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런데 용병들이 강한 것일까, 아니면 달려든 갈룸들이 약한 것일까.
용병들은 순식간에 바로 등을 맞대고 달려드는 갈룸들을 하나둘 처리하고 있었다.
분명 저들은 김진석보다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갈룸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죽여 나가고 있었다. 김진석은 꿈에도 생각 못할 협동이었다.
그런데 점점 용병들의 상태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지치는 것이 아닌, 서로 간 점점 합이 안 맞기 시작했다. 아니, 그걸 넘어서서 서로 공격하기 직전이었다.
김진석은 그들을 무시하고 밧줄을 타고 올라가고 싶었지만 용병들의 동료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버리고 올라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는 힐난을 받을 것이다. 힐난만 받으면 다행이지 용병들이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도의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래도 도와주려고 온 분들인데 버릴 순 없잖아?”
김진석은 그렇게 말하며 고함을 질렀다.
“우워어!”
그 소리에 갈룸들이 멈칫하는 순간 김진석은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그들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희멀게졌던 눈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예?”
하지만 갑자기 정신을 차린 탓일까, 그들은 갈룸을 잡을 때와는 다르게 넋을 놓고 있었다. 김진석은 더 설명하기도 전에 또 변할까 봐 아예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그들이 타고 내려온 밧줄을 김진석이 잡고 올라가려고 했다.
“뭐 하는 건가?!”
용병들은 세 명이었고, 내려온 밧줄도 세 개였다. 김진석은 그 셋 중 하나의 밧줄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뒤늦게 용병들이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도 김진석이 정신을 일깨워 주자 고개를 흔들고 뒤늦게 밧줄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밧줄은 사람 한 명의 몸무게만 견딜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거구인 김진석인 데다가 갑옷까지 입고 있었고, 그 아래에 남성 용병 한 명이 밧줄에 올라타니 끊어질 것만 같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광기의 굴을 탈출하게 둘 리가 없는 갈룸이었다.
놈들은 김진석보다 비교적 아래에 위치한 용병들에게 달려들었다. 김진석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밧줄을 손에서 놓고 뛰어내렸다.
용병 세 명을 노리고 달려든 갈룸 세 마리를, 김진석은 정확히 보고 있었다.
그는 몸으로 우선 한 마리를 막고 한 마리는 밧줄을 타고 올라갈 때도 놓지 않은 평범한 검으로 베어 버렸다.
하지만 한 마리가 남았고, 놈은 김진석이 뒤늦게 땅에 떨어진 다음 무기를 던졌지만 빗나갔다.
그래도 다행히 용병들은 밧줄을 타고 높이 올라가 갈룸의 공격이 닿진 않았지만 놈은 영악하게도 밧줄을 끊지 않고 달라붙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됐고, 빨리 올라가! 아니면 밧줄을 하나 더 내리든가! 내려올 생각은 꿈에도 마!”
그렇게 말하며 김진석은 일부러 들고 있던 검을 던져 갈룸이 매달린 밧줄의 위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갈룸이 타고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전부 잘라 버렸다.
용병들도 김진석을 살리기 위해서는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았는지 재빨리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김진석은 또다시 혼자 남겨졌지만 그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갈룸의 공격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용병들에게만 달려들었지 내게는 달려들지 않았다.”
몬스터는 분명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 따위는 없을 터인데.
그때 밧줄이 끊겨 떨어진 갈룸이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갈룸. LV:15]
하지만 워낙에 레벨 차이가 나서 김진석은 고작 한 손으로 달려드는 갈룸의 목을 잡았다.
칵칵.
목을 잡혀 제대로 된 소리도 못 내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김진석은 놈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악력으로 목을 꽉 쥐어 죽여 버렸다.
김진석의 손에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런데 그때 안개 속에서 한 마리의 갈룸이 김진석을 향해 걸어 나왔다.
그런데 놈은 여타 다른 갈룸과는 달랐다.
거구인 김진석과 맞먹을 크기였고, 다른 희멀건 눈인 갈룸과 달리 놈의 눈은 핏빛이었다. 그리고 다른 갈룸들이 손톱을 길게 꺼내 놓고 있는 반면 주먹을 쥐고 있는 놈의 손은 굳건했다.
분명 김진석 자신과 비슷한 몸집이었는데도 놈의 몸을 보니 위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
[갈룸. LV:41 갈룸의 왕]
레벨이 김진석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다. 게다가 칭호까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절대 평범한 갈룸이 아니었다.
“게임 속에서는 왕 따위는 없었는데 말이지…….”
아마도 광기의 굴에서 오랫동안 있어 생긴 변종 혹은 특출 나게 강한 개체일 것이다. 놈은 당당히 김진석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그 밧줄을 타고 탈출하려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빨리 올라와!”
위에서 여성의 목소리, 노라로 추정되는 이가 소리쳤지만 김진석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갈룸의 왕이 있었기에.
갈룸의 왕은 가까이서 보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다부진 몸에 각진 근육은 현실의 헬스 트레이너조차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진짜 인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때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갈룸의 왕이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갈룸의 속도에 적응한 김진석도 반응조차 못했다.
김진석이 놈을 무시하고 최대한 빨리 탈출하려고 밧줄에 손을 대는 순간, 갈룸의 왕의 공격이 김진석의 몸에 적중했다.
김진석의 몸이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듯 허공을 날더니 땅에 꽂히듯이 박히며 그 상태로 데굴데굴 굴렀다.
“끄윽.”
가슴에 제대로 맞았는지 김진석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갑옷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명치 부분이 욱신거리며 아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순 없었으니 땅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표정이 찌푸려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김진석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시려고 했지만 갈룸의 왕은 그걸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갈룸의 왕은 김진석에게 대놓고 걸어왔다. 누가 봐도 여유롭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김진석에겐 그 여유가 오히려 호재였다. 그는 어차피 갈룸의 왕을 죽일 수도 없고, 이유도 없다.
만약 처음 광기의 굴에 들어온 김진석이었다면 좌절했을 것이다.
게임 속 광기의 굴은 몬스터를 전부 죽여야만 탈출할 수 있었고, 그 외에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니깐.
그런데 갈룸을 전부 죽이지 않고도 탈출 방법이 생겼다. 하지만 눈앞의 갈룸의 왕이 그걸 가로막고 있다.
다행히 밧줄을 보고도 끊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 애초에 인간이었던 녀석들이 저 밧줄의 용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김진석은 저놈이 여유를 부릴 때 탈출해야만 했다.
땅바닥을 구르며 놓친 평범한 검을 두고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를 꺼내서 놈에게 겨누었지만 갈룸의 왕은 그때까지도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갈룸의 왕은 엄청난 속도로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똑바로 바라보겠다고 다짐한 김진석은 녀석을 정확히 바라보았고, 간신히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갈룸의 왕은 다른 갈룸과 다르게 똑바로 두 발로 서서 달려왔고, 김진석은 반응할 수 있었다.
그는 갈룸의 왕이 달려올 것을 예측하고 스킬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차지 어택.
2초간 기를 모으고 쓰는 스킬은 차지 어택은 강력한 스킬이다. 초반에 배우는 스킬치고는 공격력이 매우 높았지만 2초간 기를 모은다는 페널티가 있었다.
이 페널티는 차지 어택의 스킬 레벨이 높아지면 줄어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김진석은 갈룸의 왕이 달려들기 전에 이미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고, 놈이 달려듦과 동시에 차이 어택을 날렸다.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에 붉은색 기 같은 게 모여 있었고,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메이스는 갈룸의 왕에게 정확히 적중했다.
이번에는 김진석이 아닌 갈룸의 왕이 허공을 날아갔다. 하지만 놈은 김진석과 같이 꼴사납게 땅을 구르는 것이 아닌 정확히 두 발을 데고 땅에 착지했다.
차지 어택이 강력하기도 했지만 밀치는 효과가 강력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갈룸의 왕의 단단한 육체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물론 김진석은 그걸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차지 어택을 날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밧줄을 잡고 올라가고 있던 것이다.
“…감히!”
그때 갈룸의 왕이 갑자기 인간의 말을 사용했다. 김진석도 그것에 깜짝 놀랐지만 우선은 탈출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걸 본 갈룸의 왕도 바로 밧줄을 타고 김진석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밧줄이 묵직해진 것을 보고 광기의 굴 위에 있던 용병들이 밧줄을 잡아당겨서 올리고 있었다.
빨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같이 밧줄에 매달린 갈룸의 왕이었다.
김진석은 재빨리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를 집어넣고 평범한 검을 꺼내 들어 밧줄의 아래쪽을 잘라 냈다.
그런데 갈룸의 왕은 밧줄을 자르려는 걸 알아차렸는지 엄청난 완력을 통해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점프해 김진석의 발을 잡았다.
하지만 김진석은 그 기행을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발이 잡히기 직전에 말했다.
“카운터.”
공격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 공격이 나가진 않고 그저 갈룸의 왕이 튕겨 나갔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email protected]#$
갈룸의 왕은 떨어지면서 뭔가 말했지만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김진석은 갈룸의 왕이 떨어진 아래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안개를 뚫고 위로 올라갔다.
* * *
용병의 쉼터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는 노라는 전날에 보았던 거구의 남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용병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같은 용병이 보기에는 귀여웠다. 용병의 쉼터에 처음 들어왔을 때 용병에게 시선이 가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용병은 다른 용병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자신이 뭔가 필요한 게 있지 않은 이상 말이다. 그리고 노라, 그녀 자신이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자신은 용병 세계에서 인기가 많았다.
아름다운 꽃다운 나이인 23살. 젊은 여성이었고, 심지어 레벨도 자그마치 41이나 되었다.
그런 자신을 모르는 용병은 최소 이곳, 칼라 성에서는 없었다. 외모로 보았을 때 멀리서 온 용병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절대 일반 용병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치 살인자의 눈빛과 같이 섬뜩했으며 용병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수많은 피를 손에 묻힌 자로 보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돈도 많아 보였다. 그런데 얼굴의 흉터를 치료하지 않은 게 이상했고, 관심을 가졌다.
노라 자신도 어떠한 사정 때문에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돈 많은, 호구 같은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건 자신만 생각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용병 중에서도 특히 그 질이 나쁜, 신입을 꼬드겨서 죽인 다음 장비를 얻는다고 소문이 파다한 용병들이 그를 낚아챘다.
그들에게 찍힌 이상 그의 앞길도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고, 평소였다면 그대로 무시했을 거다.
그런데 유난히 그날따라 그 몸집만 거대한 남자가 눈에 밟혔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 용병들을 낚아 그와 용병 놈들이 간 곳을 추적해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그 용병 놈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거… 깔끔하게 죽었어. 물론 시체는 지저분하지만 죽을 때 고통도 못 느꼈겠는데.”
“그런데 이… 짐승에게 당한 상처는 뭐지? 이놈도 깔끔하게 한 번에 죽었어.”
그들은 김진석과 흑호에게 죽은 용병들의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 바위에 묶은 밧줄은 뭐야?”
바위에 묶인 밧줄을 확인하려고 다가가려는 순간, 노라가 뒤에서 낚아챘다.
“응?”
“너, 죽을 뻔했어. 땅을 봐.”
목덜미가 붙잡힌 용병은 노라의 말에 땅바닥을 쳐다보더니 깜짝 놀랐다.
분명 땅이 있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느새 땅이 전부 사라진 것이다. 마치 거대한 싱크홀이 발생한 것처럼.
“이게… 뭐지?”
“나도 몰라. 용병 생활하면서 처음 본다.”
노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거대한 구멍을 쳐다보는데, 그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나도 들은 것 같은데.”
다른 용병들도 그 소리를 들었고, 노라는 다시 시체를 쳐다봤다. 시체는 세 명뿐이었고, 거구의 남성과 여성 용병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이 속에 빠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