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광기의 굴 】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음…….”
김진석과 노라는 흑호를 타고 순식간에 칼라 성으로 들어왔다. 검문소를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닌, 그냥 흑호가 성벽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용병의 쉼터의 앞에 내려 주었고, 사라져 버렸다.
김진석은 흑호 자신이 남의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흑호였다.
하지만 노라는 그걸 두 눈으로 직접 전부 확인했다.
김진석은 그렇다고 전부 사실대로 말해도 믿을 리가 없었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꼭 얘기해야 합니까?”
“…아니.”
그런데 노라는 김진석의 예상과 다르게 반응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우리 용병들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어. 바로 자신의 정보를 함부로 까지 않는 것. 자연스럽게 까인 것은 모르겠지만 자기 입으로 까는 사람은 없어. 그리고 그걸 알려고 뒤를 캐려고 하면 본인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해.”
그제야 김진석은 자신이 죽인 여성 용병과 그 동료들이 김진석 자신의 레벨을 물어보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저 살며시 김진석이 알아서 말하라고 유도하는 건 있었지만 말이다.
김진석은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내 레벨을 알았지?”
그런데 더 예민한 것을 물어 오고 있었다.
“난 단 한 번도 내 정확한 레벨을 알려 준 적 없어. 그저 이 정도라고 생각만 하게 했을 뿐이지. 그런데 넌 내 레벨을 정확히 알았지.”
노라는 김진석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갈룸의 왕보다 훨씬 더 무서운 존재가 바로 노라다. 갈룸의 왕조차도 그녀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던가.
김진석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정보를 뇌에서 꺼내려고 했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게임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출현조차 하지 않았던 캐릭터였으니깐.
“그…….”
“그?”
그때 칼라 성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댕. 댕. 댕.
“이건…….”
“비상 종소리다.”
노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이 매우 분주해졌다. 장사하던 사람들도 전부 접고 돌아가고 있었고, 몇몇 용병과 갑옷을 입은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몬스터나 인간의 습격이 있을 때 울리는 종이다. 따라와.”
김진석은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 * *
“아무래도 우리 때문인 것 같은데.”
노라와 김진석은 성벽 위로 올라갔고, 그곳에는 수많은 용병과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을 뒤로한 채 성벽 아래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수많은 갈룸이 있었다.
그리고 선두에는 이미 두 팔이 전부 자라난 갈룸의 왕이 있었다.
놈들은 흑호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무작정 따라왔고, 칼라 성의 앞까지 다다른 것 같았다.
그때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노라의 곁에 갑옷을 입은, 김진석에 비견될 정도의 거구 남성이 다가왔다.
“레온하르트 님.”
“노라.”
김진석에게, 아니 대부분 사람에게 반말하던 노라가 그에게 극존칭을 취했다. 레온하르트, 김진석도 잘 아는 이름인 그는 칼라 성의 성주다.
그는 나이가 60이 넘어가는데도 정정했고, 말리 성의 성주인 리안 카시와도 친분이 깊었다.
지금은 갑옷을 입고 있어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는 새하얀 백발을 뒤로 넘긴 머리 스타일에 수염이 덥수룩한, 전형적인 용장의 모습이었다.
레온하르트의 레벨은 59. 괴물과도 같은 레벨이었다.
“너희 때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옆에는 누구고.”
하필 노라가 했던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말투에서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던전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뛰쳐나온 놈들입니다. 옆에는 그 던전의 생존자고요.”
매우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이 상황을 완벽히 설명해 주었다.
“도망친 우리를 따라온 것 같은데…….”
“네가 도망칠 정도라니, 그 정도로 강력한 놈들이냐?”
그 말에 노라는 김진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갈룸의 왕을 두 번 공격한 게 전부였고, 그마저도 순식간에 치유했으니깐.
다른 갈룸과 갈룸의 왕하고도 싸운 자는 지금 김진석이 유일했다.
“인간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몬스터로 레벨이 제각기 다릅니다. 그리고 선두에 있는 놈은 가장 강력한 놈으로 레벨이 41입니다.”
레온하르트는 김진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의 말에서 의문점을 찾아냈다.
“나조차도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 어떻게 정확히 레벨을 알고 있지? 그러고 보니 자네 얼굴도 지금 처음 보는데 말이지…….”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성벽 밖 갈룸들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갈룸들이 나올 수 있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안개가 나오면 대처 방법 따위는 없을 거다.”
물론 갈룸이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악마가 안개를 만든 거라 놈들이 맘대로 휘두를 순 없겠지만 혹여나 지금 사건으로 안개가 그 광기의 굴 밖으로 새어 나오면 큰일이 벌어질 거다.
김진석은 눈앞의 갈룸들은 무섭지가 않았다. 게임 속이었다면 혼자서 저것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자가 바로 옆에 있었고, 현실이라곤 하지만 그 능력치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인물이 김진석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레온하르트가 김진석에게 말을 걸기 직전, 성벽 아래서 당당히 서 있던 갈룸의 왕이 소리쳤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남성을 찾는다!”
“몬스터가 말을 한다고?”
갈룸의 왕의 말에 성벽이 웅성거렸다. 몬스터가 인간의 말을 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그건 매우 높은 레벨의 몬스터가 대부분이었다.
노라조차도 인간의 말을 하는 몬스터는 본 적이 없었으니.
“나와 비슷한 수준의 몸을 가진 남자다! 그 남자만 넘겨주면 그냥 돌아가겠다!”
갈룸의 왕의 말을 듣고, 레온하르트는 마침 옆에 있던 김진석을 바라봤다. 어느 누가 봐도 갈룸의 왕이 말하는 남자가 김진석이라는 건, 알 수밖에 없었다.
60의 나이에 180이 넘는 키를 보유한 레온하르트도 김진석의 앞에선 작아 보였다. 그리고 로스트 월드에서는 검은색 머리는 흔해도 검은색 눈동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자네를 찾는 것 같은데 말이지…….”
“아마도 제가 놈들이 있는 곳에서 처음으로 탈출한 사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몬스터들에게도 자존심 비슷한 것이 있겠죠.”
이번만큼은 김진석도 진짜 몰랐다. 갈룸의 왕이 왜 자신을 쫓고 있는지, 그리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와 노라도 그를 향한 의심은 거두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김진석을 바라보다가 성벽 끝으로 걸어가 소리쳤다.
“한낱 몬스터의 지시 따위는 들을 가치도 없다!”
김진석은 그의 말에 안심했다. 애초부터 레온하르트는 매우 정의로운 성격이다. 하지만 그만큼 빡빡한 성격이다.
그 하나의 오점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건 그의 주변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말하는 꼰대긴 했지만 레온하르트 본인이 너무 청렴결백해서 말을 들어야 하는, 어떻게 보면 최악의 꼰대였다.
하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인물이란 거다.
몬스터의 말에 모르는 인간, 김진석이더라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저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강함뿐만이 아니었다.
“발사 준비!”
어느새 성벽 위에는 수많은 병사가 활을 들고 밖의 갈룸들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무기인 활은 레벨이 비교적 낮은 병사들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었고, 높은 위력을 뽑아냈다.
“발사!”
레온하르트의 높게 든 손이 내려간 순간 수백, 수천 발의 화살이 갈룸들을 향해 발사되었다.
카아악!
갈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징글징글하게 많았다. 하지만 놈들은 방어력이 낮기로 유명한 몬스터였고, 현실에서는 애초에 방어구도 입고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갈룸이 화살에 맞아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갈룸의 왕은 화살을 눈으로 보고 피하는 수준이었지만 그 수가 워낙에 많았기에 몸이 고슴도치같이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룸의 왕은 고작 그것으로 죽지 않았고, 몸에 화살을 뽑아내며 갈룸들에게 소리쳤다.
“굴로 돌아가라!”
그 말에 김진석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갈룸들이 많이 죽긴 했지만 워낙 숫자가 많아 티도 안 났는데 바로 도망치라고 말했다.
“칼라 기사단! 쫓아간다!”
레온하르트는 갈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말을 탄 칼라 성의 기사단이 성문을 열고 나가 갈룸들을 쫓았다.
그걸 보고 김진석은 갈룸들이 굳이 칼라 성까지 온 이유를 알았다.
“쫓아가면 안 됩니다!”
칼라 기사단은 갈룸들을 끝까지 쫓아갈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광기의 굴이 그다지 멀지도 않아서 금방이다.
만약 칼라 성의 기사단이 그 굴 안으로 들어가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전장의 함성에 김진석의 말은 들리지 않았고, 옆에 있던 레온하르트마저도 어느새 말을 타고 저들을 쫓기 시작했다.
정말로 레온하르트가 광기의 굴에 들어가 갈룸으로 변하게 된다면 대참사 수준도 아닐 거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됐다.
김진석은 아래로 내려가는 시간도 아깝다 생각해 바로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걸 이상하게 오해했는지 노라가 김진석의 옷깃을 잡으려다가 같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흑호!”
그와 동시에 성벽에 진 그림자에서 흑호가 나와 떨어지는 김진석을 받아 냈다. 그리고 김진석은 바로 같이 떨어지던 노라를 잡았다.
물론 노라는 이 성벽 위에서 떨어지더라도 크게 다치진 않았겠지만 유일하게 이 사태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둘 순 없었다.
“저들이 광기의 굴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시겠죠?”
“…조금은. 어떻게 하면 되지?”
“우선 쫓아가야죠.”
노라는 그 짧은 순간에 상황 판단을 끝내고 김진석에게 물었지만 그도 마땅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흑호를 타고 광기의 굴로 향했다.
* * *
“멈추세요!”
“…음?”
흑호의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런지 레온하르트가 광기의 굴로 들어가기 직전에 멈춰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칼라 기사단의 일부는 이미 광기의 굴로 진입한 것인지 이미 여러 개의 밧줄이 광기의 굴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굴로 들어가면 저들과 같이 변합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김진석이 급히 소리쳤고, 레온하르트는 사실 확인을 위해 노라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저 굴에 들어갔던 용병들이 이상 행동을 한 건 사실입니다.”
“그럼 그 용병들은 어딨지?”
노라는 말없이 그저 광기의 굴 아래를 가리킬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진석에게 물었다.
“자네는 저놈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노라와 자네의 책임이지만 지금은 묻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며 레온하르트는 굴 아래로 토벌을 멈추고 재빨리 올라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굴 아래에서 올라오는 칼라 기사단은 아무도 없었다.
“…방법이 있나?”
“제가 가겠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말에 김진석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최고 전력인 레온하르트는 지킬 수 있었지만 칼라 기사단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인 건 사실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이런 이벤트가 없었으니 칼라 기사단이 여럿 죽으면 칼라 성의 전력이 줄어들 것이고, 그게 무슨 나비 효과를 불러들일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늦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자네는 저 연기를 들이마셔도 괜찮다는 건가?”
“그건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저 안에서 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음…….”
레온하르트는 노라의 말에 침음성을 흘렸다. 당연하겠지만 김진석의 뭘 믿고 저 안으로 보내야 하는가.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김진석은 밧줄을 손에 잡고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난 지 1시간도 안 됐지만 비밀이 많은 자입니다. 아마 해결 방법 또한 있겠지요.”
“고작 저자의 말에 칼라 기사단이 위험한데 내가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 화가 나는 거다, 나는.”
괴물 같은 힘을 가졌지만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기사단이 위험한데도 나서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는 레온하르트였다.
하지만 노라의 신용을 믿었다. 혹여라도 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들어갔다가 변하면 정말 위험한 일이 발생할 테니깐.
“30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다면 직접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