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최초 플레이어-18화 (18/201)

18화

“말리 평야에서 임프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언가 공포에 질린 것처럼 말이죠. 저희를 무시하고 어디론가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발견한 것은 고블린 숲에서 발견된 흔적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고블린 부락과는 차원이 다르게 많은 피가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검은 대지와도 비슷한 수준이었죠. 그 흔적을 보고 1천 마리 이상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 말에 리안 카시는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단순한 고블린 부락이 아니었다. 최소 고블린 족장이 있는 부락이었지.”

“…예?”

리안은 뒤에 있는 상자에서 갑옷 파편을 꺼냈다.

“자네들이라면 이 갑옷이 뭔지 잘 알겠지.”

“…거대 고블린이군요.”

“고블린 족장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이 안 됐지만 거대 고블린은 고블린 족장의 호위 무사다. 그 핏자국에는 고블린 족장의 것도 섞여 있었겠지.”

그 말에 이번에는 기사단장이 골똘히 생각했다.

“임프 천 마리보다도… 고블린 족장 한 놈이 더 위험하죠. 그리고 그 둘을 하루에 죽일 수 있는… 몬스터가 가장 위험하겠군요.”

“몬스터라고 확답할 수 있나?”

“인간에게 도망가는 몬스터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위험한 상황이군요.”

“위험하지.”

둘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마법사를 통해 칼라 성에도 소식을 알리겠다. 말라 평야와 고블린 숲 전체를 봉한다. 그대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잠시 말리 성에서 머물러라.”

“알겠습니다.”

* * *

아침이 찾아왔다.

김진석은 나무 밑동에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흑호는 김진석의 품속에 폭 안겨 있었다. 김진석이 일어나자 흑호도 일어났다.

“안 되겠다. 더 이렇게 지내면 트라우마가 도질 것 같아.”

고작 하룻밤 땅에서 지냈을 뿐이지만 정신적으로 꽤나 피로했다. 분명 그걸 회복하기 위해 잠을 청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흑호야, 네 도움이 필요해.”

김진석은 잠이 들지 않는 밤에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잠이 들어 아침이 되니 그 생각을 바로 실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디스로 가자, 흑호야.”

아디스. 로스트 월드에서 레벨 40이 넘어가는 몬스터가 득시글대는 곳이다. 흔히 말하는 뒷세계라고 불리는 곳이다.

노예 제도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고, 수많은 범죄자가 모여 생긴 왕국이다. 온갖 비인간적인 일과 불법적인 일이 숨 쉬듯이 발생하는 곳이다.

김진석은 그곳에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가려는 것이다.

“원래는 나중에 레벨이 높아지면 갈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아디스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범죄자들이 모인 곳이라 딱 봐도 초짜로 보이는 김진석이 그곳에 가면 탈탈 털릴 게 뻔했다.

신분증을 만든다는 것, 당연히 게임 속에서는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러니 신분증을 만드는 데 얼마가 드는지, 아니 애초에 있기는 한지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니 가짜 신분증은 분명 만들 수 있을 테니깐. 게다가 그곳에는 범죄자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온갖 숨겨진 아이템과 스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아디스를 어떻게 가냐는 것인데…….”

김진석은 아디스를 최대한 빠르게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정작 가는 방법은 몰랐다. 다행히 배를 타고 나아가는 곳이 아닌 한 대륙 안에 있어서 흑호를 타고 갈 순 있었지만…….

“몬스터들이 문젠데 말이지……?”

40레벨 정도 되는 몬스터들이 있는 아디스는 지금의 김진석이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이크 성과는 차원이 다른 약육강식의 세계다.

로스트 월드에서는 탈것을 타고 이동할 때 조금만 컨트롤을 한다면 공격을 전부 피하면서 이동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한 번이라도 공격당하면 전투태세로 돌입되면서 흑호가 사라질 것이다.

원래 로스트 월드에서는 탈것이 공격당하더라도 플레이어의 체력만 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탈것에는 체력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곳은 현실이다.

혼자서 고블린 족장과 거대 고블린을 죽일 수준인 흑호였지만 40레벨의 몬스터에겐 어쩔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이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김진석이 공격당하면 전투태세로 변해 흑호가 사라질 것이다.

“목숨을 건 도박은 절대 안 돼. 방법은 뇌물뿐인가?”

이 세계도 돈과 재산이란 개념이 있는 이상 뇌물에서 벗어날 순 없다. 그것도 경비병에게만 뇌물을 주면 숙박은 자유로울 것이다.

…아마도.

“말리 성은 튜토리얼이 진행되는 성인 만큼 보안도 철저하겠지. 칼라 성에서 숙박을 해결해야겠네.”

신분증이 없는 이상 상점에서 무기와 아이템을 산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스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숙박이라면, 오로지 숙박만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우선 칼라 성으로 가 보자.”

* * *

“아무것도 없네?”

김진석은 칼라 성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갈대밭을 뚫고 가야 했기에 이제는 사용할 수 있는 기사 갑옷과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를 들었다.

[기사 갑옷. 레벨 제한 25.

수습을 마친 정식 기사가 사용하는 갑옷이다.

방어력 40. 내구도 80/100]

[거대 고블린의 메이스. 레벨 제한 25.

상대를 부수기 위해 제작된 메이스. 공격력이 뛰어나다.

공격력 40. 내구도 70/100]

평범한 세트를 많이 가지고 있긴 했지만 기사 갑옷과 메이스와 비교하긴 어려웠다. 평범한 세트 중 무기의 공격력은 20에서 30 사이이다.

게다가 거대 고블린 메이스뿐만이 아니라 기사 갑옷도 방어력이 자그마치 40이나 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임프들의 공격에서 완벽히 벗어날 순 없었지만 고작 고블린 몽둥이만으로 임프를 상대했던 경험이 있으니 지금의 풀 무장한 김진석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도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긴장하며 갈대밭을 해치며 나아가고 있었는데,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생쥐는커녕 임프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갈대밭의 끝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 희미하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벨이 25가 된 김진석은 청각도 뛰어나 희미한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김진석은 입고 있던 갑옷을 벗고 조심히 갈대밭에 엎드려 앞으로 기어갔다. 갑옷을 입고는 철컥거리는 소리 때문에 조용히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어 소리가 나는 곳 코앞까지 기어가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고작 하루뿐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왜 출입 금지를 한 거야? 그것도 이렇게 많은 고급 인력을 동원해서?”

그 소리에 김진석은 엎드려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갑옷을 입진 않았지만 기사단으로 추정되는 기사들이 벽돌을 쌓고 있었다.

“고작 이걸로 임프도 막기 어려울 텐데?”

“그러니깐 우리가 있는 거잖아. 벽을 만들면서도 임프가 나타난다면 죽일 수 있는 게 우리뿐이니깐.”

“그럼 벽은 왜 쌓는데?”

“답답한 친구야. 우리가 평생 이곳을 지킬 거야?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야, 벽은.”

그들을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말리 평야 전체를?”

“어쩔 수 있냐? 고블린 족장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 존재야. 녀석이 발견되면 놈을 죽일 기사단이 파견되겠지. 우리 같은 수습 기사가 아니라.”

수습 기사라고 말한 그들은 그 말을 끝으로 묵묵히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김진석은 숨어서 그 말을 전부 들었고, 그들이 얘기한, 고블린 족장을 죽인 존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잖아?”

본인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오해가 있는데… 풀긴 어렵겠네. 고블린 족장의 머리는 사용하긴 힘들겠네. 이것도 아디스에다가 파는 게 낫겠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저길 어떻게 넘어가지……?”

갈대밭, 아니 말리 평야 전체를 벽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아직 쌓이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높이가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고블린 족장을 죽인 존재, 김진석 자신이 발견될 때까지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길 잃은 시민 행세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어디서 길을 잃어야 말리 평야에서 길을 잃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임프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갈대밭에서 말인가.

그런데 그때 흑호가 김진석의 뒤에서 나타났다. 흑호는 김진석이 원할 때 나오고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탈것 UI에서 탈것을 소환하면 나온다. 하지만 조금 다른 건 흑호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거다.

녀석이 나오고 들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김진석의 말을 잘 듣는 흑호는 김진석이 원하는 대로 잘 따라 줬다.

김진석은 사람의 소리가 들릴 때 바로 흑호를 어디론가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지금 나온 것인데 김진석이 처음 보는 거대한 형태였다. 4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흑색의 호랑이로 변한 것이다.

“너……!”

거대해진 것에 놀랐지만 저 모습이면 코앞에 있는 기사단원들에게 들킬 수가 있었다. 김진석은 급히 흑호를 부르려고 했는데, 갑자기 흑호가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

“뭔……?!”

흑호가 김진석을 입에 물더니 순식간에 기사단원을 넘어 앞으로 달려갔다.

“응? 뭐지?”

“뭐가.”

계속 쓸데없는 말을 받아 주던 수습 기사는 짜증 내듯이 벽돌을 쌓으며 말했다.

“뭐가 지나가지 않았어?”

“몰라. 적어도 내 눈엔 보이지 않았어.”

그래도 성실하게 대답하는 수습 기사였고, 뭔가를 본 수습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검은 뭔가를 봤는데… 기분 탓인가 보다.”

* * *

“흑호야……? 이제 그만.”

흑호는 순식간에 말리 평야를 넘어 칼라 성 앞까지 들어섰다. 김진석은 흑호를 말렸고, 그는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새치기하지 말고 꺼… 가세요.”

갑자기 끼어든 김진석을 까칠하게 대하려고 하다가 김진석의 덩치를 보고 급히 말을 돌렸다. 김진석은 남자에게서 멀어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칼라 성의 높은 성벽이 보였고, 그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줄은 칼라 성의 성문 앞에서부터 김진석의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 사람이 김진석에게 말을 걸었던 그 남자였다. 하지만 그 남자도 흑호가 있었다가 사라졌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남자는 김진석의 덩치를 보고 괜히 건드렸다는 생각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조해 보이는 것이 김진석의 눈에도 보였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기에.

로스트 월드에선 당연히 몸이 크다고 레벨이 높은 것도 아니어서 남자가 저 정도로 무서워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진석은 제대로 씻지도 못해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그나마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어서 피 묻은 옷은 아니었지만 가죽 갑옷이라서 더 위험한 느낌이 드는 김진석이었다.

절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기요.”

김진석이 어깨를 살짝 치며 말을 걸자 남자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남자는 올 게 왔다는 반응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돌려 김진석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예… 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너무 바들바들 떨고 있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머리에서 식은땀도 흐르고 있었지만 김진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무엇 때문에 줄이 이렇게 밀린 겁니까?”

“그… 말리 평야와 고블린 숲에서 일어난 일은 알고 있습니까?”

김진석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뇨,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어… 간단히 말하자면 매우 강력한 몬스터로 추정되는 것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안이 더 강화됐죠.”

그 흔적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의문점을 물었다.

“몬스터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왜 보안이 강화된 겁니까?”

“몬스터 중에는 인간으로 변하는 능력을 가진 몬스터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철저히 확인하느라 줄이 이렇게 밀린 겁니다.”

김진석은 남자의 말에 바로 생각나는 몬스터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