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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41화 (41/201)

41화

* * *

김진석과 노라가 훈련장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을 때.

엘리온과 레온하르트는 이사장실에서 만났는데, 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네크로맨서가 사산에 나타났다고?”

“그래. 사산에서 사기를 먹고 진화했더군. 기어이 리치로 변했어.”

리치라는 말에 엘리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리치는… 평균 레벨이 60인, 정말 괴물인 몬스터잖나?! 어떻게 된 거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갓 리치가 돼 그렇게까지 강하진 않았지만… 사산이라는 특성에 우린 힘도 제대로 못 썼다.”

레온하르트는 무력했던 그때의 자신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레벨이 59면 뭐하나. 난 그때 아무런 힘도 못 썼다.”

“자책하지 말게. 칼라 기사단에서 아무런 사상자가 없던 건 자네 덕이니.”

리치 질린과 싸우면서 단 한 명의 사상자가 없던 이유는 레온하르트와 노라의 활약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짧게 싸웠으니 가능한 거다.

“아니, 그때 누군가가 우리를 도왔다.”

“누군가?”

“나도 모르겠다만… 그 리치를 단번에 죽이고 해골이 된 몬스터들조차 화살 세례에 전부 죽어 버리더군.”

“…화살?”

“하늘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몬스터가 전멸했었다. 그 힘은 가히 악마들을 몰아낸 영웅에 필적했다.”

“영웅이라…….”

엘리온은 레온하르트의 허황된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쫓아내 버렸겠지만 그 레온하르트가 말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믿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가이크 성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그때 레온하르트의 뇌리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영웅 중에서 화살을 사용하는 영웅이 있지 않았나?”

“…확실히.”

“그자의 이름이 기억나나?”

“알다마다. 그 영웅의 이름은…….”

* * *

“카이.”

“…예?”

김진석은 하급 포션 하나를 먹었는데도 상처가 전부 치유되고 있지 않았고, 특히 마지막에 단검에 찔린 부분은 아직도 피가 나고 있었다.

그래서 인벤토리에서 최하급 포션을 꺼내 직접적으로 상처 안에다가 포션을 부어 버렸고, 고통을 참고 있을 때 노라가 부른 것이다.

“왜 이름이 카이야?”

“어… 그렇게 물어보시면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합니까?”

대부분 이름을 부모님이 지어 줄 텐데 말이다.

“가명이란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냥… 왜 카이라고 지은 거야?”

하지만 노라는 김진석이 말한 카이라는 이름이 이미 가명이란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진석은 솔직히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직업이랑 이름이 비슷해서요.”

“카이가? 전혀 비슷한 직업이 없는데…….”

그런데 노라의 반응이 이상했다. 게임 속 캐릭터, 카이의 직업은 카인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름이 비슷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인, 모르십니까?”

“…그런 직업이 있어?”

노라는 아예 카인이라는 직업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그녀가 모르니 이 세계에서는 카인이라는 직업이 없는 것 같았다.

새로운 사실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착각한 것 같네요.”

“이상한 애네. 아니, 원래부터 이상하긴 했지.”

노라의 마음속에선 김진석 자신은 이상한 놈으로 낙인찍힌 것 같았다.

김진석과 노라는 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다. 김진석이 노라에게 피드백을 요청했고, 노라는 교실에서 하자고 말하려다가 먼지 쌓인 꼴이 생각나 기숙사로 말한 것이다.

김진석의 방인 505호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기숙사장이 막았다.

“사람 들이는 건 안 된다고 했지?”

그의 말에 김진석이 말하려고 할 때 노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먼저 말했다.

“내가 교순데 그것도 안 돼?”

“교수라고 학교의 법칙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학교가 아니라 네 법칙이겠지, 앙골라스.”

그런데 둘은 이미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노라는 앙골라스를 역겹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법칙을 강요하지 마, 앙골라스. 진짜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

“…학교 기숙사장인 나를 죽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김진석은 둘의 사이가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앙골라스도, 노라도 게임 속에선 나오지 않은 캐릭터였지만 어차피 인간관계다.

그런 건 질색인 김진석은 노라에게 말했다.

“대충 해결하고 들어오세요. 제 방이 어딘지는 알고 계실 테니.”

어차피 노라가 고집부리는 이상 들어올 것이다. 다른 일이었지만 레온하르트도, 엘리온도 김진석의 방에 들어온 적이 있었으니 알아서 비슷한 핑계를 대며 들어오겠지.

“야! 네가 피드백 요청했잖아!”

“전 학생일 뿐입니다. 교수님이 도와주셔야죠.”

어느새 둘은 학생과 교수의 관계가 아닌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김진석은 노라에게 뒤로 손짓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노라가 김진석의 방까지 도착한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방문을 두드리길래 김진석은 문을 열어 줬고, 노라가 순식간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 뒤로 누군가가 방문을 또 두드렸고, 김진석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들어온 겁니까?”

“귀찮게 구니깐. 꼬우면 나보다 레벨이 높아야지.”

그렇게 말하며 노라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엄청난 속도로 방문을 향해 던졌다. 그 단검은 방문에 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박혔다.

“히익!”

“그냥 꺼져. 네가 걱정하는 일 안 일어나.”

앙골라스가 뭘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라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그를 내쫓았다.

김진석은 그 모습을 그저 멀뚱멀뚱 쳐다봤고, 노라는 그런 김진석을 힐끔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슨 사인지 안 궁금해?”

“예.”

“…그래?”

김진석의 단호한 말에 노라는 혀를 찼다. 김진석은 인간관계는 혐오하다시피 하지만 노라와 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김진석은 잘 모르겠지만 노라도 그와 비슷하게 어렸을 때부터 비루한 생활을 이어 나갔고, 그녀를 구원해 준 게 레온하르트였다.

마치 김진석과 편의점 점장의 관계와 같이 말이다.

김진석은 그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노라를 편히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게 부족한 점이 뭐죠?”

“아, 그거? 내가 누굴 가르칠 만한진 모르겠지만 네 공격, 너무 뻔해.”

노라의 말에 김진석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투견과 싸워 왔다고 하지만 사람과의 싸움은 로스트 월드에서는 처음이었으니.

“난 재능이란 게 뭔지 잘 몰라. 내가 재능이 뛰어나니 남이 그걸 못하면 이해를 하지 못했지. 그런데 넌 달라. 솔직히 내가 뭘 가르쳐 줄 필요가 없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못 피할 것 같으면 과감히 자신의 다른 신체 부위를 가져다 대는 담력 등등. 전투에 대한 재능은 어쩌면 나보다도 뛰어난 것 같아.”

노라의 칭찬에 김진석은 뭔가 부담스러웠다.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칭찬이란 걸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노라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네가 무슨 생활을 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살(殺)의가 너무 뚜렷해. 카이. 일반인이라면 네가 공격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살기가 무서워. 하지만 나 같은 살의에 익숙한 용병들이라면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어.”

그런데 노라도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 어떤 용병도 살기로 공격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또한 노라의 재능이었다.

“제 공격에 살기가 있다는 겁니까?”

“응, 그것도 아주 가득.”

김진석은 오로지 상대를 죽이겠다는 몬스터를 상대해 왔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네가 전사나 그런 직업이라면 상관이 없을 텐데 적어도 내게 가르침을 받는 이상 넌 도적이야. 상대를 단번에 죽여야 하는 도적은 공격 예측이 가능한 건 절대 용납 못해. 다른 도적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난 안 돼.”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이려는 감정을 숨겨야 했다. 김진석에겐 난제였다. 그는 표정을 숨기는 법도 잘 모른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 사람과의 교류가 싫었지만 필수적이었으니 그도 그 나름대로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아봤고, 그게 게임이 됐다.

물론 예상외로 그 게임이 김진석의 적성에 잘 맞았고, 그거에 빠져서 인간관계 따위는 생각도 안 했지만 말이다.

이미 물 건너간 일이다.

“첫 번째 과제야. 살기를 숨겨 봐.”

“알겠습니다.”

김진석은 노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바로 잘린 노라의 옷 소매.

“잠시 손 좀 내밀어 주실래요?”

“응? 왜?”

노라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고 김진석은 인벤토리에서 바늘과 실을 꺼냈다.

사산에서의 일이 끝나고 3일 동안 김진석은 놀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칼라 성을 돌아보며 자신이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평상시에 입을 옷이라든가 그 옷을 꿰맬 바늘과 실 같은 거를 말이다. 김진석은 평생을 혼자서 살아왔고, 음식을 전혀 할 줄 모르지만 뜯어진 옷 같은 건 꿰맬 수 있었다.

물론 김진석이 노라의 옷 소매를 꿰매 줄 필요는 없었지만 자신이 그 옷을 잘랐으니 꿰매 주는 것이다.

비록 잘하진 못하고 서툴렀지만 그것만으로도 노라의 입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고마워.”

“아닙니다. 제 탓인데요.”

“아니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옷이나 사러 같이 갈래?”

물론 김진석의 옷도 노라로 인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인벤토리가 있는 김진석은 옷을 꺼내서 다시 입었지만 노라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옷 하나씩 골라 주는 건 어때?”

“전 그런 거 전혀 모르는데, 괜찮나요?”

“엉, 상관없어.”

그렇게 둘은 다시 기숙사에서 나가 의류점으로 향했다.

* * *

“…도대체 저 카이라는 남자는 노라를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저리 얌전한 여자가 됐지?”

앙골라스는 얌전한 여자를 연기하는 노라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김진석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성격은 사글사글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외모가 아름다운 남성에 한해서다.

그녀는 자신이 관심 없는 자가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수준의 능력과 성격을 가진 자다.

노라를 도우러 와서 광기의 굴에 빠져 나오지 못한 남성 용병 둘도 외모만큼은 아름다웠다.

그런 그들이 광기의 굴에 빠져 죽은 게 확정됐을 때도 노라는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누가 봐도 과장 좀 보태서 곰과 착각할 정도의 거구인, 아름다움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는 얼굴인 김진석에게 저런 표정을 짓다니.

노라와 김진석이 금방 방에서 나와 기숙사에서 나갈 때 보인 그녀의 표정은 앙골라스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원래 저년의 취향이 저랬나?”

앙골라스는 뒷세계에서 지낸 시절, 노라에게 작업을 건 적이 있었다. 물론 앙골라스는 노라가 가장 싫어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남자.

외모만큼은 노라의 취향 저격이라고 할 정도로 잘 맞는 앙골라스였고, 그걸 이용했지만 대차게 까인 것이다.

레벨이 자그마치 30이나 되는 앙골라스지만 그건 노라와 같은 여성을 노리고 접근해 레벨 업한, 기생충 같은 자였다.

노라는 외모는 맘에 들었던 앙골라스와 함께 몬스터를 잡으러 갔는데, 노라가 몬스터에게 당한 걸 본 순간 앙골라스는 바로 버리고 도망갔다.

하지만 노라는 그 상황을 이겨 냈고, 그 이후로 앙골라스를 죽여 버리려고 찾아다니고 있었다.

다행히도 앙골라스는 몇 번 노라를 만났지만 잘 꼬드긴 여성 용병으로 살아남았었고, 엘리온의 눈에 뜨여 기숙사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 이후로 노라는 앙골라스를 죽일 수가 없었다.

“저년이 교수라니… 말세군, 말세야.”

정작 본인도 기숙사장인 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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