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모래 먼지가 가라앉고, 그 안에는 순백의 갑옷이었지만 피로 물들어 붉은 갑옷을 입고 있는 레온하르트가 서 있었다.
“30분 지났다.”
김진석은 레온하르트의 성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본인이 도맡아 한다.
남을 못 믿는다기보단 그저 그런 성격이었기에.
게다가 자신의 기사단이 위험에 처했는데 최고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30분이라고 생각했고, 김진석의 그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타임 어택은 이 의미이기도 했다.
김진석 혼자서 갈룸의 왕을 죽일 수 있다면 베스트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진석은 레온하르트라는 보험을 들어 두었을 뿐이다.
“이놈만 죽이면 끝날 겁니다!”
김진석은 일부러 갈룸의 왕이 도망가지 못하게 놈의 발목을 메이스로 부숴 버리며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그 말에 망설임 없이 등 뒤에 있는 거대한 해머와 방패를 꺼냈다.
김진석과 같은 둔기류의 무기였지만 그 크기부터가 남달랐다.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는 기껏해야 김진석의 머리 정도의 크기였지만 레온하르트가 든 해머는 몸의 절반 가까이 되는, 마치 철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의 방패도 전신을 전부 가리는 대형 방패로 마치 살아 움직이는 탱크 같았다.
그런 그가 제자리에 서서 하늘 높이 해머를 들더니 내리치며 말했다.
“징벌.”
그때 하늘에서 광기의 굴을 뒤덮을 만한 크기의 거대한 망치가 생겼다. 레온하르트가 손에 든 거대한 해머와 같은 망치를 내리치니 하늘에 생긴 거대한 망치 또한 갈룸의 왕을 향해 떨어졌다.
“허…….”
문제는 갈룸의 왕을 잡아 두느라 근처에 있던 김진석이었다. 피하려고 해도 워낙 범위가 넓어서 피할 공간도 보이지 않았고, 갈룸의 왕과 싸운 탓에 지쳐 반응이 늦었다.
“카운터.”
김진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를 취했고, 이내 거대한 마나로 만들어진 푸르른 망치가 땅에 떨어졌다.
* * *
레온하르트는 30분의 기다림 끝에 인내심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는 밧줄도 잡지 않고 그대로 광기의 굴 아래로 떨어졌고,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했다.
처음 보는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인 남자가 말한 것과 같이 안개를 들이마시니 기분이 이상했다.
들어서자마자 역겨운 기운으로 인해 온몸이 뻐근한 느낌이었다.
“확실히 내가 이 정도면 다른 아이들은 버티기 힘들 수도 있겠어.”
레온하르트는 칼라 기사단의 기사들을 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김진석이 기사 한 명이라도 올려보냈다면 30분이 아니라 더 오래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기사 한 명도 올라오지 않았고, 노라도 입만 산 남자라고 생각해 실망했다.
그런데 광기의 굴 아래에 도착하고 나니 김진석이 갈룸의 왕을 이미 제압한 상황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레온하르트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칼라 기사단의 정예 기사단원들도 다 본인이 차출한 인원이었으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본 김진석은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노라와 함께 오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고, 고작해야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가죽 갑옷이 기껏해야 레벨 20이 입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더욱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절벽 아래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했으니 뭔가 믿는 게 있다고 생각했지만 30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거다.
그런데 그 남자가 혼자서 놈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를 제압한 것이다.
하지만 마무리가 부족한 게, 수장은 계속해서 재생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재생 능력이었고, 그것 때문에 저 남자가 죽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정답인 듯 남자가 수장을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외쳤고, 레온하르트는 그에 맞춰 자신의 주 무기인 성자의 해머를 꺼내 스킬을 사용했다.
“징벌.”
징벌은 레온하르트의 무기인 성자의 해머에 붙어 있는 스킬이다. 성자의 해머는 레벨이 52 때 사용할 수 있는 해머로 그가 가장 애용하는 무기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 스킬은 레벨 50의 몬스터도 골로 보낼 수 있는 강력한 스킬로,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는 스킬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도 안개를 마셔서 그런지 제대로 된 판단이 안 됐고, 수장의 근처에 있는 김진석에게 맞을 징벌을 사용해 버린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김진석에게 거대한 푸르른 해머가 적중하기 직전, 그의 몸에 푸른 막이 생겼다.
“자네! 괜찮나?!”
레온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김진석에게 달려가다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어 바로 대형 방패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방패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 힘은 얼마나 강했는지 레온하르트조차 한 발짝 물러날 정도였다.
레온하르트는 방패를 내려 방패에 부딪히는 게 뭔지 확인했는데, 그건 평범한 창이었다.
“…이건?”
“쿨럭.”
그와 동시에 앞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레온하르트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그곳에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기침하는 김진석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기침이 아니라 각혈을 하고 있었고, 이내 쓰러졌다.
레온하르트가 그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할 때 갑자기 주변에 잔뜩 낀 안개가 사라지며 그와 동시에 그의 눈앞에 푸른색 글씨가 나타났다.
[보스 몬스터의 죽음을 확인.
광기의 굴. 던전 공략을 인정한다.]
* * *
“…도대체 기절을 얼마나 하는 거야?”
김진석은 이제 익숙하게 기절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는 익숙한 천장이었다.
“용병의 쉼터인가?”
“맞아.”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진석이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노라가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몰라. 레온하르트 님이 너를 그 굴 안에서 직접 꺼내 오시던데?”
그렇게 말하며 노라는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김진석은 광기의 굴 안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해 냈다.
“징벌… 맞기 직전에 간신히 카운터를 쓰긴 했지.”
게임 속에서 카운터 스킬은 0.5초간 최대 체력의 50퍼센트의 방어막을 얻고 그사이 공격에 맞는다면 반격을 날린다.
즉, 무적은 아니다.
최대 체력의 1.5배 이상의 대미지를 한 번에 받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다. 다행히도 김진석은 레온하르트의 징벌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김진석은 징벌과 레온하르트의 무기를 알고 있었고, 생각보다 자신의 체력이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안하군.”
그때 방문을 열며 레온하르트가 나타났다. 노라가 그를 찾아 데려온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안개를 마시니 상황 판단이 이상해졌던 것 같군. 그대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나 다름없네. 미안하군.”
레온하르트는 김진석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확실히 김진석은 그에게 죽을 뻔했으니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사과받는다고 끝이 아니다.
“자네 덕분에 후유증은 있지만 광기의 굴에 들어갔던 기사들이 멀쩡하더군. 정말 고맙다. 그리고 제안할 것이 있다.”
그리고 그건 레온하르트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도움을 받은 데다가 실수로 죽일 뻔했으니 제대로 보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명예가 먼지처럼 사라질 테니.
그런데…….
“제안 말입니까?”
제안이라니, 무슨 말인가. 뭐라도 보상을 해 줘야 탈이 없을 텐데 말이다.
“그대에게도 좋은 일일 걸세. 그… 자네 이름이 뭐지?”
“김…….”
그 말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생각난 것이 있었다. 가이크 성에서 그는 다렌과 찰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다.
죄는 없었지만 그는 그를 가둔 감옥에서 탈옥을 했고, 그것만으로도 죄가 생긴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김진석 자신을 찾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위험성 있는 이름을 굳이 말할 이유는 없다.
“카이입니다.”
김진석은 로스트 월드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키우고, 가장 애정을 준 캐릭터의 이름, 카이의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레온하르트와 어느새 들어온 노라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흠… 부모님이, 아니… 아니다.”
“좋은 이름이네.”
둘의 반응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김진석은 개의치 않고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그래서… 제안이란 게 뭡니까?”
“아, 그렇군. 카이, 혹시 내 아래로 올 생각이 있나?”
그런데 레온하르트의 뜬금없는 말에 이해가 안 갔다. 갑자기 자신의 휘하로 오라니. 김진석, 자신의 무얼 보고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자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겠네.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했지. 내가 새로 만들어 주겠네. 그리고 이곳이 아닌 주거 환경도 지원해 주겠네.”
김진석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레온하르트는 어떻게든 김진석을 들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카이, 자네 레벨이 몇인가? 용병에게는 무례한 질문인 줄 알고 있지만 자네는 정식 용병도 아니지 않은가.”
레온하르트는 김진석이 기절한 사이에 이미 그에 대한 조사를 마친 것 같았다. 아마도 옆에 노라가 대충 설명한 것이겠지.
김진석은 자신의 레벨을 확인했다.
[LV:28]
그런데 어느새 김진석의 레벨이 28이나 되었다. 아마도 갈룸들을 잡으며 레벨 26의 끝자락까지 올렸는데 갈룸의 왕을 잡으면서 한 번에 2레벨 업을 한 것 같았다.
마무리는 김진석이 하지 않았지만 로스트 월드에서도 대미지를 준 것만큼 기여도를 측정해 그만한 경험치를 준다.
아마도 이 법칙이 이곳에서도 적용된 것 같았다.
“28입니다.”
“…뭐? 그게 사실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레온하르트가 아닌 노라가 말했다.
“레온하르트 님이 몬스터 수장을 죽였을 때 네가 레벨 업 했다는 걸 두 눈으로 보셨다고 했어. 그렇다면 넌 기껏해야 레벨이 27 이하였겠지. 그런 너 혼자서 니라 일행을 전부 죽였다는 말이야?”
니라 일행. 김진석이 죽였던, 그를 속이려는 여성 용병의 이름이었다. 흑호가 한 놈 죽이긴 했지만 다른 놈들은 전부 김진석이 죽였다.
“…예, 그들이 방심했을 때 스킬을 못 쓰게 했습니다.”
갑자기 김진석이 달려들어 그들은 스킬도 쓰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물론 김진석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확실히 레온하르트 님이 눈독 들인 이유가 있네. 뭐, 어디 다른 나라에서 용병 짓이라도 하다 온 거니?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그들이 저를 먼저 죽이려고 했으니깐요. 정당방위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진석은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신분증이 없는 건 봐준 것 같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건 봐준다는 수준이 아니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김진석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감옥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김진석이 침을 꿀꺽 삼키며 레온하르트의 표정을 살펴봤지만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니라, 나도 이름을 들어 볼 정도로 질이 안 좋은 용병들이었다. 잘 죽었고, 잘 죽였다. 실력은 검증된 거나 다름없군. 점점 마음에 들어.”
오히려 레온하르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레온하르트를 보며 노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지경이 되면 레온하르트 님은 어떻게든 널 데려가려 할 거야. 포기하는 게 좋아. 너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노라는 레온하르트의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 겁니까?”
“뭘? 레온하르트 님? 나도 저 사람한테 스카웃 당했거든. 하지만 기사는 마음에 안 들어서 안 한다고 했어.”
그제야 노라가 레온하르트를 잘 아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김진석과 같은 방식으로 스카웃 당한 것 같았다.
“굳이 기사가 안 돼도 상관없습니까?”
“어… 뭐, 사실 안 되는데 내가 도망쳤을 뿐이야. 지원이란 지원은 다 받아 놓고 기사가 안 되면 레온하르트 님이 왜 잘해 주겠어?”
그녀의 말이 뭔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