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 *
김진석은 흑호를 타고 정신없이 사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달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왜 독거미의 단검을 사용할 수 있었지?”
김진석은 자신이 왜 독거미의 단검을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레벨 제한이 40인 독거미의 단검을 김진석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이상했다.
“전에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를 들려고 했을 때는 사용하지 못했다.”
김진석이 특수 직업이라 그런 페널티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는 이미 레벨이 낮아서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다는 푸른색 글씨의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여러 생각을 계속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 게임 속에서 키웠던 캐릭터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도적을 키운 적이 있었다.”
당연히 김진석은 단 하나의 캐릭터만 키우지 않았다. 메인 캐릭터가 카이이긴 했지만 대부분 MMORPG가 부캐릭터를 키우는 것을 권장했다.
그리고 김진석은 카이의 직업인 카인과 마찬가지로 도적도 단검을 사용해 흥미를 가지고 키웠었다.
“설마… 그 때문인가.”
거대 고블린의 망치 같은 경우에는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착용이 불가능할 순 있었다.
그런데 이미 도적이란 직업으로 최고 레벨까지 찍었고, 당연히도 도적 아이템은 그에게 착용 제한이라는 개념 따위가 없었다.
그렇게 김진석은 흑호와 함께 사산에 도착했고, 칼라 기사단과 네크로맨서 질린이 대치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우려했던 일인 질린이 이미 리치로 변해 버린 상황을 발견한 것이다.
[리치 질린 LV:55]
“…다행히 게임 속에서의 힘을 되찾진 않았군.”
완전히 성장을 끝마친 질린이었다면 레벨이 60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니기에 성장에 제한도 없었다.
“놈에게 더 시간을 주면 성장할 거다.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빼내야 한다.”
칼라 기사단과 그들은 아직 사산의 입구였다. 사산 위에 올라와 있는 것만으로도 리치 질린에게 생명력이 빨리고 있는 거였다.
이미 투명한 벽은 없어지고 없었다. 그런데 푸른색 글씨는 여전히 같은 문구를 띈 상태였다.
[두고 간다.
데려간다.]
선택지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주어는 없었으니 저 두고 간다, 와 데려간다, 가 누굴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처음에는 노라인 줄 알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기 있는 인원들 전부를 말하는 것 같았다.
푸른색 글씨는 이미 이 상황을 예견한 것이다.
그리고 김진석은 다시 한번 똑같은 선택을 했다.
“전부 데려간다.”
그때 흑호를 타고 있던 김진석의 몸이 푸른색으로 빛나며 변하고 있었다.
[그대의 선택을 존중.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현재를 타개할 힘.
미래를 대비할 힘.]
이것 또한 선택지였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 김진석은 당황하고 있었다.
보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이상하지만 흑호가 주어지긴 했었다.
게임 속에서도 보상을 선택하는 퀘스트가 있기는 했지만 그게 이곳에서도 적용될진 몰랐다.
그때 네크로맨서, 아니 리치 질린과 레온하르트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긴장감이 김진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현재를 타개할 힘과 미래를 대비할 힘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이것은 게임 속과 달랐다.
하지만 뭔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레온하르트와 질린의 말이 끝난 것 같았고, 전장이 느슨해진 것 같았지만 그건 표면상이었다.
폭풍전야의 상황.
김진석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칼라 기사단은 이미 사기에 잠식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리치 질린이 게임 속 힘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건 칼라 기사단도 마찬가지.
김진석은 선택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겠다고 마음먹자마자 푸른색 글씨가 바뀌었다.
[그대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카이와의 동기화,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김진석의 몸에서 푸른빛이 나기 시작했다. 카이, 김진석이 가장 먼저 키웠던 메인 캐릭터.
이미 한 번 동기화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훨씬 빠르게 동기화가 진행됐고, 이내 동기화가 끝났다.
“후…….”
전과 같이 김진석의 손에는 어느새 카인의 전용 장비인 고요한 카인의 활, 그림자같이 일렁이는 활이 들려 있었다.
[30초간 지속.]
“…그럴 것 같긴 했어.”
이미 예상한 일이었고, 김진석은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차징 샷.”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스킬. 가이크 성에서 가디언을 한 방에 죽인 스킬이다. 음속을 뛰어넘는 것만 같은 속도로 화살이 날아가 리치 질린의 몸을 꿰뚫었다.
“…어?”
질린은 자신이 뭐에 맞았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몸이 허물어졌다. 가디언조차 버티지 못한 카이의 공격을 질린이 버틸 리가 없었고, 땅바닥에 무너진 채 그대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런데 살점이 다 떨어진 해골 몬스터들을 통제하고 있던 질린이 죽어 버리니 놈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10초 남았습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놈들의 먹잇감은 바로 근처에 있던 칼라 기사단이었다.
물론 질린이 없는 놈들은 그저 일반적인 몬스터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었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김진석에겐 10초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한 가지 스킬을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애로우 샤워.”
하늘에 화살을 쏘아 수많은 화살의 비를 내리게 하는 스킬이다. 카인의 스킬 중 유일한 광역 범위의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리 좋은 스킬은 아닌 게, 지속 시간 동안 화살을 내리게 하는데 그 어떤 몬스터가 그걸 전부 맞아 주겠는가.
하나라도 맞으면 플레이어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게 몬스터다.
그런데 그건 어떠한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게임 속 이야기.
현실은 달랐다.
* * *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평범한 물방울이 아닌 화살로 이루어진 비였다.
끼에엑!
해골로 된 몬스터들은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기사단에 달려들려다가 화살 세례를 맞았다.
평범한 화살이었다면 꿈쩍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건 평범할 때의 이야기.
수십, 수백의 화살 중 단 하나라도 맞은 몬스터는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학살의 현장이었다.
[카이와의 동기화를 해제합니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동기화가 끝나 버렸다. 그런데 김진석의 몸에서 푸른빛이 전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레벨 업의 흔적.
[LV:28, LV:29, LV:30]
순식간에 김진석의 레벨이 원래 레벨인 28을 넘어서서 30이 되었다.
애로우 샤워의 지속 시간은 고작해야 3초.
고작 3초의 시간에 수백의 몬스터가 쓸려 나갔다. 하필 기세 좋게 몬스터들이 칼라 기사단에 달려가는 길목에 정확히 화살의 비가 떨어졌다.
그렇게 김진석은 레벨 업의 향연에 질린과 같이 힘에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린 김진석은 흑호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자. 기숙사로.”
* * *
“…이게 무슨 일이지?”
칼라 기사단과 노라, 그리고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리치 질린의 몸에 구멍이 뚫리더니 죽어 버렸고, 갑자기 하늘에서 화살의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 거다.
고작 30초의 시간에 리치 질린과 놈의 몬스터들이 쓸려 나갔다.
“…징벌.”
레온하르트는 대부분 죽고 남아 있던 해골 몬스터들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거대한 푸른 해머가 놈들을 짓눌렀고, 그렇게 리치 질린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저 땅바닥에 흩뿌려진 금화와 아이템이 전부.
한동안 전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장을 정리한다! 사산에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주변 정찰을 마치고 복귀하도록!”
그제야 칼라 기사단원들도 정신 차리고 떨어진 금화와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저건?”
그때 노라는 멀리서 보이는 검은색 무언가를 발견했다. 점으로 보일 수준이었지만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노라에게는 흐릿하게나마 그게 뭔지 유추할 순 있었다.
“호랑이?”
그 흑점은 노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어딜 갔나 오는 거지?! 창문값은 배상해야 할 거다!”
“…예, 알겠습니다.”
김진석은 흑호를 타고 순식간에 기숙사에 돌아왔다. 분명 그들도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살아서 그곳에 있으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505호, 자신의 방에 들어오긴 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죽었는데 기숙사에 데려다줬을 리가 없으니, 되살아나는 모습을 분명 봤을 거다.”
그걸 이용해야 했다. 그는 노라를 지키며 살점이 떨어진 수많은 몬스터와 싸워 왔지만 정작 죽인 숫자는 별로 안 됐다.
계속해서 번갈아 가면서 싸웠고, 상처를 입은 몬스터는 사기에 의해 상처가 치료됐다.
“레벨 업을 한 것도 사실이니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해야겠네.”
그와 동시에 누가 방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형체는 순식간에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억!”
달려오는 트럭에 부딪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김진석이 고개를 내렸더니 가장 먼저 짙은 땀 냄새가 몰려왔고, 눈에 보이는 건 피같이 붉은 적발이었다.
“노라?”
“…교수님이라고 불러야지.”
노라는 김진석에게 안겨 있었다. 정확히는 노라가 김진석을 끌어안았다. 김진석은 갑자기 변한 노라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김진석은 올 게 왔다, 라는 생각에 준비해 두었던 말을 했다.
“음… 그래?”
그런데 노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김진석을 바라봤다. 그 눈에 김진석은 침을 꿀꺽 삼키며 노라를 바라봤고, 이내 알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운이 좋았네. 다행이야.”
“…예.”
“크흐흠.”
그때 방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노라와 김진석은 눈을 돌렸고, 그곳엔 엘리온이 있었다.
“갑자기 칼라 기사단원이 자네를 데리고 왔길래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엘리온은 당연히도 학교에 대한 일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온이 왔음에도 노라는 여전히 김진석을 안고 있었다.
노라는 여성치고는 키가 큰 170이었지만 김진석이랑 비교하면 고목의 매미나 다름없었다.
그런 노라가 껴안고 있는 거구의 김진석은 꼼짝 못하고 잡혀 있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제야 노라는 김진석을 놔주었다. 그리고 엘리온의 뒤로 레온하르트와 김진석을 기사 학교에 데려다주었던 기사가 들어섰다.
그들은 노라와 비슷한 말을 했고, 김진석은 똑같이 말했다. 그들은 노라와 달리 김진석의 말을 곧바로 믿어 주었다.
“아, 그리고 노라를 구해 줘서 고맙네. 혹시 원하는 게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 해 주겠네.”
김진석은 현재를 타개할 힘을 선택한 걸 조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미래를 대비할 힘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레온하르트와 노라라면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와 엘리온에게 받은 신뢰와 레벨 업한 걸 생각하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나도 해 줄게.”
물론 노라에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