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사산에는 생명체가 거의 살지 않는다.
리들리와 같은 악마에서 파생된 몬스터, 즉 사기를 좋아하는 몬스터만이 사산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기를 좋아하는 몬스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주변에는 리들리밖에 없다, 가 노라의 말이다.
“노라…….”
“교수님.”
“…교수님. 리들리만 존재하는 거 맞습니까?”
“응? 아닌데?”
그녀의 말에 답하듯 눈앞의 검은색 나무가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나뭇가지가 채찍처럼 휘어져 김진석과 노라를 공격했다.
노라가 단검을 꺼내 나뭇가지를 잘라 내려 할 때 한발 앞서 김진석이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슬라이서.”
김진석은 스킬을 사용했다. 노라의 추천으로 배운 단검 전용 스킬의 위력은 뛰어났다. 순간적으로 달리면서 양손에 든 단검으로 나뭇가지를 역방향으로 베어 버렸다.
“…뭐야,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거야?”
노라는 너무 쉽게 스킬을 사용하는 김진석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스킬은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스킬은.
하지만 그 스킬을 사용하는 건 말이 달랐다. 그 스킬이 요구하는 자세를 정확히 취해야만 했다.
스킬을 배운다고 한들 사용하기가 어려웠고, 이렇게 단번에 사용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아니, 없다고 봐야 한다.
스킬 설명에는 어떤 자세인지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으니 사용하려면 사실상 이미 배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훨씬 빨랐다.
“알고 있었어?”
“예,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김진석은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스킬을 사용하니 노라가 놀랄 수밖에. 김진석도 여성 용병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게 공부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김진석의 비밀을 모르는 노라는 그의 기행이 놀라웠다.
김진석은 남들이 자신보고 재능이 있다고 착각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을 퇴학시키는 걸 학교에서 주저할 테니깐.
김진석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라가 도대체 무슨 시험을 낼지 몰랐기에.
나무 몬스터는 김진석의 난도질에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드렌트를 생각보다 쉽게 죽이네.”
움직이는 나무 몬스터 드렌트. 리들리와 같이 사기를 좋아하는 몬스터로 나무가 몬스터로 변하는 케이스다.
사기를 오랫동안 흡수한 나무가 변하기 때문에 게임 속에서는 레벨이 32로 꽤나 높은 몬스터였지만 지금 김진석이 잡은 드렌트는 레벨이 20이었다.
그때 한 마리의 드렌트가 또다시 나뭇가지를 채찍처럼 휘둘렀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꺼져.”
노라는 김진석과 같이 난도질할 필요도 없이 그저 단검을 드렌트의 몸통에 던졌다. 그곳은 사기가 모여 나무가 몬스터로 변하게 된 이유인 검은색 구가 있었고, 노라의 단검은 정확히 그걸 꿰뚫었다.
그건 드렌트의 마나 핵이었다. 원래는 몸에 숨겨져 있었지만 놈은 갓 드렌트가 되었는지 허공에 둥둥 떠 있었고, 노라가 그걸 정확히 캐치해 단검으로 꿰뚫어 버린 것이다.
채찍처럼 휘어져 오던 나뭇가지는 순식간에 힘을 잃고 이내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김진석은 드렌트 둘을 잡고 떨어진 금화를 집으며 말했다.
“15금화. 나눌까요?”
“…마지막에 한 번에 정산하자. 교수랍시고 양보해 주고 싶긴 한데 나도 빚이 있어서…….”
“다 갚아 준 거 아닌가요? 이사장님이?”
“…쯧.”
둘은 산속 깊숙이 들어갔다.
아직 사기를 별로 마시지 않았는지 드렌트로 변한 나무는 별로 없었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출현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산에 들어온 이유인 몬스터를 만날 수 있었다.
“리들리다.”
실제로 본 리들리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3미터에 다다르는 놈의 모습은 너무나도 커 보였다. 게다가 3미터는 놈의 몸만이었고, 날개를 쭉 펼치면 거의 7미터에 다다라 보였다.
김진석과 노라는 은밀한 발걸음이라는 스킬을 사용해 나무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리들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약점이 어딥니까?”
“날개. 그런데 우리 무기로는 베어 내기 어려울걸.”
리들리의 보랏빛 날개와 붉은 피막은 4미터 수준이었다. 고작 50센티밖에 안 되는 단검으로는 저걸 전부 잘라 내기 힘들어 보였다.
“뭐 해?”
“…예?”
“잡아.”
“…뭐 안 알려 줍니까?”
“나도 몰라. 그냥 잡아 봐.”
“하…….”
노라에게 기대한 김진석의 잘못이었다.
한숨을 쉬고, 김진석은 리들리에 대해 생각했다.
녀석은 타격형 무기, 즉 둔기에 약했다. 물론 기껏해야 일반 검이 100% 대미지가 들어가면 둔기는 110% 대미지가 들어갔다.
그것 외에는 딱히 약점이라고 볼 게 없는 리들리였다.
게다가 도마뱀과 같이 주둥이가 긴 놈의 입에선 불까지 내뿜었다. 불 공격을 마땅히 막을 방법이 없는 김진석은 막막할 뿐이었다.
그나마 기사 학교에서 받은, 온몸을 절반만 가릴 수 있는 방패가 있긴 했지만 그거만 믿고 리들리에게 덤벼들긴 어려웠다.
“어썰트.”
노라의 추천으로 배운 스킬, 단검으로 상대를 잡고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는 스킬이다. 게임 속에서는 홀딩기라고 하는, 상대를 붙잡아 쓰는 스킬로 상대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게임 속에서는, 말이다.
끼에엑!
김진석은 엄청난 속도로 나무 위로 뛰어올랐고, 단검으로 찌르자마자 리들리는 깨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놈은 몸을 떨쳤다. 거대한 몸집의 리들리는 순식간에 몸을 비틀어 김진석을 떼어 냈고, 날개를 펼쳤다.
그렇게 날아오르려고 거대한 날개를 펼쳐 뛰어올랐다. 그런데 하늘에서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더니 이내 떨어져 버렸다.
어썰트.
김진석의 어썰트는 그 짧은 시간에 단검으로 총 15회의 모든 공격을 욱여넣었고, 리들리 오른쪽 날개의 피막을 난도질했다.
그 결과 리들리는 제대로 날지 못했고, 한쪽으로 치우쳐 중심을 잡지 못해 추락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결과가 도출된 원인은 단 하나였다.
“…언제 가져갔니?”
노라는 언제든지 무기를 꺼낼 수 있게 허리춤에 독거미의 단검을 들고 있었고, 김진석은 그걸 정확히 보고 있었다.
노라가 김진석에게 리들리를 잡으라고 태평하게 말할 때 방심한 그녀의 단검을 김진석은 자연스럽게 빼내며 동시에 스킬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운도 좋았는지 리들리는 독에 걸려 버렸다. 놈은 땅에 떨어져 불을 내뿜으려고 했는데, 입에서 초록빛 피를 내뱉고 있었다.
“이레이저.”
김진석의 몸은 마치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여전히 땅에다 피를 토하고 있는 리들리의 위로 올라갔고, 인간으로 치면 척추로 추정되는 부위에 정확히 단검을 찔러 넣었다.
다시 한번 리들리는 끔찍한 괴성을 내뱉었고, 거기서 이레이저란 스킬이 끝났지만 김진석은 한술 더 떠서 발로 밟아 단검을 눈에 안 보이는 곳까지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내지 못했고, 이내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아 그대로 죽어 버렸다. 리들리는 순식간에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리들리의 몸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던 단검이 놈이 사라지자 땅바닥에 떨어졌고, 김진석은 그것과 떨어진 금화, 그리고 반짝이는 아이템 하나를 주웠다.
[패링 대거. 공격력 30. 레벨 제한 30. 내구도 90/100
내장 스킬: 패링. 상대의 공격을 완벽히 튕겨 낼 시 상대를 1초간 기절에 빠트린다.]
3티어 아이템이었다. 당연히 리들리는 레벨이 35였으니 3티어 아이템이 뜨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공격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래도 내장된 스킬이 있었으니, 바로 패링.
카운터 스킬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조금 달랐다. 카운터는 공격을 맞아야 발동되는 스킬이었지만 패링은 상대의 공격을 튕겨 내야만 했다.
“아… 하필 나와도 이런 아이템이 나오냐.”
어느새 다가온 노라가 말했다. 패링 대거. 마침 노라와 지금의 김진석이 사용하는 단검이었지만 3티어 아이템 중에서는 최하위 아이템이었다.
3티어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2티어 아이템인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와 공격력이 똑같았다. 물론 거대 둔기와 단검이라는 차이점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약한 건 변함이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패링 대거의 내장된 스킬인 패링 때문이다.
스킬에 성공만 한다면 확정적으로 상대를 기절시키니 쓸 만하긴 했다.
하지만 모든 공격을 패링할 수 있는 게 아닌 특정 공격만 패링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건 게임 속 이야기.
“그래도 공격력 높으니 네가 써. 선물이야.”
“감사합니다.”
김진석은 독거미의 단검을 인벤토리에 챙겨 놓은 손수건으로 닦아 노라에게 건네주었다.
여담이지만 김진석의 인벤토리는 아이템뿐만 아니라 손수건처럼 따로 분류되지 않은, 일반적인 휴지나 손수건 등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었다.
지금껏 김진석이 사용했던 단검은 기사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내어 주는 단검이었다. 아이템으로도 취급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나쁘지 않게 사용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단검을 사용할 수 있었다.
“너 그 단검에 있는 스킬을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아무도 그 스킬을 사용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어.”
노라의 말은 즉 스킬이 요구하는 자세, 행동을 아직 아무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김진석은 달랐다. 그는 스킬을 사용하면 몸이 저절로 알아서 자세를 취해 주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김진석은 패링을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상대의 공격을 튕겨 낸다는 스킬. 하지만 공격을 튕겨 내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없는 스킬이다.
스킬을 실패할 때의 페널티, 즉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스킬이다.
문제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거다.
스킬을 성공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상대의 공격을 맞아야만 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쓸 만한 아이템이니깐 아껴 써.”
그래도 아이템, 그것도 3티어였으니 나쁘진 않았다.
노라는 김진석에게 건네받은 독거미의 단검을 빤히 쳐다보다가 김진석에게 말했다.
“이 무기가 좋은 걸까, 아니면 네 재능이 대단한 걸까. 스킬을 배우자마자 바로 사용하는 걸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때는 좀 정신이 없었어.”
사실 노라는 그때 김진석에게 스킬을 사용하라 말하고 자세를 알려 주려 했었다. 그런데 김진석은 그 스킬을 바로 사용해 버렸다. 심지어 자신의 직업이 아닌 다른 직업의 스킬을 말이다.
우연이라도 스킬을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직업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는 노라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김진석은 딱히 할 말이 없었는데, 그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또 다른 리들리 한 마리가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스텝.”
스텝, 처음으로 배운 방어형 스킬이다. 정확히는 회피형 스킬이었고,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스킬이다.
김진석의 몸은 마치 순간 이동한 것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한 리들리의 공격을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마침 새로 얻은 무기도 있으니 이제 제대로 상대해 봐.”
* * *
“이야… 저거 미친놈이네.”
노라는 김진석과 리들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단검이 제대로 있는지 자신의 허리춤을 확인했다.
즉, 눈앞에 있는 김진석은 방금 얻은 패링 대거로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김진석은 리들리와 싸우면서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하고 있지 않았다.
분명 몸의 움직임은 투박했지만 털끝 하나의 차이로 리들리의 공격을 피하는 걸 보면 일부러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아니, 실제로도 노라의 눈에는 위태롭게 보였다.
“하지만 투박한 만큼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어. 이해할 수 없네. 분명 움직임을 보면 스승 따위는 없어. 그런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그런데 노라가 하나 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레벨 제한이 40인 독거미의 단검을 김진석이 사용했다는 것.
“대단하네.”
그걸 모른 채 노라는 김진석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