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 *
김진석은 거대한 나무 밑동에서 깨어났다.
“요즘 자주 기절하네……. 아니, 하루도 안 됐나?”
불과 하루도 채 안 돼서 기절을 두 번이나 한 김진석이었다.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옆에서 고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바라보니 조그마한 흑호가 잠을 자고 있었다. 김진석은 탈것이 자는 것이, 이제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여기까지 데려다줬구나.”
김진석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흑호를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은 약간 몸을 뒤틀었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
더는 괴롭히지 않고 김진석은 주변을 살폈다. 나무 밑동 아래라 그런지 주변은 어두웠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먼저 자신의 레벨과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LV:25.
금화 13,420개.
평범한 가죽 갑옷 32개.
평범한 로브 22개.
평범한 검 40개.
평범한 너클 32개.
평범한 지팡이 28개.
평범한 창 25개.
평범한 메이스 22개.
최하급 포션 220개.
하급 포션 72개.]
그 외의 수많은 잡템 등등.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자신의 레벨이었다.
“아이템을 못 사용해서 임프를 잡은 건데… 이젠 의미가 없네.”
그리고 보이는 건 평범함의 향연이었다.
고블린 몽둥이와 방패는 싸우는 도중에 부서지고 집어 던져서 잃어버렸는지 인벤토리에 없었다.
“평범한 세트네. 게임 속에서도 이렇게 임프를 많이 죽여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로스트 월드에서 세트라는 시스템은 없다. 김진석이 말한 평범한 세트라는 건 말 그대로 이름에 평범함이 들어가는 아이템을 말한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나왔지?”
그리고 로스트 월드에서는 스마트 드랍이라고, 자신의 직업에 맞게 아이템을 떨어뜨리는 시스템이 있다.
그런데 김진석이 얻은 아이템은 전부 달랐다. 근접 무기로 공격할 수 있는 건 죄다 나온 것 같았고, 방어구는 로브와 가죽 갑옷이 나왔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직업이라서 그런 건가.”
플레이어란 직업은 그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하나 더 의문점이 있었다. 스마트 드랍에서 나오다시피 아이템이 직업에 맞게 떨어뜨리니 직업에 맞는 아이템도 있다.
그 직업만이 낄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고작 2티어 아이템에서 직업에 맞는 아이템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거의 없다는 건 즉, 있다는 거다. 그리고 김진석은 그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 바로 로브와 지팡이.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원래라면 마법사가 몬스터를 죽여야 떨어뜨리는 아이템이란 거다. 고블린 족장이 떨어뜨린 지팡이는 녀석을 잡아야만 나오는 고유 아이템이라 그 아이템은 예외였다.
김진석은 우선 지팡이를 꺼내 확인했다.
[평범한 지팡이. 레벨 제한 20.
평범한 지팡이다.
공격력 +25. MP +30. 내구도 100/100]
우선 레벨 제한에 걸리지 않았다. 손에 들었는데도 전처럼 튕겨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사용되는 건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았다.
“내게 마나가 있어야 알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자신의 스탯 같은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없는 데다가 스킬도 없으니 답이 없었다.
김진석은 그냥 땅에다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런데 하필 흙이 잠자고 있던 흑호에게 튀어 녀석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김진석은 으르렁거리는 흑호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내구도 99/100]
“내구도가 까인 것 보면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 보니 레벨 제한은 있지만 직업 제한은 없다… 즉, 모든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염병할 스킬이 없다는 거지만. 내 스킬을 얻는 방법이나 보는 방법은 없나?”
그런데 그때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검은색 글씨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 레벨 25 달성 확인. 스킬이 주어진다.
“…뭐?”
하지만 뭔가 확인할 새도 없이 검은색 글씨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김진석의 몸에는 변화가 없었다.
“스킬은?”
김진석의 허망한 말과 동시에 푸른색 글씨가 나타났다.
[LV:25. 김진석. 임프 살해자.
[감정]
김진석은 처음 보는 자신의 상태창이었다.
“임프 살해자는 업적으로 받은 칭호니깐… 감정이 스킬인가?”
그는 처음 보는 자신의 상태창인데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당연했다. 로스트 월드에서도 똑같은 UI가 나왔으니깐.
“감정은 그냥 있는 시스템인데 말이지……?”
그런데 흑호가 아직도 으르렁거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김진석이 쓰다듬어 줄 때는 얌전히 있던 아이였다.
그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김진석은 뭔가 들리자마자 흑호를 안고 벽으로 붙으며 숨었다.
자세히 들으니 발걸음 소리와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 * *
“고블린 숲까지 온 이유가 있습니까, 단장님?”
“중간에 핏자국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마지막 방향이 고블린 숲이었다.”
칼라 성의 기사단은 고블린 숲까지 들어섰다.
“말리 성에서 파견한 자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금화나 아이템도 하나도 없었잖습니까?”
“임프를 보았을 때 너희들도 느꼈겠지만 공포심이 느껴졌다. 그 어떤 강력한 인간을 만나도 몬스터가 도망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몬스터가 인간을 무서워하는 경우는 발견된 사례가 없었다. 애초에 몬스터가 인간을 죽이려고 생겨난 놈들이기 때문에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인간만 보면 달려드는 놈들이 바로 몬스터다.
그렇기에 기사단장은 임프들이 도망간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고블린 숲까지 찾아온 것이다.
“고블린 숲이면… 말리 성에 도움을 요청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저희 영역은 아닌 것 같은데요.”
“도움은 요청할 거다. 하지만 그사이에 뭔지 모를, 임프를 공포에 질리게 한 포식자가 인간을 공격하면 어쩔 거지? 네가 책임질 건가?”
“…….”
그 말에 정예 기사는 말이 없어졌다.
“조금 귀찮다고 돌아가면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 그걸 방지하는 게 우리 일이란 걸 잊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기사단장은 고블린 숲을 열심히 뒤지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말리 성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 * *
“간 것 같은데…….”
김진석은 쥐 죽은 듯 숨어 있다가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나무 밑동에서 나왔다.
“말리 성에서 본 사람들이랑 다르네. 문양을 대충 보면… 칼라 성인가.”
그들의 갑옷에는 하나같이 칼라 성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칼라 성의 기사단은 김진석이 숨어 있는 이 고블린 숲에 무슨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뭔가를 찾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정말 그냥 거대한 나무 밑동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김진석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도 전혀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은 수많은 임프를 죽인 포식자가 나무 밑동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숨어 사는 놈들은 대부분 약한 놈들이었으니깐.
“칼라 성의 기사단이 이곳까지 오는 이벤트는 없었을 터인데……. 짜여진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NPC들이 아니다 보니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
기사단이 온 이유가 본인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김진석이었다.
어느새 흑호는 으르렁거리는 것을 멈추고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고, 그저 멀뚱멀뚱 김진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상 실질적인 전투에선 넌 딱히 도움이 안 된다는 거네.”
김진석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흑호는 그 말에 기가 죽었는지 엎드린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김진석은 피식 웃었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딱히 네 잘못은 아니니깐 상관하지 마. 일이 쉽게 풀리면 그게 현실이겠어?”
김진석 본인도 아쉬웠지만 그런 편법이 통할 리가 없다는 건 김진석 자신이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김진석이 나무 밑동에서 나갔다. 분명 해가 떨어질 때쯤 싸우기 시작하고, 해가 다시 솟아오를 때까지 싸운 김진석이었지만 지금 밖을 보니 다시 거뭇거뭇해지며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레벨 업을 해서 그런지 딱히 몸에 피곤함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피로함은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오랜만이네. 침대도 이불도 없는 곳에서 자는 건.”
마을에서 빠져나오기 전에는 당연히 제대로 된 잠자리도 가지지 못했다. 차디찬 땅바닥에서 이불도 덮지 못하고 자는 게 부지기수.
그나마 그 마을에서 빠져나와 편의점에서 생활할 때는 이불이라도 있었다. 돈을 조금씩 모아서 가구들을 산 이후로는 제대로 된 잠자리를 가졌다.
익숙하지만 익숙해지기 싫은 기분을 간직한 채 김진석은 흑호를 안고 잠을 청했다.
* * *
“여기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칼라 성의 기사단은 고블린 부락이 피로 물든 것을 확인했다. 그 모습에 기사단장은 같은 몬스터인지, 포식자인지 모를 것이 한 짓으로 생각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
그 말에 기사단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다가 말했다.
“바로 말리 성으로 향한다.”
“어떻게 그 안에서 나온 거지…요?”
칼라 성의 기사단은 고블린 숲에서 나와 말리 성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고블린 숲의 입구에 말리 성에서 파견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앞에 있었다.
“칼라 성의 기사단이다. 말리 성의 영주님을 뵙고 싶다.”
그들은 딱히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깐. 고블린 숲 앞을 지키던 자들은 칼라 성의 기사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지금 영주님은 성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고블린 숲의 출입을 금지하셨습니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기사님들이 고블린 숲 안에서 나온 건 해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리 성의 영주, 리안을 만나러 말리 성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찾아올 무렵, 기사단은 리안 카시를 찾아갔다.
“칼라 성의 기사단이 내게 무슨 일이지?”
리안 카시는 여전히 서류에 빠져 살고 있었고, 그녀는 기사단에 시선도 보내지 않고 말했다. 기사단장은 앞으로 나와 가슴에 손을 대며 인사를 했다.
“말리 성의 영주님을 뵙습니다. 급한 일이니 바로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고블린 숲을 출입 금지하신 거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신 겁니까?”
리안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말했다.
“고블린 숲을 출입 금지했는데 그곳에서 나온 거 보면… 말리 평야에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 그러고 보니 갑자기 많은 임프가 생겨났다고 했지. 그것들은 해결했나?”
리안이 고블린 숲을 조사하러 갔을 때 소식이 전해졌었지만 경비병에게 들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확인된 바로는 적어도 1천 마리 이상의 임프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리안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기사단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리안은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대들이라도 임프 천 마리를 죽일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그렇지만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칼라 성의 기사단원들은 수습 기사라고 한들 임프를 혼자서 다섯 마리에서 열 마리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정예 기사는 스무 마리, 기사단장은 마흔 마리도 거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 1천 마리라는 숫자는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칼라 성의 기사단이 절대 약해서가 아니다. 압도적인 숫자는 압도적인 폭력을 의미한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인가? 칼라 성이 그 정도로 약하진 않을 텐데.”
하지만 칼라 성의 기사단은 그들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극히 일부였고, 오로지 정찰과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그들을 먼저 파견한 것이다.
“임프들이 대량 발생한 사건은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미 해결됐습니다.”
“…음?”
“고블린 숲에서 발생한 일, 뭔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제 예상일 뿐이지만 아마 같은 존재가 한 일 같습니다. 고블린 숲에서 발견된 것과 말리 평야에서 보인 흔적 둘 다 피가 상당히 지저분하게 흩뿌려진 것으로 보이니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리안 카시는 처음으로 기사단장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