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김진석은 왼쪽 어깨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메이스를 든 손으로 파고들어 가 거대 고블린의 공격을 왼쪽 어깨로 막아냈다.
“끄으윽.”
다행히 다 부서진 기사 갑옷이 한 번을 막아 줬지만 그 한 번으로 인해 갑옷이 박살 나며 사라졌다.
말도 안 나오는 고통이었지만 참아 냈고, 메이스가 아닌 손목으로 김진석의 어깨를 내려친 네임드 고블린은 이미 한번 고블린 몽둥이에 공격당해서 그런지 메이스를 놓쳤다.
어깨가 탈골된 것같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김진석을 덮쳤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내며 남은 오른손으로 네임드 고블린이 달려오는 힘을 이용해 놈의 손을 잡고 업어 치기를 했다.
일반 거대 고블린보다도 몸집도 컸고 레벨도 높았지만 그렇다고 몸무게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김진석도 레벨의 힘을 받고 있으니 오른손만으로 녀석을 넘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몸집이 몸집인 만큼 본인의 체중이 실려 땅에 꽂힌 네임드 고블린은 충격이 꽤 큰 것 같았다.
네임드 고블린이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할 때 김진석은 놈이 놓친 메이스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잡는 순간 손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푸른 글씨가 나타났다.
[레벨 제한 25.]
“지랄하네.”
그 글씨를 보자마자 바로 일어나려던 네임드 고블린의 등을 밟으며 고블린 몽둥이로 내려친 팔을 꺾어 버렸다.
관절을 꺾어 팔을 아예 못 쓰게 하려고 했다. 관절기라고 하는데, 문제는 김진석이 한 손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진석은 레벨의 힘을 빌려 젖 먹던 힘을 다해 그 손을 뽑을 기세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힘으로만 따지자면 네임드 고블린이 훨씬 강했고, 등 위에 올라탄 김진석을 밀쳐 내며 땅에서 일어났다.
김진석은 땅을 구르고 아픈 어깨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그래도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네임드 고블린도 마찬가지로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똑같은 상황이네?”
네임드 고블린이 메이스를 줍지 못하게 김진석은 메이스를 멀리 차 버리며 말했다. 사용하지만 못하는 거지, 발로 차는 건 가능했다.
네임드 고블린은 왼팔의 뼈가 어긋난 수준이고 김진석은 아예 어깨의 뼈가 부서져 팔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오른팔도 지금 제대로 힘이 안 들어가는 데다가 온몸이 피투성이고 성한 곳이 없었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놈의 스킬인 광폭화도 풀린 것인지 투구 속 안광에서 붉은빛이 사라졌다.
사실 광폭화는 김진석에겐 의미가 없었다. 지금 상태에서 한 대라도 맞으면 치명상이 될 게 분명했기에. 어떻게 보면 김진석에게 더 안 좋은 상황이었지만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끝을 보자, 개자식아.”
* * *
“네? 여기서 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고블린 족장이 나타났다면 놈을 토벌하려고 수많은 모험가가 몰려들었을 텐데 전혀 그런 소식이 없었는데 말이지. 거짓말은 아니지?”
이덴은 고블린 족장이 나타난 것 같다는 걸 말리 성의 경비병에게 말했는데, 경비병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거짓말일 리가 없잖아요! 정 그러면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같이 가서 확인해 보시죠?!”
“워워, 진정해. 그렇다면 착각일 수도 있고. 고블린 족장이 이 말리 성 근처에서 나타났다면 성주님이 모를 리가 없어. 그리고 소리소문없이 놈을 죽일 실력자도 지금 말리 성에는 없고. 지금 가이크 성에서 난리 난 건 알아?”
“…네?”
제리가 흥분해 소리쳤지만 경비병은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모르나 보네. 가이크 성에서 전대미문의 악마가 나타났어. 가이크 님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하던데, 그 거대함이 산이랑 비견된다고 하더군.”
“악마가… 나타났다고요?”
이덴과 제리는 충격받았다. 악마가 나타나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갑자기 악마가 나타나다니.
“그래, 너희들이 아는 그 악마. 그런데 그에 맞춰서 영웅님이 나타난 것 같다고 하더군. 눈 깜빡할 사이에 그 거대한 악마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더니 죽어 버렸다고 해. 하지만 악마가 나타남과 동시에 수많은 강력한 괴수가 가이크 성을 습격해서 지금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을 가이크 성에서 모집 중이야. 또 악마가 나타나거나 괴수가 습격할 수가 있으니.”
“아…….”
둘은 지금껏 학교에서 공부와 훈련만 해서 정보가 부족했다. 물론 학생들이 불안하지 않게 교수들이 일부러 정보를 숨긴 것도 있었다.
“피가 낭자해 있다고 했지? 물론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만 아마 고블린들이 세력 다툼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한 세력을 전부 죽여 버린 거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 우선 너희의 말을 성주님에게 전해 줄게.”
그렇게 말하고 경비병은 동료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말한 뒤 성주에게 향했다. 이덴과 제리는 경비병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럼… 도대체 그 울부짖는 듯한 소리는 뭐였지?”
* * *
“내가 이겼다… 개자식아.”
오른손이 벌벌 떨리고 더는 뭔갈 잡을 힘도 없었지만 고작 한 손으로 네임드 고블린을 죽일 수 있었다.
녀석은 고작 한 인간에게 메이스도 뺏기고 팔도 부러진 것에 화가 났는지 이성을 잃은 채 뒤도 안 돌아보고 공격만 해 왔다.
원초부터 공격이 단순했던 놈이었지만 이성을 잃은 뒤 더더욱 단순해졌다.
김진석은 몸이 성하진 않아 공격을 피하긴 어려웠지만 메이스도 없는 네임드 고블린에겐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공격이 통하냐가 문제였지만 혼자서 공격하다가 지쳐 움직임이 굼떠졌고, 그때를 노려 투구를 직접 벗기고 남은 고블린 단검으로 머리를 쑤셔 죽여 버렸다.
그걸 마지막으로 김진석은 바닥에 엎어졌다.
공격을 피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한 김진석은 결국엔 죽일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모든 힘을 소진해 바닥에 엎어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김진석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눈꺼풀이 점점 닫혀 왔다.
그때 눈앞에 푸른색 글씨가 나타났다.
[레벨 업. 지금 김진석 님의 레벨은 21입니다.]
김진석의 온몸에서 푸른빛이 나오더니 사라지며 갑작스럽게 레벨 업을 했다. 그리고 레벨 업으로 인해 김진석의 온몸에 있던 상처와 뼈가 부러진 것이 전부 완치됐다.
하지만 정신적인 것은 치료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온몸이 편해진 것에 점점 눈이 감겼다. 온종일 싸웠고,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눈이 감기기 직전, 눈앞에 푸른색 글씨가 나타난 걸 그는 보지 못했다.
[21레벨 달성. 탈것을 드립니다.]
* * *
로스트 월드는 매우 방대하다. 걸어서 다닌다면 몇 시간을 걸어도 불가능할 거다. 그걸 줄이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탈것이다.
대부분 MMORPG에는 탈것이 있다. 탈것이란 말 그대로 탈것. 말이나 오토바이 등을 탈것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먼 곳으로 갈 레벨이 되는 21레벨이 되면 모든 플레이어에게 탈것이 주어진다. 그 탈것은 직업마다 다르다.
그리고 게임사에서 주는 이벤트나 다른 방법으로 인해 또 다른 탈것을 얻을 수 있다.
그 탈것 중에서도 PVP 랭킹 1위에게만 주는 탈것이 있었다. 유일하게 PVP에 관련된 이벤트였고, 꽤나 멋있는 탈것이라 많은 플레이어가 PVP에 도전했었다.
하지만 랭킹 1위는 쉽지 않은 것이었고, 승률 90퍼센트가 넘는 랭킹 1위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 그를 보고 포기했다.
결국 그 탈것은 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 * *
고블린 족장은 고블린과 거대 고블린, 심지어는 네임드 고블린을 혼자서 죽인 인간이 죽은 것처럼 엎어진 채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게 궁금해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르렁.
귓가에 꽂히는 소리에 고블린 족장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급히 지팡이를 들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휘둘렀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고블린 족장인 자신을 지키는 고블린들이 있어야 했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새 주변은 피가 낭자해 있었다.
방금 막 죽은 것처럼 피가 땅바닥을 흐르고 있었고, 죽은 게 확실시되듯 금화와 아이템들이 땅에 마구잡이로 떨어져 있었다.
그때 다시 뒤에서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고블린 족장이 살아생전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소리였다.
* * *
김진석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정신 차렸다. 눈을 감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김진석은 계속해서 했었지만 눈이 감기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바로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주변은 고요할 뿐이었다.
“…뭐지?”
기절하기 직전에 김진석은 푸른색 글씨를 확인했었다. 레벨 업을 했다는 푸른색 글씨는 그의 몸을 전부 치료해 줬다.
오히려 한참을 싸웠는데도 지금이 더욱 상쾌한 기분이었다.
김진석은 땅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하는데 손에 찐득하니 뭔가가 묻었다. 그것을 확인해 보니 그건 바로 말라붙기 시작한 피였다.
그제야 콧속을 찌르는 피 냄새가 느껴졌다.
피를 옷소매에 닦으며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정말 피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피가 낭자한 것으로 보아 김진석, 자신을 공격하는 고블린들이 죽은 것 같았다.
그런데 만약 죽었다면 금화를 비롯한 아이템을 떨어뜨렸어야 했는데 그저 피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가 죽이고 아이템을 수거해 간 건가?”
그것을 제외하고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기절해 있던 자신을 그냥 두고 간 거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진석은 푸른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21레벨 달성. 탈것을 드립니다.]
“탈것. 맞네, 레벨 업 했었지? 21레벨부터 탈것을 줬으니…….”
그때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김진석은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건 그저 피뿐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김진석은 긴장한 채 계속 주변을 살펴보며 뭔가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고, 한참을 긴장을 유지한 채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김진석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나오려고 하기 직전, 다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낮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아닌 새끼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바로 뒤, 아래에서.
김진석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그마하고 아주 귀여운, 새까만 새끼 호랑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디선가 익숙했다.
“너… 흑호니?”
흑호, PVP 랭킹 1위만이 가질 수 있는 탈것이다. 게임사에서 내준 처음이자 마지막 PVP 이벤트의 상품이었다.
말 그대로 검은 호랑이였으며 검은색 가죽과 흰색 줄무늬가 섞인 호랑이였고, 특수한 기능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새끼로 변하는 것.
그리고 새끼 상태일 때 플레이어 대신 아이템과 금화를 주워 주는 역할을 했다.
새끼 흑호는 조그마한 상태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의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설마… 네가 죽였니? 탈것에는 공격 능력이 있을 리가… 있겠네.”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으니. 흑호는 잘했냐는 듯 계속해서 꼬리를 흔드는데, 김진석은 거기서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을 느꼈다.
“…귀엽네.”
김진석은 네발 달린 동물을 전부 다 싫어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당연히도 어렸을 때 투견에게 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데 새끼 흑호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달랐다.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모든 고블린을 죽이고 아마도 아이템까지 수거해 줬다.
김진석은 혹시나 해 쭈그려 앉아 새끼 흑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흑호, 맞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