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죽음 】
노라가 보는 것과 달리 김진석은 죽을 맛이었다.
김진석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방심할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레벨이 7이나 높은 몬스터였고, 아무리 그보다 더 높은 몬스터를 잡은 경험이 있는 김진석이었지만 놈은 인간형.
3미터에 다다르는 리들리의 목을 조를 수 없는 노릇. 기습해서 독까지 걸린 리들리와 정상인 리들리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기껏해야 김진석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몬스터를 상대해 본 김진석은 이제야 진짜 몬스터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저 거대한 몸으로 날아다니기까지 했으니 훨씬 더 힘든 상대였다.
임프들은 몸집이 조그마했을 뿐만 아니라 닭처럼 계속해서 날아다니는 게 아닌, 그저 날개가 비행에 도움을 주는 게 전부인 놈들이었다.
하지만 리들리는 달랐다. 직경 4미터에 다다르는 날개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리들리는 그 모습만으로 일반인이라면 오줌을 지릴 수준이었다.
다행히 눈앞의 리들리는 전투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고, 입에서 불을 뿜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날아다니면서 거대한 몸체를 이용한 육탄 공격이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김진석을 잡으려고 시도했다.
“스텝.”
하지만 그때마다 김진석은 적절한 스킬의 사용으로 리들리의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마치 거인이 날아다니며 공격하는 것만 같았지만 김진석은 절대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걸 넘어서 이제는 털끝 하나의 거리로 피하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훈련의 목적.
“노라가 있는 이상 난 안전하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순 있겠지만 그건 오로지 김진석, 자신의 잘못. 그렇게 된다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노라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훈련할 수 있었다면 좋았다.
실전처럼, 이 아닌 진짜 실전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스킬에 의존해 놈의 공격을 피하던 김진석은 점점 스킬을 사용하는 빈도를 낮췄고, 리들리가 지칠 때쯤에는 이미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리들리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고, 김진석은 이제 마무리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리들리의 목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무슨 짓입니까?”
당연히 그 일을 행한 건 노라였다. 그런데 노라는 언제나 짓던 여유로운 웃음 대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속이 이상해. 역겨운 기분이 들어. 내려가자.”
그런 그녀의 옆에는 금화 수십 개가 떨어져 있었다. 김진석은 극한의 집중력으로 눈앞의 리들리에게만 집중했었고, 둘이 싸우는 소리에 몬스터들이 하나둘 오고 있던 것이다.
노라는 그 몬스터들을 처리한 다음 김진석의 싸움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점점 컨디션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김진석은 노라가 그런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사산에서 올라오는 사기. 산 사람, 아니 생명체에게는 대부분 좋지 못한 기운이다.
계속해서 그 기운에 노출된다면 드렌트처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로 모른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김진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그는 아무런 느낌조차 나지 않았기에.
김진석은 몰랐지만 리들리와 김진석은 둘이서 1시간 가까이 싸우고 있었다.
사산의 기운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10분도 견디지 못하고 속에서부터 망가진다. 이미 1시간이나 견딘 노라가 대단한 것이었다.
김진석은 떨어진 몇 개의 금화를 전부 주웠다. 아쉽지만 아이템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둘이 사산에서 나가려고 하는 그때.
기에엑!
리들리의 괴성으로 추측되는 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더 날카로운 괴성이었다.
김진석은 그 소리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빨리 나가죠.”
그런데 그때 땅바닥에서 거대한 손바닥이 솟아올랐다. 정확히는 김진석과 노라가 리들리를 죽일 때 흩뿌려진 피에서 손바닥이 올라온 것이다.
그걸 본 즉시 김진석은 흑호를 불렀지만 흑호는 나오지 않았다. 김진석은 그걸 보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네크로맨서는 필드 보스가 아니다. 고블린 족장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필드에서 나오는 보스로 특정 시간에 몬스터가 나온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퀘스트를 통해 나오는 특수 몬스터다. 컷신을 통해 이벤트가 발동되며 던전과 같은 형식으로 그 퀘스트를 깨기 전까진 탈것을 탈 수 없다.
플레이어가 특정 레벨이 되면 칼라 성의 성주, 레온하르트에게서 퀘스트가 생긴다.
사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하면서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플레이어는 지금의 김진석처럼 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렇게 플레이어는 사산에 혼자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네크로맨서의 흔적인 살점이 떨어진 몬스터들이 득시글한 걸 발견했다.
마치 눈앞의, 피에서 나온 리들리처럼 말이다.
“네크로맨서입니다, 노라!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김진석은 노라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급히 노라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식은땀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이미 온몸이 젖어 있었고, 안색이 좋지 못했다. 사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신 것이다.
“진짜… 미치겠네.”
* * *
“어때, 엘리온. 둘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
“뭐가 있어야 듣지. 아, 그래도 카이 학생은 기숙사 시험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고 하더군.”
레온하르트는 엘리온의 말에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만난 곳은 기사 학교의 이사장실. 엘리온이 항상 거주하는 곳이다.
“내가 본 인물인데 당연하지.”
“그런데 그 학생이 문제를 좀 일으켰어.”
엘리온은 레온하르트에게 김진석이 기숙사에서 일으킨 사건을 말해 주었다. 그런데 오히려 레온하르트는 처음 보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기숙사장이 한 방 먹었군. 그 시험에서 학생이 물의를 일으키면 기숙사장이 책임을 지니. 애초에 그놈은 맘에 들지 않았어.”
레온하르트는 기숙사장인 앙골라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범죄자는 아니지만 질이 나쁜 그가 기숙사장이 된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레온하르트였다.
“그래서. 카이, 그 남자가 찌른 학생은 멀쩡한가?”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배를 찌르고 포션을 줬어. 카이 학생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진 몰라도 후유증은 없더군.”
그렇게 둘은 카이에 대해 한참을 말하고 있을 때.
“그러고 보니 노라, 걔는 어떤가?”
“몰라. 우린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방임주의라.”
“자네만 그런 거 아닌가?”
“물론 그럴 수 있지. 그러고 보니 둘이 학교 정문에서 만나서 어디론가 가던데?”
레온하르트는 엘리온의 말에 불안감을 느꼈다.
노라가 남자관계가 문란하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김진석은 베일에 싸인 남자다.
아무리 레온하르트가 눈여겨본 인재라고 하지만 지금의 노라에 비하진 않는다. 게다가 그는 위험한 일에 항상 연루되어 있었다.
임프 사건에서부터 던전에서 나온 이상한 몬스터들이 칼라 성을 침공하려 한 것까지. 전부 그 남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다.
“…어디로 갔나?”
“모르겠는데. 다만 성 밖으로 나간 건 알고 있어.”
그 말을 듣고 레온하르트는 불안감을 지울 순 없었다.
* * *
“노라! 정신 차리세요, 노라!”
김진석은 노라를 흔들어 깨워 봤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고, 어느새 핏줄이 피부 밖으로 보이고 그 핏줄이 검은색으로 도드라지고 있었다.
이미 주변에는 땅에 떨어진 핏속에서 살점이 떨어진 몬스터들이 거의 다 나온 상태였다.
김진석은 어쩔 수 없이 급히 노라를 둘러업고 산 아래로 뛰었다. 하필 리들리와 훈련 아닌 훈련을 한 직후라 하체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두고 갈 순 없었다.
아니, 사실 버리고 가도 됐다. 어차피 만난 지 얼마 안 된 인연이었고, 노라가 자기를 사산까지 이끌었으니 본인 잘못이었다.
그녀에게 얻을 지식이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목숨이 소중했으니깐.
하지만 그건 김진석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뭐가 어찌 됐든 그녀를 여기에 두고 간다면 죽을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기사 학교에서의 문제가 생긴다.
레온하르트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보이는 노라를 버리고 와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퇴학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
김진석은 있는 힘껏 발을 놀려 사산의 아래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살점이 떨어진 몬스터들은 아무 미동이 없었다.
그렇게 김진석은 사산의 입구까지 도착했고, 노라를 땅에 눕혔다. 사기는 그나마 맑은 공기를 마시면 산 사람의 회복력으로 치유될 수 있다.
뒤에 몬스터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김진석은 인벤토리에서 하급 포션을 꺼내 뚜껑을 열어 노라의 입에 흘려 넣었다.
하지만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 노라는 포션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고, 피부 위로 올라온 검은 핏줄에 직접 적으로 포션을 뿌렸다.
다행히 검은 핏줄이 점점 사라졌지만 이내 피부 위로 검은 핏줄이 다시 올라왔다. 하지만 검은 핏줄이 올라오는 속도가 현격히 줄어든 것으로 보아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후…….”
포션이 통한다는 걸 알았으니 우선 한시름 놓았다. 김진석은 다시 노라를 업은 채 사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렇게 사산의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
-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
“이런 씨…….”
김진석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나타난 검은색 글씨는 김진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게임이야, 아니면 현실이야! 하나만 해!”
김진석은 검은색 글씨를 무시하고 나가려고 했지만 투명한 벽에 막힌 것처럼 나갈 수가 없었다.
스킬을 사용하고 뭘 해도 그 투명한 벽은 절대 부서지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저벅저벅.
김진석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둘을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을 꽁꽁 싸맨 검은 로브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안 보였지만 순간순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핏속에서 올라온 몬스터와 같이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네크로맨서…….”
[네크로맨서 질린. LV:50]
감정으로 확인한 놈의 레벨은 50. 다행히 완성된 네크로맨서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네크로맨서보다 레벨이 5나 더 높았다.
애초에 일반적인 네크로맨서도 지금의 김진석이 상대하기 벅찬 상대였지만 그보다 더 높은, 자그마치 50레벨.
“나를… 아나?”
그때 네크로맨서가 말했다. 목소리는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 귓속을 때리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그… 여자를… 두고… 가라. 좋은… 양분이… 될… 것… 같군……. 목숨은… 살려… 주지.”
네크로맨서는 김진석에게 제안했다. 어차피 저 네크로맨서 질린은 칼라 성을 침공할 것이기 때문에 목숨을 살려 줘도 상관은 없었다.
당연히 질린의 목적은 더 많은 산 사람의 생명력. 생(生)기를 위해서.
그때 검은색 글씨가 아닌 푸른색 글씨가 김진석의 눈앞에 나타났다.
[두고 간다.
데려간다.]
그 푸른색 글씨는 김진석에게 선택지를 준 것 같았다. 만약 노라를 두고 간다는 선택을 한다면 아마도 투명한 벽을 뚫고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려간다면 네크로맨서 질린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어떻게든 살 선택지를 주는군.”
전에도 말한 적 있었지만 게임은 어렵게 만들긴 하지만 깨지 못하게 만들진 않는다. 저 푸른색 글씨는 김진석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두고 간다를 선택하라고 말이다.
김진석의 선택하는 걸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노라를 등에서 조심히 내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