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꺼져. 몬스터랑은 협의하지 않는다.”
김진석은 인벤토리에서 노라의 몸에 포션을 뿌리며 말했다. 그는 데려간다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희 말 들으면 항상 결과가 좋지 못했어.”
게임 속에서도 몬스터와의 대화가 있었고, 선택지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 단 한 번도 좋은 결과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겠지.”
“어리…석은… 선택…이군.”
로스트 월드에서는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던 과정은 조금 다르겠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 과정이 쉬워질지, 어려울지는 플레이어의 선택이었다.
김진석은 기사 갑옷을 입고 패링 대거를 손에 든 채 네크로맨서를 바라봤다. 네크로맨서는 본인이 강한 것이 아닌 압도적인 물량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리치가 된 네크로맨서 질린이라면 모를까 아직 살점이 다 떨어지지 않아 해골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느새 질린의 뒤에는 살점이 떨어지는 리들리와 다른 여러 몬스터가 있었다. 다행히 제일 레벨이 높은 몬스터가 리들리였지만 문제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마치 사산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투명한 벽이 내게만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네.”
김진석이 등을 지고 있는 투명한 벽 뒤에는 어떠한 몬스터도 있지 않았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새가 지저귀는 평범한 대지였다.
김진석은 노라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혹시 몰라 포션을 강제로 입에 집어넣은 다음 앞을 바라봤다.
그때 살점이 떨어진, 익숙한 고블린이 김진석에게 다 낡아 빠진 단검을 집어 던졌다.
고작 이 정도의 공격은 이젠 눈감고도 피할 수 있는 김진석은 날아오는 단검의 손잡이를 잡아채 바로 살점이 떨어진 고블린에게 던졌다.
그 단검은 정확히 놈의 미간에 꽂혔고, 이내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레벨만 높지 네크로맨서와 똑같군.”
살아 있는 고블린보다도 반응 속도가 늦고 단검에 미간이 꽂히자마자 바로 죽어 버리는 것을 보면 내구성도 약한 것 같았다.
일반적인 네크로맨서가 피에서 소환한 이미 죽은 몬스터는 살아 있는 몬스터보다 훨씬 약하다. 그게 지금 눈앞에 있는 질린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블린은 하나가 아니었고, 놈들은 한 번에 달려들었다.
“소드 댄스.”
사방에서 달려드는 고블린들에게 김진석은 스킬을 사용했다. 도적에게 몇 안 되는 넓은 범위의 스킬, 일명 광역기.
물론 마법사들과 비교하기엔 우스울 정도였지만 적어도 지금의 김진석에겐 아니었다.
360도로 미친 듯이 돌며 마치 하리케인을 연상시키는 공격으로 고블린들을 말 그대로 갈아 버렸다.
피로 소환된 녀석들은 몸에서 피조차 나지 않았고, 남은 살점만이 갈려질 뿐이었다.
스킬이 끝난 직후 김진석은 극심한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리들리는 살점이 다 떨어진 날개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 있었다.
놈들의 입에는 화염이 아닌 초록색의 무언가가 모이고 있었다.
“독.”
네크로맨서의 특수 능력이다. 네크로맨서가 소환한 몬스터는 사기를 머금고 있고, 리들리와 같이 사기를 많이 머금은 몬스터에게는 특수 능력이 주어진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다섯 마리의 리들리가 입에서 독을 내뿜었다.
그걸 본 김진석은 스킬을 사용해 독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런……!”
하지만 그 사정거리 안에는 노라가 누워 있었다. 김진석은 스킬까지 사용해 노라에게 달려갔지만 독은 이미 김진석의 눈앞까지 와 있었다.
김진석은 자신의 거대한 몸으로 노라를 감싸 안으며 외쳤다.
“카운터!”
유일하게 배운, 고작 0.5초짜리 방어막을 씌어 주는 스킬. 당연하게도 카운터로는 리들리가 뿜어내는 독의 브레스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카운터……! 쿨럭. 씨발… 카운터!”
김진석은 온몸으로 독을 막아내며 스킬이 사용되는지도 모르지만 그저 버티기 위해 정신력으로, 악에 받쳐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기어이 다섯 마리의 리들리의 공격을 막아냈다.
김진석의 갑옷은 이미 오랫동안 쓰였고, 리들리의 독 브레스에 결국 부서져 버렸다. 속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은 김진석은 그걸 내뱉었고, 그건 끈적이는 붉은 피였다.
그 피는 그냥 피가 아니었다. 땅바닥에 내뱉었는데 그 땅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독에 중독된 것이다.
다행히도 놈들의 공격은 강한 산성을 띠는 독이 아니었다.
“…쿨럭.”
김진석의 속에서 계속해서 중독된 피가 올라오고 있었고, 어떻게든 참아 내며 포션을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마찬가지로 등에서 느껴지는 엄청나게 화끈거리는 고통에 포션을 등에다가도 뿌렸다.
고통이 있었지만 이미 익숙했다.
김진석은 노라를 힐끔 쳐다봤지만 자신과 달리 그녀는 안색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 피부에 울긋불긋 올라온 검은 핏줄도 없어졌다.
김진석은 혹시 몰라 포션을 입에 하나 더 털어 넣고 남은 걸 노라의 몸에 뿌려 주었다.
포션을 먹을 때만 속이 진정되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바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멍청…하군……. 어차피… 내가… 살려 줄… 것인데…….”
네크로맨서 질린은 조소하고 있었다. 놈이 살려 준다는 뜻은 당연히 피로 소환하는 것이었다. 김진석은 남은 기사 갑옷 하나를 입고 노라의 허리춤에서 다시 독거미의 단검을 꺼냈다.
[독거미의 단검. 레벨 제한 40.
아주 강력한 독을 가진 거미의 송곳니로 만들어졌다.
공격 시 확률로 상태 이상, 독을 건다. 독 대미지 초당 5%
공격력 61. 내구도 92/100]
김진석은 독거미의 단검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제야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내가 독거미의 단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평범하게 생각하게 둘 네크로맨서 질린과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늑대로 추정되는, 살점이 거의 다 떨어진 강아지형 몬스터가 김진석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슬라이서.”
김진석은 온몸이 삐걱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순간적으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스킬을 사용했다.
늑대 몬스터의 몸에 단검을 박고 역방향으로 찢어발기며 죽여 버렸다.
그 뒤로 고블린이 달려들었지만 김진석이 손 한번 휘젓는 것으로 고블린은 절반으로 갈라지며 죽었다.
독거미의 단검의 압도적인 공격력에 몬스터들이 두부 자르듯이 베였다.
“레지…스트.”
그때 네크로맨서 질린이 자신의 몬스터들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레지스트. 몬스터들의 저항력을 높이는, 즉 방어력을 높이는 스킬이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포그… 티스… 컨퓨즈.”
포그, 안개를 만드는 스킬. 티스, 늑대나 고블린과 같은 몬스터에게 강력한 이빨을 주는 스킬. 컨퓨즈, 상대에게 혼란을 주는 스킬.
네크로맨서의 주력 스킬이다. 안개는 생명체의 시야를 가리지만 생명력을 보는 네크로맨서의 몬스터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티스는 말 그대로 몬스터의 공격력이 강해지는 스킬이었고, 컨퓨즈는 혼란을 주는 스킬이었다.
다행히 컨퓨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진석에게 통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몬스터들의 방어력과 공격력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거기다 안개까지.
김진석은 급히 노라의 근처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몬스터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속에서는 또 피가 올라오고 있었고, 김진석은 최하급 포션을 꺼내 입에 물고 천천히 삼키며 노라를 바라봤다.
“쿨럭…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군.”
노라의 몸에는 더는 검은 핏줄이 돋아나지 않았고, 숨소리도 안정되고 있었다. 그녀만 깨어난다면 이 거지 같은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다.
그때 김진석은 급격히 바뀌는 바람의 방향을 캐치해 단검으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막아내려고 했다.
“크아악!”
하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날아오는 무언가를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김진석의 손등에 바람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날아오던 무언가는 투명한 벽에 막혀 떨어져 사라졌다. 김진석은 사라지기 전에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바라봤다.
“…뼈 창.”
네크로맨서의 몇 없는 공격 스킬. 그리 강력한 스킬은 아니었지만 그게 레벨 50인 네크로맨서가 사용했다면 말이 달랐다.
김진석은 안갯속을 바라봤고, 그곳에는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사라지고 있는 네크로맨서 질린의 모습이 보였다.
김진석은 급히 구멍이 뚫린 손으로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그대로 유리병을 부숴 버리며 손을 치료했다.
입에서 신음이 나올 것만 같은 김진석이었지만 이 악물고 참아 냈다. 그리고 떨어뜨린 독거미의 단검을 다시 주웠다.
“좀… 빨리 일어납시다.”
그때 늑대형 몬스터와 고블린들이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 * *
“…이 방향은, 사산인가?”
“그냥 둘이서 몬스터 잡으러 간 거 아닙니까? 굳이 레온하르트 님이 직접 안 가셔도 저희만 보내셔도 되는데 말이죠.”
레온하르트는 넘치는 불안감에 기사단의 인원까지 불렀다. 그는 칼라 성을 나갔다는 둘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기사단을 불렀다.
칼라 기사단은 레온하르트가 그 어떠한 명령을 내리든 맹목적으로 따르는, 충성심 높은 기사단이다.
레온하르트는 휴식 중에 미안하지만 자신을 따라올 인원이 있냐고 물어봤고, 휴식 중인 거의 모든 기사단원이 따라나섰다.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레온하르트는 이렇게까지 안 와도 된다고 했지만 칼라 기사단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중 추적에 능한 기사가 김진석과 노라의 뒤를 추적하고, 레온하르트와 그의 기사단이 뒤따랐다.
그런 모습에 칼라 성의 주민들은 의아해했지만 단체로 훈련 가는 거니 생각했다.
“만약 사산에 갔다면 말려야 한다.”
“…요즘 사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몬스터가 거의 없는 사산에 요즘 몬스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고…….”
레온하르트도 사산의 위험성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곳을 출입 금지했고, 주기적으로 사산의 동태를 확인하는 기사를 배치했었다.
기사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괜한 걱정 아닐까요? 노라, 그녀도 당연히 사산이 위험한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나도 괜한 걱정이었다면 좋겠다만…….”
그렇게 칼라 기사단과 레온하르트는 사산을 향해 움직였다.
* * *
김진석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노라를 눕힌 장소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쓰러질 때조차 노라의 위에 쓰러졌다.
“대단…하군.”
네크로맨서 질린은 김진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고, 주변은 피바다였다.
질린이 소환한 몬스터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았으니 저 피의 주인은 전부 김진석이었다. 도저히 한 사람에게서 나올 피가 아니었다.
“좋은… 생명이군…….”
네크로맨서 질린은 겉으로 보기에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아직 그의 수준이 부족해 노라를 죽인다고 한들 소환할 순 없었다.
하지만 사기를 계속해서 마신다면 그녀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뿐만 아니라 레벨은 부족하지만 엄청난 생명을 가진 남자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질린이 쓰러진 김진석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김진석의 몸이 꿈틀거렸다.
“멋진… 생명력이군…….”
질린은 아직도 김진석이 살아 있는 줄 알고 몬스터들을 시켜 마저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김진석의 몸이 갑자기 뒤집혔고, 그 아래에 깔려 있던 노라가 일어났다.
온몸이 김진석의 피에 적셔져 있었고, 그녀는 쓰러지면서까지도 놓지 않은 독거미의 단검을 김진석의 몸에서 조용히 집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 색과 같은 핏빛을 온몸에 물들인 채 눈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