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김진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기껏 광기의 굴을 탈출했는데 다시 자신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전력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도 여기서 좋은 인상을 남기면 로스트 월드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설령 신분증이 없는 그라도 기사단을 구해 준다면 아무리 레온하르트라도 무시할 순 없겠지.
김진석은 애초에 다시 광기의 굴로 향할 때부터 들어갈 거라고 예상은 했다.
이미 흑호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사라졌고, 그가 믿을 건 오직 자신의 몸이었다.
“뭘 새삼스레. 언제나 그래 왔잖아?”
임프와 싸울 때도, 고블린과 싸울 때도, 투견과 싸울 때도 그가 믿을 건 오로지 자신의 몸이었다.
“횃불 같은 거 있습니까?”
김진석은 근처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들은 이 거대하고 깊은 굴을 발견하고 어두울 걸 예상해 바로 횃불을 제작해 내려갈 준비를 하고 실제로 내려간 이들이 있었는데, 레온하르트가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자 남은 이들은 광기의 굴 근처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들에게 횃불을 딱 하나 받았는데, 그때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만드신 횃불, 전부 굴 아래로 던져 주실 수 있습니까?”
김진석은 자신에게 횃불을 준 그 기사에게 말했다. 주변에 있는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다른 기사들보다 지위가 높은 자인 것 같았다.
칼라 기사단의 기사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광기의 굴로 들어갔는데도 자신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이유가 앞의 남자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레온하르트의 명령에 따랐다.
“그냥 안으로 던지면 되나?”
“예, 최대한 넓게 펼쳐지도록 던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차피 들어가지도 못하니 그 기사는 김진석의 말을 따라 주었다. 지위가 높아 보이는 기사가 김진석의 말을 따라 횃불을 던지니 이내 다른 기사들도 횃불을 광기의 굴 안으로 던져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진석은 한 손엔 횃불을 들고 밧줄을 잡고 미끄러지듯이 광기의 굴 아래로 쭉 내려갔다.
현실이었다면 손바닥이 까지거나 했겠지만 레벨이 26이나 된 그의 육체는 고작 그것으로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았다.
김진석은 순식간에 안개를 뚫고 내려가 또다시 광기의 굴 밑바닥에 도착했다.
그곳은 이미 싸움이 한창이었다. 수많은 갈룸과 기사들이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기사들의 육체 능력이 워낙 월등해서 그런지 갈룸들이 힘을 못 쓰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기사 중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이들이 매우 드물었다. 오직 육탄전으로만 싸우고 있었고, 들고 있던 기사들도 하나둘 무기를 놓고 있었다.
싸우다가 놓치는 것이 아닌, 그냥 손에서 놓아 버리는 것이다.
“미치겠군.”
그래도 이미 예상한 일이다. 다행히 위에서 횃불을 넓게 퍼트려 놔서 갈룸들이 달려들지는 않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제는 기사들이 갈룸들을 향해 안개 속으로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횃불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한 놈이 있었다.
“다시 올 거라고 예상했다.”
갈룸의 왕. 그는 화살에 맞은 상처는 이미 전부 치유된 채 김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칼라 기사들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들이 싸우는 소리만 날 뿐.
“찾을 수고를 덜었네.”
하지만 마찬가지로 김진석도 갈룸의 왕을 찾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서 던전의 특징은 그다지 나누어지지는 않지만 굳이 나눈다면 보스가 있는 곳과 없는 곳으로 나눌 수 있었다.
보스가 없는 던전은 경험치가 목적인 던전으로 전부 죽이면 막대한 경험치를 받으며 저절로 던전에서 나가진다.
보스가 있는 던전은 아이템이 목적으로 다른 몬스터를 전부 무시한 채 보스만 죽이고 아이템을 먹으면 던전에서 나갈 수 있었다.
김진석의 목적은 바로 갈룸의 왕, 그를 죽이는 것이다.
김진석은 이미 광기의 굴에 들어오기 전에 완전 무장을 한 상태였다. 고작 레벨 26인 김진석이 무장을 해 봤자 레벨이 41인 갈룸의 왕에겐 의미가 없겠지만.
“인간은 이해할 수 없군.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원래 인간이란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야.”
그렇게 말하며 김진석은 기사 갑옷이 아닌 가죽 갑옷을 입고 평범한 검을 들었다. 기사 갑옷을 입었는데도 한 방에 부서진 걸 보면 차라리 움직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편한 가죽 갑옷이 나았다.
갈룸의 왕이 노라에게 허무하게 당했다고 한들 그건 노라가 강했던 것이지 절대 갈룸의 왕이 약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김진석에겐 타임 어택이었다. 칼라 기사단의 기사들이 더 오랫동안 안개를 마시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레벨이 거의 두 배가 높은 상대를 최대한 빨리 죽여야 했다.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룸의 왕은 먼저 공격하지 않고 김진석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김진석이 먼저 갈룸의 왕에게 달려들었다.
김진석은 달려가며 사선으로 검을 베었다.
갈룸의 왕은 여유롭게 그 공격을 피했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공격이 있었다.
더블 슬래시.
김진석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 하나. 갈룸의 왕은 갑자기 나타난 다른 하나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여유로웠다.
더블 슬래시가 적중했고, 갈룸의 왕에 몸에서 / 자로 피가 솟구쳤지만 10초도 되지 않아 피가 멎고 1분도 되지 않아 전부 치유됐다.
경이로운 재생 능력이었다. 재생 능력, 하면 떠오르는 트롤이라는 몬스터도 저 정도 수준은 아닐 것이다.
원래 보스 몬스터는 일반 몬스터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약한 방어력을 재생 능력으로 커버한 것 같았다.
“하품만 나오는군.”
갈룸이 진짜 하품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과장된 몸짓으로 김진석을 놀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 김진석은 이젠 알 것 같았다.
“지금껏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한들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투견과 싸우며 큰 김진석이 맨 처음 만난 몬스터가 헬 하운드였다.
가이크 성에서 갑자기 몬스터와 악마가 몰려올 때는 김진석이 키우던 캐릭터의 힘을 빌릴 수 있었다.
고블린과 싸울 때 고블린 족장이 나타났지만 놈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지 않고 한 마리씩 달려들었다.
이기긴 했지만 힘을 다해서 기절했더니 흑호가 그를 구해 주었다.
임프와 싸울 때도 정말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레벨 업을 하여 체력이 회복되었고, 기어이 임프 살해자의 칭호도 얻어 냈다.
그리고 지금, 갈룸의 왕은 김진석보다 레벨이 두 배 가까이 되어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절대 못 이기겠지만 지금 놈은 여유를 부리며 방심하고 있었다.
“극악의 난이도인 게임도 절대 못 깨게 하지는 않는다.”
그게 게임이니깐. 그리고 김진석은 그걸 전부 깨부수며 성장했다.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강해져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김진석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갈룸의 왕이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여전히 갈룸의 왕은 김진석을 계속해서 가지고 놀고 있었다.
김진석은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을 사용해 봤지만 상처만 입힐 뿐 그 이상이 없었다. 엄청난 재생 능력으로 순식간에 치유해 버리니 방법이 없었다.
저 능력이 무한하지는 않겠지만 김진석의 체력도 무한이 아니었다.
“후…….”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미세하지만 갈룸의 왕의 재생 능력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모르겠지만 직접 싸우고 있는 김진석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김진석에겐 안 좋은 소식이었지만 놈은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강해 안개를 마시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으니 적어도 인간이었을 적에 꽤나 강한 인물이었겠지.
오히려 그것 때문에 김진석은 마치 훈련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한 끗이라도 실수한다면 목이 날아가겠지만 말이다.
“이해할 수 없군. 강해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나랑 동류로 느껴져 안개를 계속 마시게 하고 있거늘… 왜 변하지 않는 거지?”
갈룸의 왕이 김진석을 가지고 놀던 이유를 밝혔다. 동류로 느껴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안개를 마시게 해 같은 갈룸으로 만드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김진석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인해 변하지 않았고, 갈룸의 왕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어차피 변하지도 않는데 살려 둬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갈룸의 왕이 혼자 중얼거림과 동시에 김진석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속도는 지금껏 김진석을 농락했던 속도와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이미 놈의 속도에 적응했던 김진석은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피하고 오히려 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갈룸의 왕은 당황하지 않고 뒤로 살짝 스텝을 밟으며 반대쪽 손을 김진석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물론 이미 대비하고 있던 김진석은 평범한 검을 굳이 휘두르지 않고 갈룸의 왕의 손이 뻗어 오는 경로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정확히는 놈의 움직임에 익숙해졌다고 한들 검을 휘두르기가 어렵다고 생각해 최선의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 결과 놈의 손바닥에 평범한 칼이 박혔다.
하지만 갈룸의 왕은 비명은커녕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놈의 반응을 예상한 김진석은 개의치 않고 힘을 줘 평범한 칼을 손바닥에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칼 손잡이까지 박아 넣은 다음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갈룸의 왕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왼손으로 칼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 칼의 날을 잡아당겼다.
그 모습은 마치 백 초크를 거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걸 손이 아니라 칼로 대신한 모양새였다.
“이놈……!”
갈룸의 왕이 벗어나려고 손에 힘을 주려고 했지만 아무리 놈이라도 칼이 손에 박혀선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려웠다.
다른 한 손으로, 목으로 다가오는 칼을 막아 보려 했지만 손가락에 검날이 파고들 뿐이었다.
김진석의 검날을 잡은 손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지다 못해 철철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갈룸의 왕의 목을 잘라 내려 잡아당기고 있었다.
지금껏 놈은 일부러 김진석을 죽이려 하는 마음이 없어 이렇게 큰 공격을 해 오지 않아 좀처럼 기회가 없었지만 마침내 잡아낸 것이다.
그렇게 갈룸의 왕의 손가락이 잘리고 목에 칼날이 들어가기 직전. 갈룸의 왕은 팔꿈치로 김진석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김진석은 팔이 부들거릴 때까지 잡아당기고 있어서 그런지 반응하지 못했고, 그나마 힘이 덜 실린 공격이라 버틸 순 있었지만 문제는 그 움찔거리는 잠깐 사이에 갈룸의 왕은 손바닥을 찢어 가면서까지 김진석의 백 초크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갈룸의 왕의 목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칼날이 조금 들어간 것 같았다. 놈은 정말 죽기 직전이었다는 것처럼, 창백한 피부가 더더욱 창백해졌으며 찢어진 손바닥으로 목을 가리고 있었다.
김진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평범한 창을 꺼내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그로 인해 김진석의 손바닥이 더 찢어진 것 같았지만 포션을 꺼내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진석이 던진 창은 정확히 갈룸의 왕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갈룸의 왕은 그 창을 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손으로 막아내려 했다.
그런데 하필 그 손이 손바닥이 평범한 검에 뚫린 손이었고, 상처가 치료되기도 전에 창을 받아 내려 했지만 창이 손바닥을 뚫고 하필 갈룸의 왕의 눈에 적중했다.
“크아악!”
김진석은 그 비명을 듣기도 전에 이미 평범한 검을 집어넣고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를 꺼내, 기를 모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차지 어택.
게임 속에서는 기를 모을 때 움직이지 못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갈룸의 왕은 김진석의 공격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차지 어택을 정통으로 맞았다.
하지만 갈룸의 왕은 그것으로도 죽지 않았다.
김진석은 무방비로 있는 갈룸의 왕을 곤죽이 될 때까지,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로 정말 죽을 때까지 때렸는데도 놈은 죽지 않았다.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얼굴도 곤죽이 돼 발음도 제대로 안 됐지만 놈의 입은 살아 있었다. 김진석은 놈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명 갈룸들과 칼라 기사단의 기사들이 이성을 잃은 채 싸우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김진석의 타임 어택은 실패했다.
“…맞네. 난 널 죽일 공격력이 부족한 것 같다.”
“드디어 인정하는…….”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그건 엄청난 소리를 내며 광기의 굴 안에 떨어졌고, 모래 먼지가 뿌옇게 올라왔다.
“그러면 죽일 사람을 데려오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