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 *
“제리! 괜찮아?!”
시간이 조금 지나니 갑옷을 입은 남자 제리가 눈을 떴다. 마법사 차림의 여성 이덴은 갑옷을 입은 제리를 질질 끌고 숲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회색 멧돼지를 비롯한 고블린이 자신들을 발견하면 좋은 먹잇감이 될 게 뻔하니 어떻게든 이 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습격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게 이례적인 일. 최대한 빠르게 숲에서 나가야 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을 때 제리의 입에서 신음이 들려 이덴은 그를 내려 두고 급히 얼굴을 치며 그를 깨웠다.
“으윽. 여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리는 알지 못했지만 이덴은 제리가 죽은 줄만 알고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는 어리둥절했지만 갑자기 소꿉친구가 울면서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그때 산 깊은 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몬스터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고블린 숲에서 이런 소리를 낼 만한 몬스터는 없어.”
“그러면 대체… 이 소리는 뭐지?”
둘은 동시에 시선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말했다.
“가 보자.”
“도망가야 해.”
가 보자, 라고 말한 건 제리. 도망가자고 말한 건 이덴이다.
“도망가야 해. 명백한 이상 상황이야. 고블린들이나 회색 멧돼지들이 우릴 습격하지 않았던 이유도 저 몬스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더더욱 가 봐야지! 우릴 도와줬던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지도 몰라!”
둘은 그렇게 의견이 갈렸지만 이덴이 자신의 의견을 접어주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래, 알았어. 나도 우릴 도와줬던 사람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깐.”
제리는 방금까지 기절해 있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갑옷을 입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 * *
“이게… 뭔.”
“왜… 어?”
제리가 뭔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먼저 달려갔고, 뒤늦게 이덴이 제리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고블린 부락이 있었는데, 상태가 이상했다.
“피가……?”
피바다였다. 바닥에는 아직 마르지도 않은 핏물이 흐를 정도로 피가 사방에 가득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고블린 부락에 있는 건축물이라고 하기도 뭐한 건물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기이하게도 몬스터의 시체는 빛으로 변해 사라지지만 사라지기 전에 튀는 피만이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장이나 죽기 전에 잘린 신체 부위는 빛으로 사라지는데, 유일하게 피만이 남는다. 그 때문에 검은 대지가 생성된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덴과 제리는 검은 대지가 생성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 *
김진석은 건초를 걷어 내고 조심스럽게 사료통 안에서 얼굴만 꺼내서 밖을 쳐다봤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회색 멧돼지의 새끼들이 있었다.
김진석에게 이제 갓 태어난 생명을 죽인다는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이 세계는 애초에 생명을 죽여서 강해지는 세계다.
평소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도 결국엔 생명을 죽여 먹는 건데 그것과 똑같았다. 우리가 흔히 먹는 치킨도 대부분 영계, 어린 닭이라고 하니 다를 거 없었다.
그때 건초를 먹으러 오는 새끼 회색 멧돼지가 있었다.
김진석은 순식간에 놈을 낚아채 사료통 안에서 멧돼지를 죽였다. 그리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다른 회색 멧돼지의 새끼가 건초 쪽으로 다가올 때까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 고작 다섯 마리를 죽였는데 체감상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았다. 계속 이러다간 들키지 않아도 안에서 늙어 죽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고블린 족장이 온 열기가 식어 다른 일반 고블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김진석은 선택해야 했다.
들킬 확률은 적지만 사료통 안에서 계속 새끼 회색 멧돼지를 죽일 것이냐, 아니면 최대한 빠르게 나가서 많은 새끼 회색 멧돼지를 죽일 것이냐.
후자는 당연히 들키겠지만 전자도 결국엔 언젠가 들킨다.
김진석의 선택은 후자.
그는 조심스레 사료통 안에서 나갔고, 손에는 고블린 몽둥이를 꽉 쥔 채 건초를 먹으러 다가온 회색 멧돼지의 새끼를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내 내리쳤다.
그 새끼 멧돼지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곤죽이 돼 죽어 버렸다. 유일하게 그 새끼 멧돼지만 배고팠는지 사료통 근처에 있었고, 다행히 그때까지는 들키지 않았다.
아쉽게도 금화 몇 개만 떨어뜨릴 뿐이었고, 김진석은 회색 멧돼지의 새끼가 모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똑같이 한 마리의 새끼 멧돼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마찬가지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죽었지만 근처에 있던 회색 멧돼지의 새끼가 뀌이익! 소리쳤다.
그 잠깐 사이에 김진석은 고블린 몽둥이를 휘둘러 순식간에 두 마리의 회색 멧돼지의 새끼를 죽였지만 고블린이 눈치채 버렸다.
김진석은 최대한 많은 회색 멧돼지의 새끼를 쳐 죽였지만 열 마리를 채 죽이기도 전에 고블린이 그에게 단검을 날렸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랐던 김진석은 조그마한 바람 소리에 반응해 급히 앞으로 굴렀다.
덕분에 단검을 피했고, 김진석은 자신이 죽인 회색 멧돼지의 새끼가 있던 자리를 급히 살펴봤지만 금화 몇 개가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고블린 몽둥이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져 버렸다.
급히 고블린이 던졌던 단검을 찾아 주웠지만 이미 김진석에게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다가왔다.
고작 손바닥 한 뼘 만한 단검만을 손에 들고 김진석은 고블린과 대치하고 있었다.
“미치겠군.”
다행히 고블린 족장은 이곳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원래부터 이 고블린 부락에 살았던 고블린만이 김진석에게 다가온 것이다.
고블린들은 회색 멧돼지의 새끼가 눈에 띄게 죽은 것을 보고 크게 화난 것 같았다.
고블린들이 김진석을 보고 소리치고 있었다. 김진석은 그걸 보고만 있지 않았고, 순식간에 그들의 중앙으로 파고들어 단검으로 한 고블린의 목을 찔러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 고블린을 바로 날아오는 단검에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온몸에 수많은 단검이 박힌 고블린이 빛으로 변해 사라졌고, 운이 좋게도 아이템이 떨어져 김진석은 급히 그 물건을 주웠다.
푸른색 글씨가 그 아이템의 정보를 알려 주고 있었지만 느긋하게 그걸 볼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 아이템은 방패로 보였다.
한 손으로 들 수 있고 조그마한, 고작 손과 팔꿈치만을 가릴 수 있는 방패였지만 그것만으로 김진석은 만족했다.
그 방패를 잠깐 줍는 사이에 고블린들은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 더욱 흥분해 단검을 수차례 날려 댔다.
고블린들은 영리하게도 한 곳만 노리지 않았고 김진석의 사지를 노렸다. 하지만 김진석은 이미 경험이 있었고, 자신의 팔다리로 날라 올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안다고 모든 공격을 막을 순 없었다. 왼손은 고블린 단검, 그리고 그가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손인 오른손에는 방패를 둘러 최대한 몸을 숙이고 근처에 있는 고블린에게 달려갔다.
다리를 잃으면 죽는다. 그걸 알기에 최대한 다리 위주로 방어하며 고블린에게 달려갔다. 비록 팔에 단검이 박히긴 했지만 버틸 만했다.
고블린들도 김진석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보았기 때문에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신체적 차이로 인해 금방 김진석에게 잡혔다.
비록 다리를 제외한 모든 곳에 단검이 박혀 있었지만 녀석을 잡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판단 미스였다.
그 고블린의 목에 단검을 꽂았으면 안 됐다. 녀석을 최대한 살려서 단검의 방패로 계속해서 사용해야 했다.
김진석은 뒤늦게라도 고블린을 한 놈 잡았다. 당연히 그 고블린은 반항했지만 김진석은 녀석의 팔을 꺾어 제압했다.
그래 봤자 고블린의 몸이 작고 김진석의 몸이 워낙 커서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이 고블린 숲에서 나오는 고블린은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 레벨이 높은 고블린들은 독을 사용하지만 적어도 이곳은 아니다.
김진석은 몸에 박힌 고블린 단검을 뽑아 근처 고블린에게 견제 식으로 던졌다. 늙은 고블린과 달리 훨씬 날렵한 고블린들은 그런 대충 던지는 공격 따위는 맞지 않았다.
물론 김진석도 맞으라고 던진 공격은 아니었고, 이미 온몸에 단검이 박힌 고블린의 몸을 들고 다른 고블린에게 달려갔다.
고블린 단검은 살상력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이렇게 온몸에 박힌 이상 금방 죽게 될 것이 뻔했기에 김진석은 바로 다른 단검 방패막이를 얻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고블린들이 연막탄을 사용했다.
“쯧, 잊고 있었군.”
고블린들이 체력이 낮아지면 연막탄을 사용해 도망간다. 그래 봤자 게임에서는 실루엣으로 전부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게임에서는 체력이 낮아질 때만 사용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그와 동시에 들고 있던 고블린이 빛으로 변해 사라지며 아이템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기껏해야 멀쩡한 고블린 몽둥이가 떨어졌을 뿐이다.
“고작 한두 마리 죽었다고 도망갈 줄이야.”
그래도 다행이었다. 연막탄은 김진석만 안 보이는 게 아니었다. 도망가는 게 목적인 고블린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쉬는 시간이 생겼고, 김진석은 가지고 있던 최하급 포션 하나를 마시고 오른손에 두른 방패의 상태를 확인했다.
[고블린 장인 방패.
투사체를 막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방어력 +5 투사체를 막아 낼 때 +10]
“설마 방어력 때문에 단검이 덜 박힌 건가?”
김진석은 몸에 박힌 단검을 뽑아낼 때 큰 고통도 없었고, 깊게 박히지도 않았다. 달려가는 물체를 정확히 맞추는 능력이 고블린에게 있을 거라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 한들 늙은 고블린보다 못한 것 같았다.
김진석이 숨을 고르면서 잠깐 생각하던 그때 땅을 울리며 뭔가가 달려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방어 자세를 취한 순간 다른 고블린보다 거대한 고블린이 달려들었다. 고블린 주제에 크기가 김진석과 비슷했고, 그대로 달려들어 김진석을 어깨로 밀쳐 냈다.
마치 황소가 달려드는 것 같았고, 김진석은 버틸 새도 없이 순식간에 뒤로 나가떨어졌다.
급히 일어섰지만 등이 얼얼했다. 쓰라리고 땅이 거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찰과상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런 김진석을 마치 비웃는 듯이 그 거대한 고블린 세 마리가 더는 공격하지 않고 김진석이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거대 고블린은 일반 고블린과 무장도 달랐다. 가죽 갑옷을 엉성하게 입고 있는 고블린이었지만 거대한 고블린은 달랐다.
엉성하게 입고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가죽 갑옷이 아닌 마치 찰스나 다렌이 입을 것만 같은 기사들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제대로 맞지도 않고 곳곳에 부서져 있는 것이 보였지만 가죽 갑옷과는 내구성이 확실히 달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렌이나 찰스가 입은 갑옷처럼 문양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 수습 기사 같은 자들을 죽이고 빼앗은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나무로 된 고블린 몽둥이 따위를 들고 있던 고블린과 달리 녀석들은 쇠로 된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다른 거대한 고블린, 겉모습만 보면 오크라고 봐도 무방한 놈들은 다가오더니 김진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김진석을 밀쳐 넘어트린 거대 고블린 장본인이 앞으로 나서며 메이스를 꺼냈다. 마치 기사들이 1:1 대결을 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게임에서는 없는 이벤트다.
“어디서 본 건 있나 보군. 그나마 처음으로 현실인 게 내게 도움이 되네.”
어느새 고블린 족장이 다가와 김진석을 흥미롭게 보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 놈들은 저 고블린 족장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 같았다.
김진석도 마찬가지로 단검을 품에 넣고 고블린 몽둥이와 고블린 장인 방패를 손에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는 그때 갑자기 메이스를 손에 든 거대한 고블린이 소리치며 김진석에게 달려들었다.