각한 거다.
“생고기도 나름 먹을 만합니다.”
“제대로 된 음식을 좀 먹어 주렴? 어쩐지 거지 같은 용병의 쉼터 음식을 잘만 먹더니…….”
노라가 김진석을 처음 봤을 때의 의문이 이제야 풀렸다.
“됐어, 이번엔 내가 사 줄게. 도움받은 것도 있고.”
“그건 어차피 서로…….”
“네가 먼저 안 살려 줬으면 내가 널 살릴 수가 없었으니깐. 그럼 나중에 네가 사 줘.”
“…알겠습니다.”
둘은 티격태격거리며 고급 의류점으로 향했다.
김진석은 고급 의류점의 옷의 가격을 보고 처음으로 감정이 요동쳤다.
[붉은색 원피스. 5,000금화.]
[검은 코트. 3,000금화.]
[청색 스키니. 2,000금화.]
아무런 옵션도 없는 옷이 몇천 금화였다. 그런데 노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을 둘러보며 하나씩 만져 보고 있었다.
“음… 재질이 나쁘진 않네.”
김진석은 노라를 다시 봤다. 그녀는 항상 평범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여성스러운 옷도 뭣도 아니었다.
그나마 오늘은 가죽 갑옷 위에 평범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티셔츠와 가죽 갑옷을 김진석이 동시에 베었다. 김진석은 티셔츠만을 수선해 준 것이고.
게다가 이곳은 여성 의류 전문점이었다. 간간이 남성 옷도 있었는데, 김진석은 그런 걸 전혀 몰랐다.
항상 트레이닝복만 입고 있어서 그런지 김진석은 그저 멀뚱멀뚱 서 있었다.
“맘에 드는 게 없어?”
“…원래 이렇게 비싸요?”
그나마 김진석이 찾은 남성 의류는 가격이 쌌지만 그래도 500~1,000금화는 되었다.
“평생 입는 건데 당연히 비싸지.”
“평생 입을 수 있는 거 맞아요?”
“시끄러. 말대꾸하지 마.”
분명 노라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먼저 말을 끊었다. 노라는 김진석의 앞에 있는 바지를 꺼내며 말했다.
“이거 어때?”
“스키니…요?”
하필 꽉 끼는 바지였다. 거구인 김진석에게 맞는 바지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템이라 자연스럽게 사이즈가 맞춰진다.
“싫어? 그럼 이건?”
노라만 신나게 김진석을 인형처럼 옷을 골라 주고 있었다.
둘은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둘의 이목은 꽤나 끌려 있었다.
노라의 아름다운 외모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워낙 거구인 김진석에게 시선이 더 끌렸다.
“저 사람… 레온하르트 님이 데려온 사람 아니야?”
“맞네. 레온하르트 님보다 큰 사람은 거의 없으니……. 게다가 옆에 노라도 있네.”
“이번에 교수가 됐다던데? 엘리온 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저 무서운 년이랑 같이 다니는 거 보면… 저 남자도 평범하진 않겠네.”
이미 김진석의 얘기가 칼라 성에 퍼져 있었다. 다행히 기숙사에서 벌어진 일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둘이 사귀나? 노라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네.”
“저렇게 다양한 표정은 처음 보긴 하네. 항상 미친년처럼 웃고만 있어서 조금 소름 끼쳤는데 말이야.”
둘의 얘기가 칼라 성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화젯거리를 좋아했다. 둘의 얘기는 충분한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한 명은 레온하르트가 데려온 인재, 한 명은 레온하르트가 데려와 성장해서 용병 일을 하는 이상한 인재.
하지만 화젯거리가 된다는 건 그만큼 정보가 오간다는 것.
“다렌 대장님, 그 남자로 추정되는 자가 칼라 성에 있다는데요?”
“…김진석 말인가?”
기사 다렌과 찰스는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죽이며 말했다. 그 몬스터는 자그마치 레벨이 50이 넘어가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둘은 잡담을 나눠 가며 몬스터를 여유롭게 잡고 있었다.
“찾으러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뭔가 그 남자… 불안해.”
가이크 성에서의 인연은 아직 끊기지 않았다.
“음… 별로 맘에 안 들긴 하는데 네 옷이니깐 뭐.”
노라는 김진석의 옷을 기어이 골라 주었다. 김진석이 보기에는 온갖 이상한 옷들을 거르고 최대한 입을 만한 옷을 골랐다.
결국엔 트레이닝복이었지만 재질이 부드러웠다. 물론 솔직히 김진석의 눈에는 다 그게 그거로 보였지만 노라가 어떻게든 타협했으니.
게다가 제일 싼 가격인 500금화였다.
“이런 취향 좋아해?”
그리고, 노라도 김진석이 골라 준 옷을 입고 나왔다. 긴 청바지와 얇디얇은, 소재 좋은 하얀 반팔 티셔츠. 그 위로 니트 하나를 입었다.
여성들이 가을에 평범히 입는 옷이었다. 하지만 노라가 입으니 엄청 세련되어 보였다. 붉은 그녀의 머리가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았다.
“7,000금화…….”
김진석은 그 가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라는 쿨하게 바로 결제하고 의류점을 나왔다.
“원래 여러 개 사는데 금화가 없어. 빚 다 갚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녀가 돈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졌고, 노라와 김진석은 서로가 골라 준 옷을 입고 돌아가고 있었다. 김진석은 괜히 옷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노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재밌었어. 내일도 수업을 똑같은 방식으로 할게. 살기부터 지워 보자.”
“알겠습니다.”
둘은 대화를 조금 나누다가 기숙사 앞에서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김진석과 노라는 온종일 훈련장에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모여서 해가 질 때 훈련장에서 나갔다.
그들의 기행은 학생들이 찾아와서 볼 정도였다. 도저히 수업이나 훈련으로 볼 수준이 아니었다.
피가 낭자했고, 언제나 둘이 모였을 때는 훈련장의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우스갯소리로 둘을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훈련장 청소하는 사람이라곤 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그들을 보고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사람이 죽는다고 말했지만 교수들은 말릴 수 없다는 똑같은 자세만 취했다.
그래서 한 여학생이 둘을 말리려고 다가가려는 순간, 두 개의 단검이 날아왔다.
“꺼져. 내 수업이야.”
“훈련입니다. 가세요.”
김진석과 노라가 동시에 단검을 던진 것이다. 그래도 여학생을 맞춘 게 아닌, 일부러 빗겨 나가게 던졌다.
그런데 김진석은 아예 빗나가게 던졌지만 노라는 뺨에 상처를 내게 던졌고, 여학생의 뺨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히끅!”
여학생은 딸꾹질하며 도망갔다.
“그래도 방금 공격은 괜찮았어. 살기를 최대한 줄였네.”
“감사합니다.”
그 이후로 둘의 수업을 방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김진석과 노라는 처음에는 구경거리였지만 수업하다가 주변을 부숴 먹는 경우가 많았다.
괜히 근처에 가다가 휩쓸리는 학생이 많아 오히려 교수가 와서 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좀… 구석에 가서 하면 안 되나?”
그 교수의 말에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훈련장에서 수업한 지 3일이 지난 시점, 김진석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지만 노라는 처음과 달리 팔에 상처가 꽤나 나 있었다.
“뭐… 그러죠.”
“동물원의 동물 취급이 불편하긴 했어. 뭘 자꾸 꼬라 봐?”
둘은 흔쾌히 훈련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가고, 점점 노라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라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네게 맞는 건… 공격이 날카로워져서 그래. 살기는 거의 지워지지 않았어. 물론 나쁜 건 아닌데…….”
노라는 뭔가 맘에 들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건 살기를 없애는 거였는데 분명 김진석은 성장하고 있긴 했지만 살기에 관한 건 거의 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진석의 공격 중 딱 하나의 공격에는 살기가 거의 실리지 않았다.
“너, 단검 던지는 건 잘하면서 왜 다른 공격엔 죄다 살기가 가득 들어 있니?”
로스트 월드로 들어왔을 때부터 처음 죽인 헬 하운드의 새끼를 제외한 모든 몬스터들과 싸울 때 유용하게 사용한 고블린 단검.
이제 더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단검을 던질 때만큼은 살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고블린 단검을 던지는 경우는 하나,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닌 견제하기 위한 것.
당연히 그 공격엔 살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감정을 숨긴다는 건.”
“맨날 표정은 없으면서. 처음엔 무슨 감정이 없는 줄 알았어.”
“표정은 계속 지었습니다만.”
김진석은 평범한 20대의 아이들처럼 감정이 풍부했다. 게임을 할 때만큼은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표정이 김진석에겐 없었다. 정확히는 표정이 있긴 했지만 아주 미세했다.
“모르겠고. 어쩔 거야, 더 할래?”
“해 보겠습니다.”
노라는 김진석에게 포기할 건지, 아닌지 물어봤지만 김진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 수업하고 포기할 건지 물어보는 게 이상했지만 노라에겐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살기를 지우는 건 레온하르트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노라는 그게 가능했고, 전투에 재능이 있는 김진석도 가능할 거로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전투 재능을 잘 모르는 김진석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잊혀 갔지만, 아니 애써 모른 체했지만 교수들에게는 오히려 소문이 퍼졌다.
노라가 아닌 김진석의 재능에.
“아무리 봐도 서로, 아니 노라가 목숨을 빼앗지 않을 뿐 실전처럼 하는데 그녀에게 상처를 저리 입히다니.”
“솔직히 내 반 학생이랑 재능은… 비교하기도 어려운데.”
“탐나는데?”
노라의 재능은 원래 유명했고, 레벨도 높았다. 게다가 또라이로도 유명했으니 그녀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김진석은 레온하르트가 데려왔기에 증명된 재능이긴 했지만 교수들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다.
하지만 교수들은 서로의 수업에 참견할 수 없었고,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수업에 한해서다.
노라의 수업이 끝나고 김진석이 혼자 있을 때 다가오는 교수가 있었다.
“카이 학생이라고 했나?”
김진석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 교수를 힐끔 쳐다봤다.
[시시. LV:34.]
교수의 레벨을 보고 김진석은 바로 눈을 돌렸다. 고작 김진석 자신보다 레벨이 4밖에 높지 않은 교수였다.
“혹시 까마귀 기사단이라고 아나?”
“아뇨.”
김진석은 게임 속에 나온 기사단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모르는 기사단은 딱히 기억할 필요가 없는 기사단이라는 거다.
“아쉽군. 우리가 찾고 있는 인재가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라네. 혹시 관심이 있다면 찾아오게. 수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자네는 기사가 될 수 있는 자이네.”
누가 봐도 대놓고 김진석을 기사단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물론 김진석은 별 관심이 없었고, 무시하려고 할 때 다른 교수들이 갑자기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 회색 늑대 기사단은 어떤가.”
“검은 독수리 기사단도 생각해 봐!”
“우리 기사단도!”
갑자기 몰려든 교수들에게 둘러싸인 김진석은 황당해했다. 처음에는 노라와 김진석을 같은 미친놈 취급하더니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그 와중에도 김진석은 아는 기사단이 없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